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검은머리 기사왕 163화
노련한 선원은 이 시기 바다를 건너지 않는다. 습한 계절풍은 폭풍우를 불러오고 해류는 수시로 방향을 바꾸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방 해안을 출발한 어선 ‘정어리’는 거친 날씨와 높은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넓은 해양에 들어섰다.
철썩!
푸른색 바다가 깊고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산보다 거대한 파도는 금방이라도 선박을 뒤집을 것처럼 몰아친다.
끊임없이 출렁이는 갑판과 지독한 멀미. 나는 건량과 토악질을 함께 씹으며 선박 아래 고인 바닷물을 계속해서 퍼내야 했다.
그래도 이런 노력이 순풍을 더했는지 어선 정어리는 바다를 가로질러 목적지인 서부를 향해 꾸역꾸역 나아가고 있었다.
콰르르릉! 번쩍!
하지만 거친 날씨가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버티고 또 버텨 오던 돛은 몰려온 폭풍우 앞에 기어코 찢어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선박을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남은 체력이 전부 고갈되어 버린 나와 검은 화살은 결국 조타를 고정한 채 선실로 내려와 급히 문을 닫았다.
덜컹!
문을 닫자 아득하던 망망대해와 소음이 사라진다. 마치 다른 세상 같은 선실 안에서 우리는 체온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했다.
탁, 탁! 치익!
습한 공기가 가득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어둠을 더듬은 검은 화살은 기름이 고인 등잔 하나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화르륵!
적재한 보급품으로 가득한 선실이 환하게 밝혀진다. 바닷물로 푹 젖은 우리는 드디어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다친 곳은 없어? 아까 손이 쓸렸잖아.”
“문제없다. 그나저나 선박이 걱정이군.”
나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뒤틀리는 하단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하필 조심하라고 당부했던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으니 어선이 버텨 줄지가 걱정이었다.
“생각보다 튼튼한 녀석이야. 이대로 해류를 타고 서부에 도착하기만 하면 돼.”
하지만 검은 화살은 이를 전부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밤사이 폭풍우를 버티기만 한다면 선박은 서부 해안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꼴이 말이 아니네.”
“하하, 몸부터 녹이자.”
둘 다 수척한 건 매한가지다. 쓰게 웃은 우리는 바닷물로 젖은 옷을 벗고 등잔 앞에 앉았다. 작은 불길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체온이 피로로 지친 몸을 위로했다.
“검성.”
“응?”
그 순간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검은 화살이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오늘따라 유난히 어깨가 작아 보이는 그녀는 조용히 타오르는 등잔과 함께 입술을 달싹였다.
“세계수가 주는 열매를 거부했다며.”
“······녀석이 말해 줬어?”
“응, 나랑 가끔 대화하거든.”
엘프 피가 섞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세계수랑 대화할 수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를 난감해하고 있었다.
“왜 거절했어?”
검은 화살은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나는 등잔이 비추는 눈동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열매를 거부한 내게 무척이나 서운해하고 있었다.
“오래 살면 좋잖아. 왕국이 발전하는 것도 직접 지켜보고, 눈투성이가 가족을 이루는 것도 기뻐해 주고······.”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니 상상만 해도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다. 양쪽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검은 화살은 끝내 자신의 소망을 말하며 부끄러운 고개를 푹 숙였다.
“같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녀의 마음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한없이 내주는 헌신과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으니까. 나는 무언가 꽉 막힌 목소리를 내려 했다.
“나는······.”
“됐어, 말 안 해도 돼.”
하지만 검은 화살은 내 입을 막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동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시간이 무엇을 막았는지를 말이다.
“대신 약속 하나만 해 줘.”
검은 화살은 선실 한쪽 구석을 훑었다. 그리고 남몰래 숨겨 놓았던 흰색 목제 상자를 들고 와 뚜껑을 열었다. 그곳에는 환하게 빛나는 유리병 하나가 놓여있었다.
“재상이 나중에 주라고 당부했어. 절대, 절대 먼저 보여 주지 말라고. 검성이라면 아끼고 아껴서 다시 가져올 거라고 말이야.”
유리병 속에는 투명한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희석하지 않은 오염 억제제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검은 화살은 그 유리병을 내 손에 꼭 쥐여 주었다.
“꼭 가지고 있어. 알겠지?”
이 한 병이면 수백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약속만은 꼭 지켜 달라는 그녀의 부탁 앞에 차마 사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유리병을 소중하게 챙겼다.
“응.”
“고마워.”
슬픔은 빠르게 날아갔다. 다시 평소처럼 환하게 웃은 검은 화살은 늘 그렇듯 내 품에 안겨 콧노래를 불렀다. 거친 바람 소리가 오늘따라 자장가처럼 옅고 낮게 들려왔다.
그렇게 밤이 지나 폭풍우는 물러갔다. 끝까지 버텨 준 어선 정어리는 새벽 내내 해류를 타고 서부로 항해했다. 우리가 다음날 도달한 곳은 지겨운 바다가 아닌 육지였다.
* * *
엘레나 공주와 엘프들이 마지막으로 빠져나왔다고 알려진 항구를 드디어 찾았다. 나와 검은 화살은 즉시 뱃머리를 돌려 육지와 멀지 않은 해안 절벽에 닻을 내렸다.
이곳에 선박을 숨기고 항구까지 헤엄칠 생각이다. 일주일 치 식량과 식수 그리고 비상용 약과 개인 무기를 챙긴 우리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첨벙!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며 빠르게 헤엄쳤다. 그러자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과 함께 짙은 해무가 가장 먼저 이방인 반겼다. 시야로 반쯤 반파된 항구가 들어왔다.
‘아무도 없어.’
마치 해달처럼 바다를 수영한 검은 화살이 수신호를 보내왔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서둘러 그 뒤를 따라잡았고 곳곳에 가라앉은 난파선과 항구 입구를 밟고 올라갔다.
후우우우우우웅.
짙게 낀 해무 탓인지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특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언데드는 모두 물러난 듯했다. 나는 검은 화살을 향해 말했다.
“오러를 둘러.”
“응.”
항구로 올라온 것만으로 피부가 저릿하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 위에 아직 오염이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서둘러 심장 속 세계수 파편을 일깨웠다.
후우.
심장에서부터 뻗어나간 세계수 기운이 몸과 정신을 보호한다. 끝으로 우드득 몸을 푼 나와 검은 화살은 짙은 해무를 가로질러 그대로 항구 도시를 향해 뛰어갔다.
탁, 탁, 탁, 탁!
현재 위치는 꽃의 항구라고 불리는 서부 최대 규모의 교역 항구다. 하지만 언데드 군단이 쓸고 지나간 지금은 오직 폐허가 된 건물과 검게 물든 토지만이 가득했다.
“방향은?”
“저쪽.”
가장 높은 지붕으로 올라와 지형과 방향을 살폈다. 최종 목적지는 맨드레이크가 자생한다고 알려진 장소인 옛 세계수 둥지였다. 지도상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밤낮없이 뛰어가면 사흘······.”
“이틀도 가능해.”
경로는 가장 가까운 직선거리다. 휴식 없이 달려간다면 이틀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은 작전은 시간이 곧 생명, 나는 꾸깃꾸깃한 지도를 품에 넣었다.
탁!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도시 폐허를 가로질러 진입로를 빠져나왔다. 짙게 낀 해무는 순식간에 자취를 지웠다.
* * *
엘레나는 항구를 마지막으로 빠져나오기 전 도시를 가득 채운 언데드 군단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을 먹고 자라는 놈들은 엘프를 제물로 몸집을 비대하게 키운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부는 불사왕의 본거지라고 보기에는 텅 비어 있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모든 언데드 전력이 연합군이 형성한 방어선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게 분명했다.
“불사왕은 서부에 있을까?”
“······없기를 바라야지.”
꽃의 항구에서 세계수 둥지로 향하는 길은 수도 엘렌디아노와 정반대 방향이다. 눈에 띄지 않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불사왕은 우리가 다녀갔는지도 모를 것이다.
“목 좀 축이자.”
그리 생각하니 조급함이 한결 가신다. 반나절 넘게 뛰기만 하던 나는 가방에서 수통과 건량을 꺼내 쪼그리고 앉았다. 많이 허기졌었는지 눅눅한 건량도 먹을 만했다.
검은 화살이 코를 킁 삼켰다.
“이 길로 쭉 가면 어릴 때 살던 곳이었는데.”
“정말?”
“응, 태어난 곳이었어. 추방당하기 전까지 어머니랑 같이 지냈으니까.”
우연히 지나친 이 근방이 설마 검은 화살이 태어난 고향일 줄 꿈에도 몰랐다. 상황이 괜찮았다면 한 번쯤은 들러봤을 텐데 주어진 시간이 겨우 건량 하나 분량뿐이다.
“꼭 돌아오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돼 버렸네. 쯧.”
돌아오고 싶었던 이유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었을까. 엘프인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이제 눅눅한 건량도 다 먹어 간다.
쫑긋!
“음?”
하지만 그 순간 검은 화살의 뾰족한 귀가 토끼처럼 쫑긋거렸다. 청력이 인간보다 뛰어난 그녀가 무언가를 감지한 것이다. 나는 즉각 검집 위로 오른손을 옮겼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언데드뿐인 이 서부에 무슨 발굽 소리란 말인가. 두 귀를 의심한 나와 검은 화살은 서둘러 길을 벗어나 양쪽 풀숲을 향해 몸을 숨겼다.
사박!
다각, 다각, 다각!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하다. 풀숲 사이로 바라본 그곳에는 사특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기수들이 있었다. 물론 정체불명 기수는 생명체라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따각, 딱.
해골 기수와 해골마다. 형체가 흉측했던 언데드가 이제는 변화를 거듭해 한 개체로 진화한 것이다. 놈들은 마치 무언가를 찾듯 빠른 속도로 길을 가로질렀다.
기수는 총 다섯 마리에 하나 같이 오러 기사와 비슷한 경지를 가지고 있다. 아마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생명체도 순식간에 감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수신호를 보냈다.
‘처리한다.’
기동과 수색이 능한 놈들이다. 여기서 반드시 처리하고 가야 뒤가 편했다. 내 신호를 받은 검은 화살은 순식간에 화살을 뽑은 다음 시위에 걸어 정조준 발사했다.
퓽!
콰직, 파사삭!
오러가 맺히는 데 0.1초가 걸리지 않았다. 허공을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두 놈 머리통을 꿰뚫고 들어갔다. 나는 해골 마가 쓰러지는 기점으로 풀숲을 뛰쳐나갔다.
그으으아!
끼기기기긱!
감정이 없는 해골 기수들은 순식간에 내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오러를 베는 검은 아무리 사특한 존재라도 막을 수 없었다. 해골 기수는 그대로 두 동강이 나 버렸다.
파스스슥!
순식간에 두 놈을 베어 죽였다. 나머지 한 놈은 상대가 되지 않겠다고 판단했는지 그대로 기수를 돌려 달아났다. 아마 여기서 벗어나 다른 언데드를 불러올 게 뻔했다.
“맡겨둬!”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뛰어난 궁사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경지가 높아져 가는 검은 화살은 가볍게 시위를 놓았다.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놈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그으으아아아!
기이한 비명과 함께 연기가 솟구친다. 존재가 자체가 파괴당한 해골 기수와 해골 마는 그대로 재가 되어 흩날렸다.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눈길을 끌었다.
“음?”
해골 기수가 죽고 남은 잿더미 위로 무언가 흩날린다. 그것은 사라지는 재와는 다르게 바람을 따라 팔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검을 뻗어 하얀색 천 조각을 들어 올렸다.
오래된 것이 아니다.
놈들은 무언가를 추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