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검은머리 기사왕 160화
“오늘 이곳에서 본 일은 함구하라.”
“······명심하겠습니다, 경.”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고민 끝에 결국 접견을 허락한 나는 마르실 사제와 공주 엘레나를 왕실까지 안내했다. 그리고 약조를 받아낸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끼익, 덜컹.
열린 창밖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강한 활력이 요동치는 방 한가운데에는 눈투성이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마르실 사제와 엘레나 공주는 서둘러 예를 표했다.
“기사왕 폐하.”
세계수가 선택한 북방의 수호자이자 불사왕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기사왕이다. 마르실과 엘레나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소문은 거짓이었군요.”
“언데드 오염이 아닙니다.”
불사왕이 부린 권능 앞에 굴복한 것이라면 살점이 썩고 고름이 흘러야 한다. 하지만 침대 위에 잠이 든 기사왕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진찰할 수 있겠는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르실 사제의 표정이 나쁘지 않다. 오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순간 자신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떠올린 것이다. 두 엘프는 가지고 온 상자에서 향로와 약재를 꺼냈다.
“그게 뭐지?”
“말린 초록 연꽃입니다. 저희 사제들 사이에서는 꿈을 좇는 꽃이라고 불리죠. 이것을 정제한 향로에 넣고 피우면······.”
들어 본 적 있는 식물이다. 북방과 마찬가지로 서부에서도 취급하는 약재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 쓰임이 우리와는 다른지 마르실 사제는 말린 잎을 향로 속에 넣었다.
“한 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아름다운 금색 향로에서 연기가 폴폴 새어 나왔다. 방 안에는 금세 기분 좋은 향기가 맴돌았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마르실은 작은 성호를 그으며 눈을 감았다.
“이건······.”
사제 말대로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무분별하게 떠다니던 연기가 유독 눈투성이를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향초는 이름이 가진 그대로 떠다니는 꿈을 좇고 있었다.
달칵.
두 엘프가 확신한 대로 본격적인 진찰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서둘러 향로를 끈 마르실 사제는 자세를 바로 한 채 알고 있는 모든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서부 엘프가 신실하던 과거에는 지고한 존재인 하이 엘프가 있었습니다. 신과 가장 가까웠던 만큼 신격을 받아들여 미래를 점치는 역할을 해 왔지요.”
이름 모를 신들이 이 세상에 관여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까마득한 과거였기에 전설로만 취급되던 이야기였지만,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제들은 모두 기록하고 있었다.
“다만 신격을 받아들인다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자칫 그 영역을 넘으면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지고 마니까요. 수많은 하이 엘프가 그러했습니다.”
오직 지고한 존재만이 엿볼 수 있는 신의 영역이다. 불멸왕조차 포기했던 그 지고함을 한낱 필멸자가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눈투성이는······.
“기사왕 폐하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큰 신격을 받아들이셨고 현재는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 계십니다.”
“어머니 북방이 허락하실 리 없다!”
눈투성이는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 한들 어머니 북방이 무리한 신격을 내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르실은 그 반대의 경우를 말했다.
“신격을 부르는 힘은 오직 간절함뿐입니다. 기사왕 폐하가 간절히 원하셨기에 어머니 또한 이에 응답하신 겁니다, 경.”
눈투성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불사왕과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어머니 북방과 신격을 담아 줄 자신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단순한 강림이 아닌 그릇을 깨트리는 무리한 강신을 선택했고 결국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동안 외쳤던 승리가 무색하다. 제자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고 삼킨 음식, 물, 공기 모든 것이 그저 원망스러웠다.
“······제발 방법이 있다고 말해다오.”
진찰한 병을 알고 있다면 그 병을 고칠 방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희망을 놓지 않은 내가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자 마르실 사제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맨드레이크라는 약재가 필요합니다.”
“약재 하나면 충분한가? 기사들에게 당장 구해오라고 명하겠다. 그러니 어서······!”
“경.”
하지만 그 순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엘레나 공주가 나를 불렀다. 얼굴이 하얗게 물든 그녀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 둘은 어느새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서부에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털썩, 쨍그랑!
“경!!”
힘이 풀렸다. 순간 정신이 흐릿해진 나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함께 쓰러진 유리 조각 사이로 아우성치는 급한 외침과 짙은 이명이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내 잘못이다. 녀석이 나서기 전 불사왕과 대적해야 했다. 그깟 죽음이 뭐라고 한차례 망설였을까. 굳건하게 버텨 오던 내 심장이 한순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차라리 창으로 찌르고 검으로 베어 갔으면 했다. 죽음보다 더한 아픔이 여태 이겨낸 모든 운명을 후회하게 했다. 한 줄기 의지가 탁 소리와 함께 끊어지고 말았다.
삐이이이이이이 - - - - -.
이명이 더욱더 짙어진다. 이겨냈다고 생각한 피곤과 고통이 온몸을 짓누르고 정신을 갉아먹었다.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긴다. 그것은 무의식이라는 깊은 심연이었다.
덜컹!
“- - - - - - - - -!!”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재상과 검은 화살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다급히 내 몸을 흔들며 외치고 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힘이 드는구나.’
세상이 아우성친다. 무력함이 잠식해온다. 다시는 쓰러지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약조를 뒤로하고 핏물 아래 몸을 담갔다. 후회, 고통, 원망, 뒤로하고 또 뒤로한 채로······.
* * *
검성이 쓰러진 이상 더 이상 진실은 숨길 수 없었다. 왕의 권한을 인계받은 재상 기억하는 새는 즉각 모든 관료와 각 지방 영주를 수도 스노우가든으로 소집했다.
그리고 기사왕이 깊은 잠에 빠졌다는 사실과 부러지는 검이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공식적으로 전했다. 순간 왕실 그레이트 홀은 혼란과 시끄러운 고성으로 휩싸였다.
‘그게 사실입니까!’
‘얼, 얼굴이라도 뵙게 해주십시오!’
그 누구도 아닌 무려 기사왕과 검성 부러지는 검이다. 북방 왕국의 주인과 기둥이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은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쉬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기사왕이 없으면 그 후계는 어찌하는가. 어찌 대신들은 이를 숨기고 은폐만 해왔는가. 불사왕이 북방을 넘보고 있는 와중에 들려온 소식은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재상은 처음으로 국정운영이 힘겨웠다. 왕국이 규모가 커진 만큼 홀몸으로 수습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방의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동부 왕국의 사절단.’
검성이 기사왕과 일행들만큼 믿는 자가 있다면 바로 리처드와 그의 왕비 헬레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밀서를 받은 동부 왕국은 사절단을 이끌고 북방으로 온 것이다.
뿌우우우우우 - - - -!!
사절단은 역대 가장 큰 규모였다. 동행한 수행원만 해도 수천 명이 넘었고 선물로 가지고 온 재화와 재물만으로 도시 하나를 살 정도이니 일일이 말해봐야 입이 아팠다.
거기다 사절단을 이끄는 자는 다름이 아닌 동부왕 리처드의 왕비 헬레나였다. 직접 백색 관문으로 행차한 그녀는 동부 사절단과 함께 어김없이 경의를 표했다.
‘기사왕 폐하를 뵙습니다.’
모든 것은 정치적인 행보였다. 동부왕 리처드는 한창 흔들리고 있는 북방 왕실에 막강한 힘을 더해주고 강철 동맹이 굳건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헬레나를 보냈다.
물론 동부 왕국은 또 다른 희망을 심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북방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륙 역사상 처음으로 ‘흑색 화약’이라는 무기를 선보인 것이다.
쾅 - - - - - - - -!!!
오크 연금술사들이 개발한 흑색 화약 제조법을 그대로 카피했다. 그리고 동부 장인들은 검성이 몰래 전해준 방법을 따라 가장 초기 형태인 사석포를 완성할 수 있었다.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내구성은 빈약했다. 하지만 ‘검성의 지혜’라는 이름이 붙은 1호 사석포는 거대한 굉음을 내뿜으며 표적인 석제 건물을 모조리 박살 내놓았다.
그 모습은 가히 천둥과 벼락같았다. 신의 형벌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무력시위 앞에 북방인들과 엘프들은 언데드 무리를 이길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검성이 쓰러진 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야 모든 업무를 끝낸 재상 기억하는 새는 왕비 헬레나와 소박한 찻물을 우려 마시며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왕비 전하.”
“폐하께서 해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디 마음 쓰지 마세요.”
아마 이번 사절단이 쓴 자금만 해도 북방 반년 예산과 맞먹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돈을 망설임 없이 쾌척한 왕비 헬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찻물을 마셨다.
“소식은 들었어요.”
기사왕과 검성이 쓰러졌다는 소식은 리처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북방을 돕기 위해 대신 달려온 헬레나는 얼굴이 수척해진 재상의 손을 꼭 움켜잡아주었다.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눈투성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서부에서만 자라는 신비한 약재가 맨드레이크가 꼭 필요했다. 하지만 그 땅은 이미 불사왕이 다스리는 언데드로 인해 오염된 지 오래였다.
엘프 왕국조차 멸망해버린 서부 땅에서 무슨 수로 약재를 구해온단 말인가. 아무리 대체재를 찾아보려고 해도 맨드레이크가 지닌 약효를 따라오는 식물은 없었다.
흑.
거기다 모두가 의지하고 있던 검성이 저렇게 쓰러져버린 마당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재상 기억하는 새는 결국 작은 울음을 터트리며 얼굴을 묻었다.
“괜찮아요, 편히 우세요.”
검성이 쓰러졌던 열흘 동안 넋을 놓은 송장처럼 지내왔던 재상이다. 그런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낀 헬레나는 한쪽 어깨를 빌려주며 정성 어린 위로를 건네주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
잠시 뒤 재상은 눈물을 그쳤다. 그리고 이내 퉁퉁 부은 눈가를 닦으며 부끄러움이 섞인 고개를 숙였다. 이제 본론을 꺼낼 차례인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부디.”
헬레나는 찻물을 비웠다. 그리고 사절단이 공개하지 않았던 서신을 언급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북방으로 전하는 서신 내용은 오직 왕비 헬레나만이 알고 있었다.
“오크와 교류하는 상인을 통해 침공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불사왕은 현재 분열한 오크 제국과 전면전을 시작한 상태에요.”
“그 말씀은······.”
“만약 싸워야 한다면 지금 이 계절이 유일한 기회에요. 리처드 폐하께선 북방 왕국의 중요한 결단을 기다리고 있어요.”
간단하다. 어차피 불사왕은 대륙의 적, 전쟁을 벌여야 한다면 모든 종족을 설득해 서부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기사왕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만약 검성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리처드 왕이 세운 결의 앞에 재상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찻물은 식고 심장은 뜨거워졌다. 그런 계절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