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검은머리 기사왕 164화
검은머리 기사왕 164화
흰색 천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자수 조각이었다. 아직 오염 부식이 진행되지 않을 것을 보아 놈들은 아직 살아 있는 엘프를 추격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는 우리로서는 엘프 생존자라는 존재가 그리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그들을 구할 마땅한 여유도 이유도 없었으니까.
“쉿.”
다각! 다각! 다각!
현재 이쪽 근방은 톡 건드린 말벌집과 같았다. 숨어든 엘프들을 잡기 위해 파견된 해골 기수들이 본격적으로 지역을 수색하고 흔적을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장 가까운 직선 경로는 놈들로 인해 통제되고 만다. 전투를 최대한 피할 필요가 있는 나와 검은 화살은 고민 끝에 결국 경로를 바꾸기로 했다.
“우회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엘레나 공주가 양도한 서부 지도와 검은 화살의 어린 시절 기억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빠르게 뛰어가는 검은 화살 뒤를 따랐다.
사박, 사박, 사박!
서부는 발달한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이 평탄한 대수림 지형이었다. 비록 지금은 침식이 진행되어 대부분이 오염되었지만, 아직 죽어 가는 형태만은 남아 은폐를 도왔다.
후욱, 훅.
원래 가려던 경로와 멀어지기 위해 정신없이 뛰고 또 뛰었다. 숨이 거칠어질수록 심기를 어지럽히던 해골 기수들은 서서히 멀어져 갔고 길 또한 빽빽한 숲으로 바뀌었다.
찌릿!
피부를 저릿하게 아리는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외곽을 벗어날수록 오염침식이 더욱 활발해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잠깐!”
해가 짧다. 아니, 짙게 낀 검은색 먹구름이 황혼을 재촉한 것이다. 한참 우회 경로를 달리던 나와 검은 화살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 멈춰 황급히 은폐했다.
우우우우우우 - - - - -!
처음에는 단순한 그림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해가 지고 보니 먹구름 사이를 무언가가 유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래 같은 몸집과 커다란 날개를 지닌 언데드였다.
꿀꺽.
꼭 전설 속 용을 보는 것 같다. 하늘에 뜬 눈처럼 모든 것을 내려다본 놈은 유유히 하늘 위를 지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은폐를 푼 검은 화살이 서둘러 내게 달려왔다.
“느꼈어?”
“······아슬아슬했다.”
놈이 하늘을 날아오른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만약 재빨리 인기척을 지우지 않았다면 저 부유 언데드가 우리를 관측했을 거란 걸 말이다.
작전이 난항을 겪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길이 막힐 줄은 몰랐다. 놈이 날아간 경로를 예측해 본 나는 결국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뒤로 물러나자.”
상식을 무너뜨리는 존재가 등장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뛰어가다가는 맨드레이크를 얻기는커녕 도착하기도 못 할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쓸 만한 장소를 알아.”
일단 밤을 지낼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검은 화살은 어딘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안내했다. 도착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무척이나 잘 아는 장소였다.
“······고향 마을이 근처야.”
하필 우회한 지역이 검은 화살이 근방이라 일컫던 고향 마을이었다. 나는 기가 막힌 우연 앞에 눈치를 살폈지만, 검은 화살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사박, 사박, 사박.
위치도 적당하고 거리도 가까운 게 은신처로 삼기 제격이다. 우리는 굳이 더 돌아다닐 필요도 없이 곧장 마을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배회하는 언데드는 보이지 않았다.
“저쪽이야.”
마을은 모직을 생산하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물론 그녀가 수십 년 만에 돌아온 지금은 모두가 피난을 가거나 살해당해 싸늘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검은 화살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길을 가로지르며 아직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문을 살며시 열자 거친 경첩이 떨려 왔다.
끼이이익, 덜컹.
당연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문과 창문을 걸어 잠갔고 빛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커튼도 쳤다. 검은 화살이 기름 등잔을 꺼내 불을 붙였다.
“······하나도 안 변했네.”
항상 과거 이야기를 숨겨 오던 그녀의 어릴 적 집이다. 긴 시간을 함께해 온 친우로서 감회가 무척 새로웠지만, 굳이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집과 마을은 조용했다. 한동안 주변을 살핀 나는 이곳이 안전하다는 판단과 함께 짐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검은 화살이 다락방에서 찾은 깨끗한 담요를 바닥에 깔았다.
“새벽 일찍 출발할 거지?”
“응.”
고된 항해와 강행군으로 인해 온몸이 뻐근했다. 그것은 검은 화살도 마찬가지였는지 무거운 눈꺼풀을 참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가 편히 눕게 했다.
“먼저 자. 이따 교대하자.”
“······으응.”
고향 마을로 돌아와서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생각이 많아 보인다. 나는 표정이 복잡한 검은 화살을 먼저 쉬게 한 다음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기름 등잔을 껐다.
훅.
방안은 어두워졌다. 한참을 뒤척이던 검은 화살은 이내 쥐죽은 듯이 잠이 들었고 한동안 어두운 방 안을 둘러보던 나는 살며시 의자를 끌고 와 창문 앞에 앉았다.
달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밤이다. 대신 먹구름 위에 가라앉은 별은 틈틈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검집 위에 조용히 오른손을 올려둔 나는 그제야 편하게 숨을 내뱉었다.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어두운 밖, 어두운 안, 공간이라는 구분이 희미해지는 짙은 밤이 저절로 상념을 불러왔다. 나는 무심코 동쪽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투성이는 괜찮을까? 방어선을 맡게 된 리처드가 걱정이다. 재상도 헬레나도······. 그리고 북방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짐을 덜어내고 온 무게만큼이나 가슴이 무거웠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동안 거친 강을 건너오게 해 준 것은 이 가슴 속 품고 있는 무거운 책임이란 것을 말이다.
나는 복잡한 심경을 차분히 다스리며 어두운 밤이 서둘러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바스락.
“- - - - - - - -!”
허나, 그 순간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칫하면 놓쳤을 만큼 작은 기운이다.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인기척을 처음 감지한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바스락!
작은 그림자다. 졸지에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은 깜짝 놀라 뒤로 달아났다. 언데드? 존재가 너무 흐리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잠이 든 검은 화살을 급히 깨웠다.
“검은 화살!”
“무, 무슨 일이야?”
“누군가 이쪽을 지켜봤어.”
인기척을 지우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분명 누군가 마을 안으로 들어온 것을 알고 정체를 살피기 위해 근방을 배회한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박, 사박, 사박!
길을 건너 놈이 숨이 들어간 골목을 가로질렀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발자국은 나를 따돌리기 위해 부근을 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이쪽이야!”
검은 화살이 빠르게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곧바로 지름길을 안내하더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놈을 추격하게 도왔다. 그 뒤를 따라간 나는 검을 뽑으려고 했다.
“······꼬마?”
검은 뽑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야 끝에서 발견한 정체불명 감시자는 언데드가 아닌 한 엘프 꼬마였기 때문이다. 녀석은 황급히 무너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탁!
나와 검은 화살은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엘프 꼬마가 급히 도망친 폐가로 다가가 안을 살폈다. 먼지랑 흙이 쌓인 내부 그 어디에도 엘프 꼬마는 보이지 않았다.
“더미야.”
하지만 아직 지우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폐가 바닥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문이 하나 있었나. 기척을 줄인 나는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잡았다.
끼이익, 덜컹.
퓽!
그 순간 반쯤 열린 문 사이로 화살이 날아왔다. 그 짧은 찰나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해낸 나는 날아오른 화살을 낚아챘다. 탁! 화살이 반으로 갈라졌다.
상대가 동요하는 게 느껴진다. 나는 또 다른 화살이 날아오기 전 서둘러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지하실에서 새어 나온 옅은 빛이 내 얼굴을 비췄다.
“인간······? 인간이 여길 왜?”
서로가 얼굴을 확인했다. 여성 엘프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고 나는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폈다. 언데드가 아니란 것을 확인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시발! 다짜고짜 화살을······! 어?”
내가 다칠 뻔한 사실에 분노한 검은 화살이 걸쭉한 욕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여성 엘프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려는 찰나 말이 끊기고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이르실?”
얼굴을 먼저 알아본 이는 검은 화살이었지만, 먼저 이름을 묻는 이는 상대 쪽 엘프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활을 떨어트린 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이르실이 맞니······?”
검은 화살이 등잔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짙은 밤만큼이나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 년 만에 돌아온 고향과 그곳에서 만난 옛 인연은 다름이 아닌.
“······엄마.”
친어머니였다.
* * *
쪼르르륵.
“상황이 변변치 않아서······.”
“고맙습니다.”
여성 엘프. 아니, 검은 화살의 어머니 메레디스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채워 주었다. 물론 내용물은 뜨거운 물이 다였지만, 나는 기꺼이 감사함을 표하며 호호 불었다.
차를 마시는 와중에 살며시 눈동자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검은 화살과 메레디스는 어색하게 앉아 있었고 어린 엘프 3명은 나를 고양이처럼 경계하고 있었다.
“얘들은 누구야? 친자식?”
“······옆집 애들이란다.”
묻지 않아도 알 법하다. 아마 그녀와 이 엘프 아이들이 마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일 것이다. 검은 화살은 무엇이 그리 불편한지 혀를 작게 차며 고개를 돌렸다.
“쯧.”
모녀가 오랜만에 상봉한 것 치고는 분위기가 싸늘하다. 뜨거운 물을 마시다 체할 것 같은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메레디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정말 놀랐어. 혹시 무슨 일로 돌아온 거니? 만약 갈 곳이 없다면 이곳에 있어도······.”
“금방 떠날 거야.”
“으응.”
기쁜 기색이었던 메레디스는 금세 풀이 죽는다. 무언가를 조심하는 눈치인데 역시 또 다른 과거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이, 이분은 누구시니?”
하지만 딸과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었던 메레디스는 급히 나를 붙잡았다. 겨우겨우 삼켰던 찻물이 올라오려는 무렵 드디어 고개를 돌린 검은 화살이 단호히 답했다.
“내 남편.”
쿨럭, 쿨럭! 결국, 꽉 막혔던 기침이 터져 나왔다. 밖으로 도망치려던 나는 그대로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경악한 메레디스를 보고 있자니 속이 좋지 않았다.
무조건 내일 새벽 떠날 것이다. 공손히 자세를 바로 한 나는 아까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냉동고 같은 분위기에 뜨거운 물도 벌써 식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