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검은머리 기사왕 161화
황금 도끼를 이끄는 오크 영웅 타카르는 오늘 기분이 아주 좋았다. 왜냐하면, 평소 눈엣가시보다 못한 부족의 노래 연합이 때 아닌 휴전 제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그 오만한 콧대가 꺾인 걸까. 알 수 없는 변고를 읽은 타카르는 즉각 사절단을 베어 죽이고 운용할 수 있는 모든 군단을 이끌었다.
‘돌격하라!’
예상대로 전선은 무방비했다. 순식간에 전방을 돌파한 황금 도끼 군단은 부족을 보이는 족족 학살하며 기세를 드높였다.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서쪽 대수림이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한 군단이 마주한 것은 풍요로운 평원이 아닌 수많은 언데드가 넘실거리는 오염된 땅이었다. 군단장 타카르는 허망한 얼굴과 함께 읊조렸다.
“이, 이게 무슨······.”
숙적이나 마찬가지인 부족의 노래는 언데드 무리 앞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들이 무능하고 나약해서가 아닌 죽음을 먹는 자들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물리는 것으로 살점이 떨어지게 하는 구울, 거대한 몸집으로 대지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살점 괴인. 오크 땅은 이미 죽음이라는 검은 오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엘프들이 사는 대수림은 어떻게 된 것이며 저 언데드 군단은 어디에서 나온 존재란 말인가. 타카르는 마주한 심연 앞에 동요하고 있었다.
“도망자를 잡아 왔습니다!”
거기서 운 좋게 살아남아 도망치던 오크들은 그대로 포로가 되었다. 황금 도끼 전사들은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부족노래 일원 하나를 포박해 타카르 앞으로 데려왔다.
“살,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네놈이 본 것을 말하라!”
도망친 오크 대부분은 산채로 피부가 썩고 있었다. 그것이 오염의 전조라는 걸 알 리가 없는 타카르는 부족원을 재촉했다. 그러자 놈은 비명과 같은 단말마를 내뱉었다.
컥, 커억!
검은색 피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타카르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고 일부 전사들은 그 더러운 핏물에 범벅이 되었다. 포로는 각혈을 끝으로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숨이 끊겼다. 오염된 살점은 급속도로 썩어들어 갔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파리와 구더기들이 쏟아져 내린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독기! 모든 게 사특함을 암시했다.
꿀꺽.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킨다. 검은색 핏물이 몸에 묻은 오크들은 기겁하며 갑옷을 벗었고 타카르 또한 급히 코를 막으며 후방으로 퇴각하려 했다.
끼이이이익! 끼기긱!!
끄라락! 끼아아아아악!!
하지만 그 순간 오크 부족을 학살하던 언데드 군단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놈들의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언덕 뒤에 주둔하고 있는 황금 도끼 군단이 있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익 - - - -!!
순식간에 표적이 바뀌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증오하는 언데드 군단은 밀려오는 썰물처럼 초록 대지를 휩쓸었다. 오늘따라 까마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 *
뚝.
눈이 저절로 뜨였다. 고개를 돌리자 물수건 끝에서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자각한 나는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켜 전체적인 몸 상태를 점검했다.
후우.
지독한 열병을 앓았던 모양이다. 나는 아직 남아있는 미열을 한숨 한 번으로 가볍게 몰아냈다. 그리고 발아래서 느껴지는 무게와 따뜻한 체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으음······.”
검은 화살이 발아래 잠들어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신을 잃은 나를 밤새 간호한 모양이다. 나는 덮고 이불로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탁.
검은 화살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반쯤 열려 있는 문을 지나쳤다. 조용한 왕궁 중앙 복도를 걷기 시작하자 마침 창밖에선 보슬보슬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토독, 톡.
‘스승님!’
모두가 잠이 든 새벽이다. 오직 비 오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왕궁에서 나는 깃들어있는 추억을 음미했다. 여기, 이곳, 또 저곳, 떨어트린 찻잎처럼 기억이 우러나왔다.
끼이익.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그 끝은 어느새 전우가 잠이 든 연무장이었다. 나는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가 어느새 이름이 더 많아진 벽과 세계수를 마주할 수 있었다.
팔랑, 팔랑.
세계수가 소심하게 잎을 흔들었다. 그것이 미안하다는 뜻이란 건 눈치챈 나는 복잡한 감정을 마저 추스르게 되었다. 지난 깊은 잠은 생각을 정리하게 도와준 것이다.
털썩.
나는 늘 그렇듯 벽 앞에 앉았다. 매번 이 자리에서 울기도, 웃기도, 미래를 점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벽 앞에 앉는 것은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깊은 잠을 자 보았다.”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영면이 무엇이기에 눈투성이를 저 깊은 곳으로 끌고 갔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한번 헤어나올 수 없는 잠에 빠져 꿈이라는 바다를 유영해 보았다.
“그제야 녀석이 이해되었어.”
그곳에는 아무런 아픔이 없었다. 이별했던 인연도 겪어야 하는 망각도 모두 꽃밭 위에 누워 영원했다. 그래, 꿈을 좇은 눈투성이는 분명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눈물이 나더구나.”
하지만 나는 눈물 없는 낙원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 모든 것이 갈피 없는 백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끄러움이라는 열병이 날 잠에서 깨게 했다.
돌고 돌아 결국 이곳으로 왔다. 갈림길은 옳고 그른 것이 아닌 모두 이 길로 향하는 운명의 종착지였다. 그 순간 내 감정을 읽은 세계수가 파르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세상을 적셨다. 보슬보슬 내리는 빗줄기가 얼굴을 적셨다.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모든 것을 관장하는 어머니 북방이 빗물로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두 번째 물음이었다. 왜 나를 데려왔냐고 물었던 첫 번째 물음처럼 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설산이 그랬듯 밤하늘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존재하되 답하지 않는다.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뚜렷한 형상이 아닌 오로지 자취처럼 남는 무형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답을 찾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툭.
순전한 우연이었다. 내가 오늘 세계수를 찾아온 것도, 고개를 내려 두 손을 마주한 것도 말이다. 흉터와 굳은살이 가득한 양손은 내게 끝까지 검을 잡으라 말하고 있었다.
선왕을 만나 꿈을 꾸었다. 눈투성이를 만나 꿈을 이뤘다. 그리고 두 번째 물음을 내뱉은 이 순간 나는 북방인 부러지는 검으로서 부러지지 않는 검을 쥐어야 했다.
한낱 필멸자가 꾼 꿈이 불멸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관철이 있겠는가. 이제 증명할 차례다. 내가 무슨 길을 걸어왔고 또 앞으로 무엇을 증명할지를 말이다.
후웅!
그날 밤 나는 검무를 추었다. 검이 없는 휘두름은 상념을 떨쳐내었고 무가 없는 춤사위는 기어코 글자를 새겼다. 심장 위에 새긴 무명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었다.
* * *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왕실은 한차례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분위기를 잠재우고 건재함을 보여 주고자 기사단 일정인 새벽 훈련을 정상적으로 소화했다.
소문은 금세 퍼졌다. 북방 기사단은 언제 동요했냐는 듯 빠른 안정을 되찾았으며 지방 영주들과 관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업무에 집중했다.
물론 왕국을 안정시키는 사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기록을 읽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상대로 북방과 동부는 불사왕을 향한 선제공격과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재상과 검은 화살이 연신 휴식을 권유했지만, 나는 전부 뿌리치고 국무회의를 개최했다. 모든 관료와 영주가 또 한 번 수도 왕궁으로 모여 앉았다.
당연히 왕좌는 비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낮은 자리에 의자를 두고 앉아 왕실이 건재함을 알렸다. 사방에서 진심 어린 덕담과 함께 선물이 줄을 이었다.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됩니다.”
“고맙소, 영주.”
“귀한 약재를 진상하고 싶습니다.”
“왕실을 위해 잘 쓰겠소.”
왕의 부재로 흔들렸던 중심이 다시 한번 바로 잡혔다. 나는 영주들과 일일이 눈도장을 찍으며 영향력을 공고히 했고 드디어 이른 시간 예정된 국무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경들이 준비한 모든 과정은 재상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최종 안건을 보고 받겠다.”
기사왕이 쓰러지고 불사왕이 대륙 침공을 시작한 이상 전쟁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내가 일일이 호명할 것도 없이 모든 자료를 준비한 재상이 앞으로 나섰다.
“수도 상비군을 주축으로 군단을 편성했습니다. 각 지역 영지군과 예비군을 전부 재편하면 총 3군단까지 운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엘프들도 참전 의사를 밝혔습니다.”
지난 종족 전쟁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커진 규모다. 거기다 뛰어난 궁수 병력인 엘프까지 참전 의사를 밝혔다고 하니 북방 역사상 최대 규모라고 봐도 무방했다.
“검성 각하.”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미 나와 같은 상석에 앉아있던 왕비 헬레나는 웃음과 함께 양해를 구했다. 목소리를 작게 가다듬은 그녀는 리처드 왕의 뜻을 전했다.
“수도 상비군을 포함해 예비군을 따로 편성했습니다. 예상하기로 9군단까지 존재하며 화약 무기도 충분히 운용할 수 있습니다.”
전투력 면에서는 북방보다 부족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숫자와 기술만큼은 우리를 아득하니 뛰어넘는 규모였다. 든든한 동맹군 앞에 회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준비는 끝이 났다. 목표가 세워졌으니 이제 점 사이 선만 그으면 출진할 수 있다. 덩달아 얼굴이 상기된 재상 기억하는 새는 계속해서 작전 개요를 읊어 가기 시작했다.
“곧장 서부로 진격할 경로를 예상해 봤습니다. 최우선 목적은 맨드레이크를······.”
“아니 우리는 진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위에 얼음보다 차가운 부정을 끼얹었다. 국무회의를 연 목적은 처음부터 정해진 흐름이 이어가려는 것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기 위해서였다.
“언데드 군단과 전면전은 필패한다. 승산이 없는 전투로 병사들을 내몰 수는 없어.”
“검성? 혹시······.”
나는 재상과 검은 화살 그리고 한자리에 모인 모든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 홀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모든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중앙 대륙으로 진출한 연합군은 그린스킨을 토벌하고 지역을 확보한다. 최우선 목표는 진군이 아닌 방어선 구축이다.”
불사왕의 칼끝은 북방을 향하고 있다. 중앙 대륙이 정리되는 즉시 놈은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진격해올 것이다. 모든 전력이 방어선을 집중되는 그때가 기회였다.
“정해진 장소, 정해진 시간에 싸울 기회다. 연합군은 방어선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불사왕과 언데드 군단의 시선을 붙잡는다.”
결전 장소는 정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인류를 이끌 지도자 기사왕 눈투성이를 일으키는 것뿐이다. 나는 수리 깃털이 달린 검집을 꾹 움켜쥐며 결의를 외쳤다.
“그사이 내가 바다를 건너.”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드레이크를 가지고 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