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검은머리 기사왕 158화
눈을 마주쳤다. 검은 안개가 일렁이는 사념체 너머로 놈이 지닌 욕망이 여실히 느껴진다. 불멸을 넘어 신이 되길 원한 놈은 저 깊은 심연 속에서 악신을 끄집어냈다.
끼아아아아악 - - -!!!
사념체가 괴성을 지른다. 동시에 제물로 사용된 수천 명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불쌍한 희생자들이 내뱉는 절망은 그대로 불멸의 권능이 되어 힘을 더해 주었다.
후웅!
형체가 흐릿한 칼날이 쇄도했다. 정면, 측면, 사각을 가리지 않고 날아오는 공격에 나는 몸을 뒤틀었고 피하지 못한 검은 칼날은 기꺼이 검등으로 쳐내었다.
채앵!
탁!
지난 사념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와 위력을 겸비했다. 일반 병사들은 조금만 스쳐도 피와 살점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가 즉사할 것이다. 내가 막아야 한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본능이 그려 주는 경로를 따라 뛰쳐들어가 사념체 하나를 가로막았다. 숨이 막히는 검은 안개가 나를 짓누르지만, 허공을 향해 쇄도하는 검만큼은 거침이 없었다.
서걱!
한 병사의 목을 노리는 검은 칼날을 베어냈다. 그러자 검은 사념체는 마치 발작하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북방군 병사는 급히 일어났다.
“불길을 키워라!”
“검성 각하를 도와야 한다!”
수십 마리 사념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북방군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지막 용기를 쥐어짠 방진은 불길을 더욱 크게 키웠고 사념체를 서서히 조여 나가기 시작했다
쒜에엑! 푹!
화르륵!
사방에서 투창이 쏟아진다. 불화살은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북방군은 커다란 침입자를 몰아내는 개미처럼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이 바로 숨통을 끊을 기회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붉은 눈동자를 피해 사각으로 숨는다. 서서히 걸음이 빨라지고 어느새 전장 한가운데가 중심이 된다. 돌고 돌아 완벽한 타이밍을 찾은 나는 그대로 방진을 뛰쳐나갔다.
끽?
알아채봤자 늦었다. 신체 중심을 앞으로 뻗은 나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영혼 속 보이는 조그마한 응집 덩어리를 향해 베고자 하는 초월 의지를 강하게 실었다.
서걱!
코어를 베었다. 형체가 없는 형체는 썩은 진창이 되어 흘러내렸고 사념체는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놈에게 잡혀 있던 수많은 영혼이 잔재가 되어 하늘로 흩어져 올랐다.
됐, 됐어! 놈이 정말 죽었어!
와아아아아아 - - - - -!!!
서부 왕국에서 절대적 공포로 군림하던 사념체가 완전히 사멸했다. 북방군은 믿고 있었다는 듯 고함을 내질렀고 겁에 질렸던 엘프들은 떨리는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쿵! 쿵! 쿵! 쿵!
전장이 절정으로 향하고 있다. 내가 베어낸 사념체를 시작으로 연합군은 놈들은 물고 늘어지는데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언데드 잔존은 어느덧 해안가로 몰려나고 있었다.
서걱!
“후욱, 훅.”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이게 몇 번째 사념체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나마 긍정적인 것은 숨에서 단내가 날 때마다 놈들 숫자는 확연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스승님!”
기마 돌격을 성공적으로 이끈 눈투성이가 호위 기사와 함께 급히 달려왔다. 그리고 서둘러 내게 수통을 내밀며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짧은 여지를 주었다.
쪼르르륵!
수통을 받자마자 머리 위로 부었다. 차가운 물이 뜨거운 열기와 더러운 핏물을 씻어 내렸다. 몸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입 안 가득 머금은 물을 꿀꺽 삼킨 뒤 외쳤다.
“새로운 검을 다오.”
“여기 있습니다, 경!”
악한 기운이 얼마나 강한지 의지를 실은 검조차 부식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다. 한 기사가 내민 검을 서둘러 허리에 찬 나는 표정이 어두운 눈투성이를 향해 외쳤다.
“걱정하지 마라, 아직 멀쩡하니까.”
“스승님······.”
아마 세계수 파편이 없었다면 진즉에 탈진해 이송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심장 위에 뛰고 있는 녹색 기운은 피로를 몰아내고 있었다. 나는 뻐근한 몸을 풀었다.
“병사들을 지휘해라.”
왕은 지고한 존재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강인한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눈투성이는 이내 다시 기사들과 함께 전방으로 나아갔다.
“무기가 녹슨 자는 교체를 서둘러라!”
“부상자들은 이쪽으로 옮겨!”
치열한 전투였다. 수많은 병사가 오염되어 요새로 후송되었고 무기는 채 1시간을 버티지 못해 부식되었다. 하지만 결국 승리는 북방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서걱!
파스스스스!
또 사념체를 베었다. 이제 남은 사념체는 겨우 3마리뿐이다. 환호성을 지를 힘도 남아있지 않은 북방군은 독기가 가득한 눈동자를 빛내며 녹슨 창을 부여잡았다.
버텨라, 조금만 더 버티면 승리가 눈앞이다. 달콤한 승리보다 죽어 나간 전우를 위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할 차례였다. 살점이 묻은 방진이 마지막 전진을 시작했다.
후우우우우웅 - - - -!!!
끼이익!
하지만 그 순간 또 한 번 돌풍이 불었다. 이번 돌풍은 죽음을 경고하는 전조가 아닌 하늘로 향하는 역풍이었다. 엘프군을 지휘하던 공주 엘레나가 다급히 외쳤다.
“놈들을 거둬들이고 있어요!”
언데드는 대부분이 죽었다. 사념체도 겨우 3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불멸왕이 선택한 것은 혼란과 역 소환이었다. 진노한 하늘이 바다와 지상에 천둥 번개를 몰고 왔다.
콰르르르릉 - - - -!!
빗줄기가 거세게 몰아친다. 먹구름이 몰고 온 거센 돌풍은 타오르는 모든 횃불을 꺼 버렸다. 숨 막히는 밀도, 멈춰 버린 세상. 북방에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놈이 왔다.
[어리석다.]
타락한 불멸왕이 권능을 휘둘렀다. 악신이 단순히 의지를 전하는 것만으로 인간들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종족을 대가로 얻은 힘의 깊이는 그 끝이 보이지가 않았다.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놈들이 감히 죽음과 싸우려 드는구나. 아직도 모르겠느냐?]
커억, 컥!
으아아아······! 아아아!!
얼굴이 검게 변한 병사가 귀를 막았다. 뒤이어 다른 병사도 검은색 핏물을 뱉어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놈이 내뱉는 저주는 인간들을 삽시간에 오염시키고 있었다.
[너희를 지킬 신은 방관할 뿐이다.]
그래, 찾아오는 죽음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불멸, 아니 불사. 타락한 불사왕은 현존하는 죽음이었다. 나는 서서히 내려가는 의지와 희망을 다시 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구원의 무명을 받은 이는 내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예견한 어머니 북방은 드디어 안배한 꽃을 피웠다.
“두려워 말라!”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번쩍!
짙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이 발아했다. 새하얀 눈을 닮은 그 빛은 서서히 확산하더니 이내 두려움에 질린 북방군을 감싸 안았다. 불사왕 앞에는 어느덧 기사왕이 서 있었다.
“- - - - - - - -!!!”
위태롭다. 흔들린다. 커다란 어둠 앞에 눈투성이는 그저 작은 빛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찌나 눈이 시린지 마수를 뻗어오던 불사왕조차 놀라 반발했다.
[기사왕 - - -!!!]
쾅! 쾅! 츠즈즈즉!
어두운 권능이 눈투성이를 옭아매려 했다. 하지만 오러가 내뿜은 작은 빛은 모든 사특한 공격을 가로막았다. 위대한 어머니 북방이 이 자리를 찾아온 것이다.
척!
눈투성이가 오러 검을 추켜들었다. 더욱더 환해진 빛은 불사왕을 바다로 물러나게 했다. 끝까지 뜻을 관철했던 눈투성이는 비로소 정의를 바로 세울 자격을 얻었다.
‘여길 지나갈 수 없다.’
“이들 앞에 내가 있다.”
신실한 자가 신을 대리함이니 북방에서 물러나라. 심연보다 높은 거대한 하늘과 푸르른 대지가 불사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호한 추방령이 침입자를 향해 쏟아진다.
번쩍!
[아아아아아아 - - - - - -!!!!]
빛이 번쩍였다. 그 순간 어둠은 다 타 버린 재가 되어 흩날렸고 불사왕 또한 분노어린 고함과 함께 바닥으로 끌려 들어갔다. 사특한 모든 존재가 심연으로 쫓겨난 것이다.
사르륵.
“아······!”
그 힘을 다한 빛의 오러가 사방으로 흩날린다. 하늘에선 오러 조각이 꽃비처럼 내렸고 무심코 뻗은 손 위에 사르륵 녹아내린다. 어두운 밤이 지나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비켜라!”
모두가 넋을 잃었다. 하지만 빠르게 정신을 차린 나는 병사들 사이를 뚫고 뛰쳐나갔다. 꿋꿋하게 서 있었던 기사왕 눈투성이가 안장 위에서 스르륵 쓰러지고 있었다.
다각, 다각! 푸르륵!
털썩!
하얀 바람이 깜짝 놀라 자세를 낮춘다. 정신을 잃은 눈투성이를 가까스로 받은 나는 서둘러 쓰고 있던 강철 투구를 벗겼다. 그리고 코끝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스륵!
다행이다. 숨은 잘 쉬고 있다. 호흡이 안정적인 것을 확인한 나는 더러운 피가 묻은 녀석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사력을 다한 얼굴에는 작은 웃음기가 맺혀 있었다.
무려 악신과 싸우다 쓰러졌는데 무엇이 그리 기뻐 웃고 있을까. 그 웃음을 애처롭게 바라본 나는 이마를 맞대었다. 내 경의를 받아라, 기사왕. 참으로 훌륭했다.
“경!”
“폐하는 괜찮으시다.”
깜짝 놀란 기사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나는 그들에게 상태가 괜찮다고 알린 뒤 깨끗한 망토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곤히 잠이 든 눈투성이를 소중히 감싸 안았다.
“주변을 가려다오.”
“알겠습니다, 경!”
북방과 인간을 다스리는 기사왕이다. 감히 잠이 든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풀이 죽은 하얀 바람을 조용히 쓰다듬어 준 뒤 저 멀리 요새를 향해 걸어갔다.
터벅, 터벅, 터벅.
서둘러 달려온 북방 기사단이 도열했다. 그리고 잠이든 기사왕을 보지 못하도록 나와 함께 걸었다. 주변은 어느덧 주저앉아 있던 연합군이 하나둘 일어서고 있었다.
인간이 신을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용기 있게 나서 악과 대항하려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늘 아래 맹세한 왕만큼은 앞으로 나서 검을 들었다.
초월한 신념 앞에 우리는 무엇을 표해야 하는가. 존경과 경의를 담은 이들은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신이 내린 신탁이었으며 악과 대항할 용기였다.
터벅, 터벅, 터벅.
“폐하!”
홍해처럼 갈라진 병사들을 지나 요새 성문을 지나쳤다. 그러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재상이 넘어지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뛰어와 바닥에 누운 눈투성이를 살폈다.
“폐, 폐하는!”
“잠들었을 뿐이다.”
어머니 북방이 눈투성이 몸을 빌려 잠시 다녀갔다. 감히 불사왕이 상처를 남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재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살아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 앞에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세상은 과연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내가 곤히 잠이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넋을 놓은 재상이 읊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글쎄. 아마 이것이 끝이고.”
나로서는 지고한 신의 뜻을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머니 북방은 항상 나아갈 방향을 알려 준다는 것이다. 나는 잠이 든 녀석의 손을 꾹 움켜잡았다.
“또 다른 시작인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