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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66화 (166/181)

< 166화 >

검은머리 기사왕 166화

세상은 두 개로 갈라졌다. 한 곳은 언데드 군단이 넘실거리는 검은색 대지, 또 나머지 한 곳은 인류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친 연합군이 갖가지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다.

발사하라!

끼기기기기긱, 퓽!

엘레나 공주가 신호한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엘프 궁수들이 일제히 언데드 군단을 향해 불화살을 발사했다. 그 정교한 사격 앞에 언데드는 마치 기름처럼 녹아내렸다.

물러나지 마라!

방진! 사력을 다해라!

물론 엘프 궁수들이 마음껏 시위를 당길 수 있는 이유는 언데드 군단을 틀어막고 있는 동부 스파이크 병과 북방 떡갈나무 보병대가 하나로 뭉친 방진 덕분이었다.

과거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웠던 인간과 엘프 두 집단은 이제 서로를 지키기 위해 시위를 당기고 방패를 높이 들고 있었다.

방패 위로!

신호가 떨어졌다. 방진은 일제히 자세를 숙이며 방패를 위로 올렸다. 그러자 전장을 관통하는 전쟁 고함과 함께 도끼를 든 오크 전사들이 방패를 밟고 뛰어올랐다.

크아아아아아 - - -!!!

목숨을 도외시한 육탄 돌격이다. 방진 사이로 쏟아져 나온 녹색 피부들은 진정한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명예를 울부짖어라. 오크 전사들은 마지막까지 포효했다.

치직!

그 순간 도화선이 타오른다. 요새 위 언데드를 정조준한 사석포가 드디어 장전을 끝냈다. 오크 전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뒤로 물러나자 포구가 화염을 쏟아내었다.

콰아아앙 - - - -!!!

요새 위 사석포가 일제 사격한다. 흑색 화약과 함께 터진 돌 탄환과 자갈 더미는 몰려오는 언데드를 찢어발겼다. 불타는 화약과 강철!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끼기기이이익!

쿵! 쿵! 쿵! 쿵!

하지만 이 모든 공세는 결국 끝이 보이지 않는 전장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죽이면 살아나고 죽이며 또 살아나는 언데드 군단은 쉴 새 없이 연합군 방어선을 몰아쳤다.

“전방 보급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예비대와 전쟁 마차를 파견해라! 전방이 밀리는 순간 보급로는 소용없어!”

“폐하! 오염 억제제가 다 떨어져 갑니다!”

“물로 희석해서 최대한 시간을 벌어라! 곧 후방에서 여유분을 보내줄 것이다!”

전장 모든 상황이 지휘부로 전해져 왔다.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 동부왕 리처드는 숨 돌릴 틈 없이 명령을 내리며 연합군 모든 움직임과 대처를 조율하고 있었다.

기사왕이 강인한 무력으로 군대를 이끌었다면 리처드 왕은 철저한 균형으로 방어선을 떠받들고 있다. 작은 거인이라 불렸던 강철왕이 드디어 진면목을 발휘한 것이다.

“버텨라!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

검성은 해낼 것이다. 광휘를 보였던 기사왕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연합군은 불사왕을 향해 반격할 수 있다. 리처드는 부관들을 돌려보내며 전장 상황을 살폈다.

우우우우우우 - - - - -!!

쿠웅! 쿠웅! 쿠웅!

하지만 전장이 한참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이었다. 진격이 정체되었다고 생각한 불사왕과 언데드 군단이 드디어 숨겨 왔던 전력을 연합군 방어선으로 투입했다.

펄럭! 펄럭!

쿵! 쿵! 쿵!

하늘 위로 용을 연상하게 하는 언데드가 날아오른다. 또한, 지상에는 대수림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거대 언데드 무리가 적, 아군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짓밟기 시작했다.

“괴, 괴물이다!”

“으아아아아악!”

두려움이 유발된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언데드 괴수와 마주한 연합군의 사기는 가파르게 떨어져 내렸다. 리처드는 곧바로 탁자 위 투구를 뒤집어썼다.

“폐하!”

“놈들에게 모든 화력을 집중해! 그리고 기사단과 기병대는 모두 나를 따른다!”

드디어 불사왕이 아껴 두었던 카드를 꺼냈다.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연합군도 최대 전력을 꺼낼 수밖에 없다. 리처드는 곧바로 지휘부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푸르륵!

“부탁한다.”

막사 앞에는 재상이 직접 선별해 배치한 흰 뿔 사슴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털과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은 리처드는 안장 위로 올라타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폐하를 따르라!”

기다리고 있던 흰 뿔 사슴 기병대가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그 뒤와 대열에는 동부, 엘프, 오크 종족을 하나로 연합한 기병대가 함께 내달리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 - -!!

엄청난 규모다. 그동안 전력을 보존한 이유가 보내주겠다는 듯 리처드는 기병대와 함께 언덕 아래를 내달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사석포가 시발점을 끊었다.

쾅! 쾅! 콰르르릉!

모든 화력이 한곳에 집중된다. 방진을 학살하던 거대 언데드는 짓이기는 살점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엄호를 등에 업은 연합군 기병대는 일제히 돌격 나팔을 울린다.

뿌우우우우우우우 - - - - - -!!!

드디어 길이 생겼다. 신호를 받은 보병대는 서서히 뒤로 물러났고 그 빈자리를 연합군 기병대가 채운다. 리처드는 드디어 불사왕이 이끄는 언데드 군단과 마주했다.

척!

광활한 대지 위 검은색 파도가 일렁인다. 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수평선은 분명 깨끗한 하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을 앞으로 추켜든 리처드는 전장을 달렸다.

*       *       *

썩은 나무를 엮어 뗏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강 위에 띄우자 3명 정도는 충분히 옮길 수 있는 훌륭한 이동 수단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그 즉시 조용히 강을 따라갔다.

도비 말대로 모든 길과 지역에는 다양한 언데드가 상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하나 같이 우리를 감지하지 못했고 존재하지 않는 흔적만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했다.

끼익, 끼익.

지금 따라가는 강은 세계수 성지로 향한 직선 경로나 마찬가지다.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나자 강폭이 넓어지며 성지 영역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물 색이 이상해.”

오염된 강물은 시커먼 구정물이다. 하지만 하류로 접어들자 오염되었던 물은 마치 사파이어를 연상하게 하는 푸른색으로 변했다. 도비는 황급히 우리를 만류했다.

“손 넣지 마세요!”

무심코 손을 뻗었던 검은 화살은 깜짝 놀랐다. 아니나 다를까 강물은 빛이 아닌 사특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도비는 서둘러 다가와 우리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물 아래를 봐요.”

물 아래로 안개 같은 형체가 보인다. 아니, 안개가 물속에 낄 리가 없으니 저 형체는 다른 것이라고 봐도 좋았다. 영혼······. 수많은 영혼이 강 밑을 맴돌고 있었다.

“불사왕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이에요. 구원받지 못해 이 성역을 떠돌고 있죠.”

어떻게 권능을 유지하나 했더니 사로잡은 영혼 그 자체를 가축처럼 사육하고 있었다. 이를 일찍이 눈치챘던 안내자 도비는 고통받는 동족 앞에 슬픈 표정을 지었다.

“······계속 가죠.”

뗏목은 절규하는 영혼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2~3시간가량을 더 나아가자 어느덧 흐름은 약해지고 바람 또한 잦아들었다. 도비가 살며시 한 방향을 가리켰다.

“- - - - - - - - -.”

세계수는 엘프들이 사는 서부를 떠났다. 하지만 녀석이 수천 년간 자라면서 남긴 거대한 껍데기는 여전히 남아 거대한 성지와 문명 도시 하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물론 불사왕이 서부를 점령한 지금은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짐과 무기를 챙기며 참담함을 침묵으로 대신했다.

“큰 호수가 성지를 감싸고 있어요. 이대로 쭉 가기만 하면 도착할 거에요.”

“언데드가 있을까?”

“네, 성지에는 무조건 있어요.”

도비 말대로 시들어 버린 세계수 가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언데드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위치를 기억해 두며 하루 반나절 동안 뭉쳐 있던 근육을 풀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그래.”

“도대체 구하려는 물건이 뭐예요?”

그동안 안내자 역할을 착실하게 해온 도비다. 거기다 자처해서 함께 들어가겠다는 의지까지 보였으니 굳이 비밀로 할 이유는 없었다. 한동안 고민한 나는 순순히 말했다.

“맨드레이크라고 하는 약재다.”

“······들어본 적 있어요. 그것만 찾으면 바로 북방으로 떠날 수 있는 거죠?”

“잘 따라오기나 해.”

강이 호수와 합쳐진다. 그것을 따라 흘렀던 뗏목은 성지가 보이는 육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뗏목에서 내린 우리는 즉각 기척을 죽인 채 앞으로 나아갔다.

“이쪽이에요.”

성지로 들어가는 큰 대문이 있지만, 그곳을 통과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도비는 다른 길을 알고 있다는 듯 우리를 안내했고 그곳에는 내부와 이어지는 작은 틈이 있었다.

“도대체 이런 길을 어떻게 아는 거야.”

“레인저는 남들이 모르는 길을 가죠.”

당돌한 녀석이 재능까지 겸비했다. 아마 무사히 북방으로 돌아가 교육을 받는다면 당대 최고의 레인저로 성장할지도 몰랐다. 우리는 피식 웃으며 성지 안으로 들어섰다.

꿀꺽.

세계수가 남기고 간 껍데기 속에는 파괴된 도시가 이방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긴장이 된 도비는 마른 침을 삼키며 내 뒤로 숨었다. 안내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검은 화살이 입을 열었다.

“맨드레이크는 양지바른 땅을 좋아해. 아마 하늘 정원까지 올라가야 할 거야.”

“······움직이자.”

엘레나가 준 성지 지도를 외우고 또 외웠다. 비록 처음 오는 곳이지만, 대략적인 길은 찾을 수 있다. 하늘 정원은 저 높이 성지 꼭대기에 보이는 정원 중 하나였다.

사박, 사박, 사박.

도시를 우회했다. 그리고 나무 껍데기인 벽을 따라 걸어 원형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았다. 곳곳에 무너진 바닥과 구멍이 뚫린 벽은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펄럭, 펄럭!

끼이이익!

“쉿!”

성지까지 오는 것이 애피타이저였다면 안으로 들어온 지금은 본 요리다. 우리는 수시로 날아다니는 언데드를 경계했고 들키지 않도록 매번 걸음을 멈춰야 했다.

후욱.

1시간이면 오를 거리가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빠르게 뛰는 것보다 수시로 멈추는 긴장감이 더 힘들었다. 들키면 안 된다, 들키면 안 된다.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사박, 사박.

그렇게 계단을 오르는 데만 2시간이라는 시간을 소비했다. 부서진 나무 틈으로 밖을 내다보자 우리가 지나쳐 온 수많은 계단과 도시가 흘린 땀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이다.

끼익.

검은 화살이 시위를 당겼다. 나 또한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오른손을 꼼지락거렸다. 용기를 낸 두비는 굳게 닫힌 하늘 정원 입구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

하지만 우리를 반긴 것은 오염된 정원도, 언데드도 아닌 산뜻한 풀냄새였다. 오랜 악취로 후각이 무뎌졌는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팔락팔락.

“나비?”

믿기지 않는 풍경이 펼쳐졌다. 오염된 땅과 성지 위에 에덴동산 같은 하늘 정원이 우리를 맞이한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하늘 정원은 오염되어 있지 않았다.

“뭐해요! 빨리 찾아야죠!”

나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도비 말대로 좋으면 좋았지 나쁜 현상은 아니다. 하늘 정원이 멀쩡할수록 맨드레이크를 구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얼굴이 상기된 도비는 다람쥐처럼 정원을 가로질렀고 그 뒤를 나와 검은 화살이 따라갔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신선한 공기는 흐려졌던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기억해, 잎 3개.”

“붉은 열매가 매달린.”

“뿌리 식물이요!”

우리는 그 대화를 끝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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