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검은머리 기사왕 165화
이들은······. 아니, 그러니까 검은 화살의 친모 메레디스와 어린 엘프들은 피난 행렬을 따라잡지 못한 일부 낙오 인원이었다.
행렬을 따라가지 못했으니 당연히 이주 선단에 탑승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공주가 망명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엘프 이주가 성공했다는 소리에 얼마나 놀라워하던가. 그 주체가 북방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엘프들은 나를 향한 옅은 경계를 조금씩 풀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수록 검은 화살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있어 오랜만에 만나는 친모는 작전 중 마주하게 된 또 다른 변수의 불과해 보였다.
밤은 긴데 상황은 불편하다. 필요한 정보를 전부 나눴다고 생각한 나는 가방을 열어 넉넉하게 챙겨온 건량을 꺼냈다. 차 대접을 받았으니 작은 보답을 할 차례였다.
달그락, 달그락.
가지고 있던 건량과 소금을 넣어 묽은 죽을 끓였다. 그러자 굶주렸던 아이들은 정신없이 죽을 퍼먹었고 마찬가지로 묽은 죽을 삼킨 메레디스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 면목이 없네요.”
어선 가득 쌓여 있는 게 이런 건량이다. 나는 여의치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든 뒤 냄비 앞에 모인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중에는 우리를 피해 도망쳤던 꼬마 녀석도 있었다.
“저희를 지켜보고 있더군요.”
“나,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닐 거에요. 두비는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줄 알아요.”
감각이 예민한 검은 화살조차 저 조그마한 녀석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마 본능적으로 인기척을 지우는 모양인데 내가 알고 있는 레인저 중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
“이 근방이 전부 네 구역이구나.”
언데드 놈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려면 이 정도 능력은 있어야 했다. 벌집을 건드린 것은 다름 아닌 식량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던 꼬마 엘프 두비였다.
“······.”
대답은 없었다. 두비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듯 경계 어린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애는 애다.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천을 꺼내 들었다.
“아!”
도비는 내가 자수가 새겨진 천을 꺼내자마자 달려들었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낚아챈 뒤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 깜짝 놀란 메레디스가 그런 녀석을 나무랐다.
“두비!”
“괜찮습니다.”
보통 물건을 향한 애착에는 사연이 있는 법이다. 가뜩이나 부모를 전부 잃은 아이에게 무례를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천을 소중히 챙기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었다.
덜컹.
“······끝났으면 가자.”
어느덧 냄비가 다 비었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눈을 감고 있던 검은 화살이 매몰찬 목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끝났으니 바로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이, 이르실!”
그 순간 표정이 수척해진 메레디스가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검은 화살은 붙잡힌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얼굴에는 표독함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르실이라고 부르지 마.”
“아······.”
어머니가 지어 준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차가운 말 앞에 메레디스는 딱딱하게 굳었다. 차갑고 벽이 느껴진다. 그것은 아무리 해도 넘을 수 없는 시간이라는 벽이었다.
사과하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 후회는 눈물이 되고 과거는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어머니 메레디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는 일뿐이었다.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그동안 애써 짓눌러 왔던 불편함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눈물이 이토록 야속할 때가 있던가. 한 발자국 물러난 나는 마지막 선택을 기다리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 - - - - - -.”
검은 화살은 표정이 없었다. 아니, 오랜 시간을 함께한 나는 그 눈동자에서 짙은 슬픔과 원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흘릴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날 이렇게 말해 주지 그랬어.”
사랑받지 못했다. 행복하지 않았다. 반쪽짜리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검은 화살은 지옥보다 더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바로.
“적어도 사랑한다고 해 줄 수 있었잖아.”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었다.
툭!
“살고 싶으면 쥐새끼처럼 숨어 있어. 다음에는 이렇게 만날 일 없을 거야.”
쿵!
검은 화살은 바닥에 건량을 던졌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뒤돌아 지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마찬가지로 건량 일부를 내려놓은 뒤 그녀를 급히 뒤따라갔다.
탁! 탁! 탁! 탁!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가 눈치 없이 운다. 선선한 밤공기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자 길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는 검은 화살이 보였다. 오늘따라 왜소한 그 어깨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검은 화살.”
나는 조용히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더 이상 떨리지 않도록 꾹 안아 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손등에는 그녀가 흘린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나, 나는 이르실이 아니야.”
“그래, 검은 화살이지.”
검은 머리 이방인이 형제가 되었듯 검은 화살을 쏘는 혼혈 또한 어머니 북방의 가족이다. 이는 감히 종족과 혈통 따위로 끊어 놓을 수 있는 약한 유대가 아니었다.
“내가 지어준 이름이잖아.”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북방 모두가 너를 명예로운 검은 화살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를 다시 상기시켜 주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 주었다.
떨림이 서서히 잦아든다. 연신 고개를 끄덕인 검은 화살은 내 손을 꼭 잡고 숨을 훅 내뱉었다. 그것은 체념에서 오는 한숨이 아닌 마음을 다잡은 강인함이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그래, 새벽 일찍 나가자.”
검은 화살은 빠르게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본래 임무를 되새기며 손을 토닥였고 나 또한 동의했다. 우리는 그렇게 은신처로 삼았던 건물로 되돌아가려 했다.
“잠깐만요!”
하지만 그 순간 익숙한 얼굴 하나가 지하실 건물을 뛰쳐나왔다. 은신처로 향하는 우리를 불러세운 작은 그림자는 다름이 아닌 어린 엘프 중 하나였던 두비였다.
허억, 헉.
거칠게 숨을 몰아쉰 두비는 쭈뼛쭈뼛 앞으로 다가왔다. 나를 경계하는 눈빛은 여전했지만, 반대로 무언가를 묻고 싶은 입술은 우물거렸다. 녀석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세계수 성지로 향하는 것 맞죠?”
“······엿들었군.”
“네, 계속 뒤따라왔거든요.”
엿들었다는 말이 무척 당당하다. 졸지에 목적지를 들킨 나는 오른쪽 허리에 찬 검을 의식했다. 하지만 악의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두비를 보며 가볍게 포기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세계수 성지로 향하는 직선 경로는 전부 막혔어요. 이쪽 길로 이어지는 길도 하늘을 나는 놈이 수시로 돌아다니죠.”
“그건 이미······.”
“내일은 왼쪽으로 향하려 했죠?”
정면, 오른쪽 다 막혔으니 마지막으로 남은 길은 왼쪽뿐이다. 하지만 두비는 그마저도 알고 있다는 듯 눈동자를 빛냈다. 녀석은 서부 전역을 돌아다녀 본 것이다.
“그쪽도 막힌 지 오래예요.”
언데드 놈들이 세계수 성지로 향하는 모든 길을 봉쇄했다. 그 말인즉슨 맨드레이크를 구하기 위해서는 저 감시망을 피해가거나 놈들과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소리다.
둘 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칫하다가는 어디 있는지 모를 불사왕에게 발각당해 나도 그녀도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 북방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안전한 지름길을 알아요. 제가 안내하면 들키지 않고 다녀올 수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두비의 은신 능력만큼은 입증되었다. 거기다 오랜 시간 서부를 돌아다녔던 경험까지 있으니 성지로 향하는 지름길을 정말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대신 원하는 게 있어요.”
“말해라.”
“······돌아가는 길에 태워 주세요.”
당돌한 제안이다. 동시에 무게가 맞는 거래이기도 했다. 두비는 검은 화살의 눈치를 연신 살피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저랑 하는 거래잖아요. 메레디스랑 다른 애들은 그냥 옮기는 짐이라고 생각하세요. 사적인 감정은 잠시 미뤄두자고요.”
거래는 자신과 한다. 메레디스는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닌 타인이라고 생각하라. 어린 줄로만 알았던 엘프 두비는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너를 어떻게 믿고?”
“······목숨을 걸었잖아요. 당신들처럼.”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맨드레이크를 확보하지 못하는 이상 엘프들도 돌아가지 못하니 말이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검은 화살을 바라보았다.
후.
나와 눈을 마주친 검은 화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뒤로 물러선다. 긍정의 뜻이다. 두비는 활짝 웃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할게요!”
두비는 흠이라도 잡힐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돌했던 제안과는 다르게 지하실로 돌아가는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검을 보았나? 감이 좋은 녀석이다.
“우리도 들어가자.”
“응.”
새벽 일찍 출발하려면 충분한 휴식을 취해두어야 한다. 나와 검은 화살은 한 시간이라도 잠을 청하고자 은신처로 돌아갔다. 서부의 밤은 그렇게 새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이쪽이에요.”
마지막으로 무기와 장비를 점검한 뒤 하룻밤을 보냈던 은신처를 나섰다. 그러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엘프 꼬마 두비가 수풀에서 빠져나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문제없죠?”
“그래.”
거래 내용은 단순하다. 우리가 무사히 맨드레이크를 확보한다면 돌아가는 길에 남은 엘프 일행을 데리고 간다. 재차 확인을 받은 녀석은 홀가분하게 앞장섰다.
“따라오세요. 해가 지면 놈들이 활발해지니까, 그 전에 중간지점으로 가야 해요.”
말이 없던 첫인상과는 달리 무척이나 적극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인 다음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녀석은 바삐 걸으면서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언데드 놈들은 감지 능력이 뛰어나요. 하지만 대부분이 생명체 기운을 읽는 것에 국한된 거지 다른 감각은 떨어지거든요.”
“시각과 청각 같은?”
“네, 맞아요. 그래서 정말 별별 시도를 다 해 봤죠. 썩어 버린 독버섯으로 옷도 만들고 더러운 오물도 몸에 발라 보고······.”
“노력이 가상하구나.”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오염된 시체 밑에 숨은 적이 있어요. 해골 기수가 바로 옆을 지나갔는데 알아채지 못하더라고요.”
두비 입장에서는 끔찍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경험은 오염된 땅을 가로지를 소중한 기회를 주었다. 녀석은 언덕 위로 올라가 외쳤다.
“저 강이에요.”
두비가 오른쪽 손을 들어 숲 사이로 흐르는 강을 가리켰다. 물론 그 강에는 시커먼 구정물과 함께 사특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오염 물질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뗏목을 띄우면 안전해요.”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두비는 강에 흐르는 오염 물질로 생명체 기운을 지우고자 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강이 아닌 녀석이 들어 올린 팔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옷이 가려 주지 못한 피부가 있다. 그곳에는 검은색 오염 침식이 진행 중이었다.
“너······.”
“아!”
두비는 화들짝 놀라 팔목을 숨겼다. 그리고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후드를 뒤집어쓴 채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떨림을 감춘 목소리가 멈춘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둘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