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검은머리 기사왕 162화
각지에서 활약하는 은자를 통해 수많은 첩보가 전해져왔다. 대부분은 대륙으로 진출한 언데드의 진격 경로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려주는 촉박한 경각이었다.
한때 대륙을 호령하던 오크 종족조차 놈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륙 지도는 검은색으로 물들었으며 그 끝은 분명 북방과 동부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다. 모든 병력을 끌어모은 영주들은 스노우가든으로 집결했고 수도 상비군 또한 소집한 예비군과 재편되어 전원무장을 끝냈다.
물론 엘프라고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고향인 서부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재가를 받은 그들은 다시 한번 창과 활을 붙잡고 북방군과 함께 수도 앞으로 집결했다.
때와 맞춰 리처드가 이끄는 동부 왕국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화약 무기를 앞세운 동부군 군단은 어느새 수도와 소돔을 넘어 협곡 관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드디어 출정이다. 모든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도 앞에 집결한 북방군은 군례를 올렸다. 그러자 스노우가든 아래 뿌리를 내린 세계수가 드디어 침묵을 풀었다.
[오늘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세계수가 만개했다. 하늘 전체를 뒤엎은 커다란 나무는 온몸을 떨어 빛을 뿌렸다. 은하수 흐르는 별을 닮은 그 빛은 집결한 북방군에게 잊을 수 없는 축복을 내렸다.
선조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후손에게 영원불멸이 전해질 가치,
그것은 바로 시대를 초월한 염원이었다.
뿌우우우우우우 - - - -!!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우렁찬 뿔 나팔 소리와 함께 북방군은 출정했다. 수도 꼭대기에서 흩날리는 왕국 깃발만이 고요한 격동을 배웅하는 유일한 미련이었다.
* * *
“그나마 멀쩡한 선박입니다.”
오염을 염려한 북방군은 엘프들이 타고 온 이주 선단을 모조리 불태웠었다. 하지만 그 난리 통 속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박이 있었으니 바로 ‘정어리’라 불리는 어선이었다.
“무사히 건널 수 있겠는가?”
“보기와는 다르게 튼튼한 녀석입니다. 폭풍우만 조심하면 충분히 건널 수 있습니다.”
설계상 충분하다면 됐다. 이 어선을 몰 항해사는 다름이 아닌 내 동료 검은 화살이니 말이다. 오랜 시간 바다를 유랑해 온 그녀라면 어선쯤이야 가뿐하게 몰 것이다.
“명심하겠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두툼한 은화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러자 선박 주인인 중년 엘프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제 이 선박은 온전한 왕실 소유였다.
하나, 둘, 셋! 으차!
식수는 이쪽으로!
현지에서 고용한 일꾼들이 열심히 물자를 실어날랐다. 어선 적재함은 어느새 보급품으로 가득 찼고 소모품인 선박 부품 또한 새로 만든 신품으로 교체가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와 검은 화살은 물품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하며 출항 준비를 서둘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오후가 되었다.
터벅, 터벅, 터벅.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가벼운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나와 검은 화살은 항구를 지나 선박 위로 올라탔다. 그러자 갑판 위에 익숙한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관문으로 간 줄 알았는데.”
“······저라도 배웅해야죠.”
언제 왔는지 모를 재상은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우리와 따뜻한 손을 맞잡았다. 커다란 그녀의 눈동자에는 짙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 두 분만 가시는 건가요?”
“둘이면 충분하다.”
불사왕이 지배하는 서부는 오염의 근원지이다. 세계수 파편이 있는 나와 오러 경지가 높은 검은 화살이 아니라면 발을 딛는 것만으로 살이 썩고 미쳐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북방 기사단을 이끌고 가기에는 시선이 끌릴 우려가 있었다. 오직 은밀한 기동이 가능한 소수만이 맨드레이크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다. 재상은 무언가를 간절하게 말하려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이내 양팔을 앞으로 뻗어 우리를 꼭 끌어안았다.
“매번 해온 배웅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이 들까요. 나도 참 주책이지······.”
배웅하는 이가 있기에 돌아올 고향도 있는 법이다. 주황색 황혼이 깃드는 갑판 위, 우리는 언제는 그렇듯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마침 저 멀리 질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가세요.”
재상은 우리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를 끝으로 항구로 내려갔다. 이제 바다 위에 남은 것은 힘차게 돛을 편 선박과 넓은 흐름을 항해하는 운명뿐이었다.
* * *
검성은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동부왕 리처드를 추대했다. 전쟁 경험, 용맹함, 지도력, 그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리처드는 수많은 연합 군단을 이끌기 충분한 재목이었다.
물론 연합군 또한 이에 동의했으며 군단과 부대 구분 없이 모든 총지휘권을 리처드를 왕에게 이양했다. 하나 된 뜻, 하나 된 군대, 통합된 연합군은 깃발을 높이 들었다.
‘항복 아니면 죽음.’
그 막강한 군단 앞에 그린스킨 놈들이 상대될 리가 없었다. 협상은 받지 않겠다는 리처드의 강경책은 제대로 먹혀들었고 놈들은 채 사흘을 버티지 못한 채 항복했다.
물론 약속한 대로 항복한 그린스킨은 즉각 무장을 해제한 뒤 포로로 잡아들였다. 드넓은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힘 좋은 놈들을 노역에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진격 그리고 또 진격이 이어졌다. 뛰어난 지휘관이 리처드 왕은 연합군을 훌륭하게 이끌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드넓은 그린스킨 영토를 영향력 아래 두게 되었다.
‘이제 시작이다.’
하지만 리처드 왕은 승리를 자축하지 않았다. 이번 전쟁은 그린스킨 영토를 확보한 이 순간이 진정한 시작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즉각 진군을 멈추었다.
‘방어선을 구축하라.’
연합군은 구릉 지형을 기반으로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길이 통하는 모든 곳에 보급 기지와 연락망을 설치해 유기적으로 짜인 방어선을 설계해 나갔다.
간단했다. 수성 경험이 많은 리처드는 이곳 전체를 커다란 요새로 만들 생각이었다. 수많은 병력과 포로들이 동원되자 연합군 방어선은 서서히 모습을 갖춰갔다.
하지만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웃이 있었으니 바로 언데드 군단과 격돌하고 있는 마지막 남은 오크 황금 도끼였다. 군대를 이끈 놈들은 곧바로 연합군과 대치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양측 군대가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왔다. 선두를 지휘하던 리처드 왕과 황금 도끼 수장 타카르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중앙으로 달려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이 동부왕인가?”
“그렇다.”
타카르는 목 아래가 검은색으로 물든 상태였다. 아마 언데드와 전쟁 중 어딘가를 물어뜯긴 모양인데,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보아 이미 오염 침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도자가 이런 마당에 그 휘하 병사라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오크가 자랑하는 군단은 어디 가고 겨우 구색만 갖춘 오합지졸 부대가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용건만을 말하라.”
황금 도끼는 철저하게 패주 중이었다. 설상가상 진군한 인간 놈들로 인해 동쪽 퇴로까지 막혀 버리고 말았으니 사실상 오크 종족은 여기서 끝이라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인간들이 진군을 멈춘 채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부왕은 분명 언데드 군단과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동맹을 제안하고 싶다.”
서로 원수지간인 엘프와도 동맹을 맺은 인간이다. 아직 전력이 남은 오크라고 같은 길을 걷지 말란 법은 없었다. 타카르는 동맹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거절한다.”
그러나 리처드는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 도리어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당장에라도 공격을 명령할 것만 같았다. 당황한 타카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도대체 왜······.”
“애초에 인간 외 동맹은 없다.”
인간 외 동맹은 없다. 그것은 강철 동맹을 굳건하게 지켜본 동부의 자긍심이었다. 리처드는 곧바로 검을 뽑아 들어 수장 타카르와 황금 도끼 오크들을 향해 겨누었다.
“두 가지 선택권을 주겠다!”
쿵! 쿵! 쿵! 쿵! 쿵!
오러가 실린 목소리가 퍼져나간다. 연합군은 기다렸다는 듯 발을 굴렀고 세상은 거칠게 요동쳤다. 격동의 시대가 지난 지금 대륙 운명을 결정할 이는 인간뿐이었다.
“항복하거나!”
타카르는 뒤늦게 깨달았다. 인간과 연합을 이루는 엘프는 고개를 숙인 대가로 종족의 보존을 약속받았다는 것을 말이다. 동부왕 리처드는 오크를 향해 최후통첩했다.
“혹은 죽거나.”
타협은 없다. 따르지 않으면 멸종한다. 깃발을 펄럭이는 수많은 연합군 앞에 오크들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수장 타카르는 결국 이 자리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항복하겠다.”
여태 함께 싸워 온 오크 장군들이 고개를 숙인다. 치욕을 느낄지언정 반박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최선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타카르는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었다.
“내 형제들은 어떻게 되지?”
“하나 된 연합으로서 싸울 것이다.”
“······명예로운 최후겠군.”
타카르는 투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리처드와 연합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조아린 무거운 머리는 분명 오크 종족을 굴복한 북방과 동부를 향하고 있었다.
“지난 전쟁을 사과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선조를 대신해 머리를 조아린다. 오크는 강자 앞에 굴복했고 이는 인간이 승리하는 이상 영원히 변함없으리라.”
지난 과거 오크는 강했기에 이겼고 인간은 약했기에 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오크는 약했기에 졌고 인간은 강해졌기에 승리한 것이다. 변명은 이와 같았다.
털썩!
힘이 지배하는 오크를 힘으로 제압했다. 지도자 타카르가 무릎을 꿇자 장군을 포함한 모든 오크가 엎드렸다. 리처드 왕은 잠이 든 기사왕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타카르가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내 형제들을 부탁한다.”
“······알겠다.”
푸욱!
타카르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한 치 망설임 없이 자기 목을 찌르며 자결했다. 솟구치는 피와 함께 오크 최후의 지도자는 힘없이 쓰러졌다. 리처드는 재차 외쳤다.
“무기를 버려라!”
챙! 쨍그랑! 털썩!
오크들은 기다렸다는 듯 무기를 버렸다. 그리고 대치하고 있던 국경선을 넘어 연합군을 향해 걸어갔다. 넘실거리는 초록 물결은 어느덧 그 색이 희미해져 갔다.
증오도 분노도 이 땅 아래 잠시 내려놓는다. 수천 년간 인간을 괴롭혀오던 두 종족은 드디어 깃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이제 남은 것은 대륙을 위협하는 악의뿐이었다.
리처드는 홀로 남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모든 과정이 드디어 마지막을 앞두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리처드는 어머니 북방을 향해 기도했다.
‘이들을 지켜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