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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59화 (159/181)

< 159화 >

검은머리 기사왕 159화

새벽 내내 이어졌던 전쟁이 끝이 났다. 급히 사상자를 수습한 북방군은 가장 먼저 오염 물질이 남아 있는 해안가를 봉쇄하고 엘프들이 타고 온 선박을 모조리 불태웠다.

그리고 의심되는 공용 물자는 전부 폐기했으며 꼭 가지고 들어가야 할 개인 물품은 세계수 파편을 지닌 내가 검사했다. 여기서 찾아낸 오염 물질만 해도 수십 개였다.

공주 엘레나가 말하길 오염은 전염병과도 같아 한번 진행되면 절대 돌이킬 수가 없다고 했다. 오직 철저한 예방과 준비만이 불사왕의 진출을 저지할 방법이었다.

‘효과가 있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동안 세계수를 연구해오던 재상이 오염 억제가 가능한 약재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아마 불사왕과 세계수가 서로 상극이란 것을 이용한 모양이다.

나무 녀석이 북방 땅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상 오염을 정화할 방법도 언젠가는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상자를 수도 스노우가든으로 후송시켰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모처럼 예정되어 있던 공식 행사는 전부 취소되었고 북방과 엘프는 협상을 이행하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건강을 되찾은 엘프 주민들은 마을 단위로 흩어져 거주지역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공주 엘레나와 귀족들 또한 공식적인 망명자 신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걱정과는 달리 엘프들은 얌전했다. 지난 상황이 너무 급하기도 했고 눈투성이가 내뿜은 광휘가 워낙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원래 극적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이었다.

최근 세계수가 어머니 북방의 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되었다. 엘프들도 초심을 되찾고 있다고 하니 융화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엘프가 북방에 정착하고 우리가 그것을 수용할지를 말이다. 비록 지난 앙금이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었지만, 이 또한 금방 익숙해질 것이다.

‘불사왕과 언데드 군단.’

그리고 종족 전쟁 뒤이어 또 한 가지 운명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동안 간접적 경계만을 해 왔던 불멸왕이 이제는 대륙 전체를 위협할 불사왕으로 드러나고 만 것이다.

엘프 왕국이 망하고 북방 해안이 침공당한 이상 더 이상 남 일이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전후처리를 하는 틈틈이 북방 전역과 동부를 향해 서신을 보냈다.

그나마 바다와 거리라는 방파제가 있어 당장 위협은 막을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혼이 드리운 마지막 삶에서 불사왕은 반드시 소멸시키고 가야 할 숙적이었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싸우다 보면 반드시 이겨낼 방법이 생길 것이다. 나는 서신과 함께 떠나는 전서구를 바라보며 어머니 북방을 위해 작은 기도를 올렸다.

큼직한 일을 전부 해결하고 나니 해안가 상황 또한 금방 정리가 되었다. 곧바로 떠날 채비를 끝낸 북방군은 요새를 뒤로한 채 북방 수도 스노우가든으로 복귀했다.

눈투성이는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       *       *

엘프 왕국이 멸망하고 북방이 시끄러운 한때 제국이 분열된 중앙 대륙은 한참 통일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지난 5년간 벌어진 분열이 드디어 세력 구도를 만든 것이다.

가장 첫 번째 세력은 분열한 오크 제국을 다시 세우기 위해 뭉친 영웅들과 군벌들의 연합 ‘황금 도끼’였다. 제국 중추가 모인 집합인 만큼 군사력이 가장 막강했다.

그리고 두 번째 세력은 그간 핍박받던 부족들이 모여 만든 ‘부족의 노래’다. 대족장이 공평한 자치권을 지닌 연합은 황금 도끼와 대립하는 가장 큰 세력이었다.

또한, 세 번째로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야인 ‘녹색 피부’가 있었다. 그들은 태초 오크가 그랬듯 야만으로 돌아가려는 무분별한 집합체라고 봐도 좋았다.

이렇듯 3가지 세력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던 오크들은 또 한 번 3가지 세력이 뭉쳐 통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반복은 오늘이라고 다른 것은 아니었다.

도끼를 든 한 오크가 외쳤다.

“자 다들 일하자고.”

“니미럴! 또 벌목이야?”

부족 연합 ‘부족의 노래’는 이전 3황자가 세웠던 도시를 거점으로 삼고 있다. 비록 땅이 비옥하지는 않지만, 산림 자원과 철광산이 무척이나 풍부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 2년 전부터 교류를 끊은 엘프들 덕분에 후방이자 국경선인 대수림은 온전히 오크 몫이 되고 말았다. 열심히 대수림 나무를 벌목하던 한 오크가 말했다.

“그나저나 귀쟁이 새끼들은 다 어디 간 거야? 어디 소문이라도 들은 거 없어?”

“몰라, 시발! 마음 같아서는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우리도 먹고살지.”

황제가 죽고 난 뒤로 엘프와 맺었던 조약은 흐지부지 돼 버렸다. 덕분에 오크들은 서부에 무슨 일이 있는지, 또 어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다고 저 넓은 대수림을 직접 건너갈 수도 없지 않은가. 부족의 노래 연합은 그저 야금야금 대수림을 침범하며 엘프 놈들이 영원히 나오지를 않기만을 빌었다.

“서둘러 마무리나 하자고.”

딱! 딱! 딱!

넘어간다! 조심해!

대수림에서 나오는 풍부한 자원은 연합을 지탱하는 큰 원동력이었다. 오늘도 파견도니 벌목 부족원들은 대수림 일부를 파괴하며 산림 자원을 두둑하게 챙겨갔다.

오늘도 할당량을 채웠으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크 부족원들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상황에 한숨을 쉬며 가지고 온 도끼와 개인 가방을 챙겨 들었다.

슬슬 해가 지고 있다. 지금 부지런히 걸어가야 저녁 시간에 맞춰 부족에 복귀할 것이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오크들은 열을 맞춰 하나둘 대수림을 건너갔다.

부스럭, 부스럭.

“음?”

하지만 그 순간 열심히 귀쟁이 엘프를 욕하던 오크 벌목꾼이 자리에 멈춰 섰다. 한참 주황빛 황혼이 사라지는 수풀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산토끼인가? 젠장, 토끼라면 그냥 보낼 수 없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내와 배고픈 자식들을 생각한 오크 벌목꾼은 조심스럽게 열에서 벗어나 도끼를 뽑아 들었다.

“이봐, 어디가!”

“먼저들 가라!”

해가 지고 있다. 어둠 속에 살며시 자세를 낮춘 오크 벌목꾼은 수풀을 파헤치고 들어갔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한 검은색 토끼가 무언가를 으적으적 씹고 있었다.

고놈 참 맛있게도 생겼다. 도끼를 높게 들어 올린 오크 벌목꾼은 단숨에 녀석을 반 토막을 내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토끼는 그 모든 행동을 멈추게 했다.

까드득, 까드득.

검은색 토끼는 살점을 씹고 있었다. 그 살점은 같은 동족인 토끼였다. 텅 빈 눈동자,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구더기. 검은색 토끼는 다름 아닌 언데드 숙주였다.

“으, 으아아악!”

생명체라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비명을 지른 오크 벌목꾼은 일행들이 걸어간 길을 향해 그대로 달아났다. 주변 대수림은 어느덧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허억, 허억!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길이 맞는데 먼저 간 일행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비틀비틀 뛰어가던 오크 벌목꾼은 발에 무언가가 걸려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털썩!

걸려 넘어진 장애물은 분명 물컹한 물체였다. 손을 뻗자 새빨간 피 웅덩이와 함께 죽어버린 일행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부 하나같이 머리와 척추가 뽑혀 있었다.

끼기기긱.

이상한 소리를 들은 벌목꾼 오크는 얼떨결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을 대롱대롱 들고 있는 기괴한 언데드와 눈을 마주쳤다. 차마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서걱!

까드드득!

마지막 오크가 목이 뽑힌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전부 몰살시킨 언데드는 기쁘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어둠으로 물든 대수림에서 언데드 무리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나무와 풀이 시들기 시작했다. 놈들이 가지고 온 오염 물질이 땅을 더럽힌다. 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엘프 대수림은 그 옛 모습을 서서히 잃고 말았다.

쿵! 파스스스스.

썩은 나무가 쓰러진다. 그 사이로 수많은 오염 쥐 떼와 구울 그리고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살점 언데드가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본토로 걸어갔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여라.’

서부 전체를 오염시킨 불사왕은 이제 북방과 이어진 중앙 대륙을 노리고 있었다. 한참 분열된 채 싸우던 오크가 이를 막아낼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       *       *

“······호흡은 안정적이네요.”

오늘도 눈투성이의 맥을 잡은 재상 기억하는 새는 긍정적인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반대로 짙은 한숨을 내쉬는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재상은 조용히 읊조렸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해안가에서 정신을 잃었던 눈투성이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날 이후로 무려 보름하고도 3일이 지났으니 단순히 잠들었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어디가 아프거나 치료하지 못할 불치병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혹시 몰라 진단한 몸 상태는 전부 정상이었으며 숨과 맥박 또한 평온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정말 말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진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너를 그리 좋기에 행복한 꿈에서 벗어나지를 않는 거냐. 평온한 얼굴이 우리를 더욱더 애를 타게 했다.

검은 화살이 입을 열었다.

“······일단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는 놈들은 전부 처리했어. 포크가 매번 깨끗한 걸 본 시종이 눈치를 챘던 모양이야.”

이번 일은 나와 일행들 그리고 소수 기사밖에 알지 못한다. 하지만 건강하던 기사왕이 매번 자리를 비우다 보니 관료와 왕실 관계자들이 슬슬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마 왕실을 지키고 있던 검은 화살이 아니었다면 헛된 소문이 퍼질 뻔했다. 그녀는 소문을 낸 시종이 괘씸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계수는 아무 말도 없지?”

“아예 입을 다물었다.”

설상가상 실마리가 될지도 모를 세계수조차 나와 대화를 거부했다. 보아하니 녀석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데 알 수 없는 벽 같은 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후.

사방에서 한숨 소리만이 들려온다. 덩달아 같이 한숨을 내쉰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눈투성이를 바라보았다. 언제 깨어난다는 기약은 없지만, 우리는 할 일을 해야 했다.

“검은 화살은 계속 소문을 단속하고 재상은 한동안 관료들을 다독여라. 이번 일은 내가 해결해 볼 테니 최대한 시간을 끌어줘.”

“다른 방도가 있을까요?”

“일단 마르실 사제와 공주 엘레나를 만나 볼 생각이다. 세계수와 불사왕을 계속 따라가 보면 실마리가 잡힐지도 모르지.”

마르실 사제라면 세계수가 입을 다문 이유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5년간 서부에 있었던 엘레나를 통해 이와 같은 사례가 있었는지 찾아볼 생각이었다.

“뒤를 부탁한다.”

만약 약이 필요하다면 지옥에 가서라도 구해올 것이다. 나는 입을 다무는 일행들을 안심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속한 눈투성이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혹시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느냐. 잠시 쉬어가도 좋으니 부디 일어나만 다오. 나는 곤히 잠든 눈투성이를 한번 쓰다듬은 뒤 고요함이 감도는 왕실 밖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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