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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57화 (157/181)

< 157화 >

검은머리 기사왕 157화

자신을 정의라고 생각한다면 그 무엇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할 것이다. 반대로 상대를 악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정의가 또 다른 악의가 아닌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무릇 전쟁이란 그랬다. 시점을 어떻게 두냐에 따라 상대도 나도 각자가 지닌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 예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죽지 않는 존재 언데드. 저 깊은 심연에서 끌려 나온 놈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전부 증오했다. 종족, 신념, 가치, 영토,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절대 악의 등장이었다.

끼기긱! 끽!

서걱!

언데드 구울이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온다. 나는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 머리를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놈은 한 차례 버둥거림과 함께 쓰러져 순식간에 부패했다.

살가죽은 질기고 두개골은 단단했다. 제대로 목을 끊어 놓지 않으면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흔한 구울조차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병사들이 상대하기는 버거웠다.

서걱!

순식간에 두 놈을 죽였다. 하지만 그 빈자리로 또 다른 두 놈이 달려든다. 해안을 건너온 언데드 군단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파도처럼 나와 요새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크아아!

콰직!

찌르고 베고 찍는다. 오로지 길을 뚫는다는 생각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인간이 내는 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도망치던 초소병을 발견한 것이다.

“검, 검성 각하!”

“내 뒤로 물러서라”

전투가 얼마나 격했는지 수십 명 병사 중 겨우 8명만이 남았다. 나는 그런 그들이라도 살려 가기 위해 검을 휘두르며 횃불을 환히 키울 수 있는 기름을 던져 주었다.

화르륵!

순식간에 불이 솟아올랐다. 미친 듯이 달려들던 언데드 무리는 주춤거렸고 빛과 어둠 사이에 작은 공간이 생겼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요새 성벽을 바라보았다.

“검성 각하를 엄호하라!”

아니나 다를까, 상황을 지켜보던 부장이 궁병대를 향해 명령했다. 순간 사방으로 쏘아지던 불화살이 우리 부근으로 집중되어 언데드 무리를 녹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퓨웅! 퓨퓨퓽!

적절하고 위력적인 엄호다. 나는 통쾌하게 내리꽂히는 불화살 세례를 보며 숨을 잔뜩 들이켰다. 그리고 검은색 피로 물든 검을 추켜들고 요새 성벽으로 향해 달렸다.

스읍.

작게 벌린 입 사이로 호흡이 지나간다. 그러자 세계수 파편은 맹렬히 회전하며 알 수 없는 힘을 부여했다. 나는 힘과 함께 베고자 하는 의지를 칼끝에 담았다.

서걱!

파즈즈츠츠측!

구울 머리통이 날아간다. 그 뒤로 수많은 언데드가 찢겨나갔다. 길이의 연장인가 움직임의 가속인가. 마치 터널처럼 이어진 의식 다발은 순식간에 길을 뚫어냈다.

와아아아아아 - - - - !!!

압도적인 무위 앞에 사기가 올랐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투기와 시너지를 이루었고 북방군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시위를 당기는 손, 내지르는 창이 점차 빨라졌다.

“각하!”

성벽 위로 밧줄이 내려왔다. 나는 쓰러지기 직전인 초소병 먼저 올려 보내며 주변을 살폈다. 놈들은 요새 위에서 떨어지는 불화살과 투창 앞에 주춤거리고 있었다.

하나 같이 수성에는 도가 튼 이들이다. 아무리 죽음을 몰고 다니는 언데드라 할지라도 감히 해안 요새를 넘볼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삐이이이이이이 - - - -!!

하지만 그 순간 저 멀리 해안에서 애처로운 풀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 물이 넘실거리고 있는 북방 바다에는 불타는 엘프 선단이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원 요청.’

그 난리 통 속에 용케 살아남았다. 아직 반절 넘게 살아남은 엘프 선박은 서로를 묶은 밧줄을 급히 풀고 대대적인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물론 잘 될 리가 없었다.

깜빡, 깜빡, 깜빡.

반짝이는 불빛 속에서 엘프들이 보내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한창 전투를 진행 중이던 부장과 병사들은 눈치를 봤다. 선택은 오로지 현장 사령관인 내가 할 수 있었다.

사실 지원 요청을 거부할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서명을 끝낸 조약이 아직 발효되지 않기도 했고 원래 요새 방어가 임무인 북방군이 나설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훗날을 생각한다면 저들을 구해야 한다. 나는 인도적인 차원이 아닌 기사왕 눈투성이를 위해 결단했다. 서둘러 검을 뽑아 요새 위 북방군을 향해 명령했다.

“북방군 요새 밖으로 집결하라!”

뿌우우우우우우 - - - - -!!

항명은 없다. 사령관이 그리하라 했다면 그리하는 것이다. 한창 전투 중이던 북방군은 화답하는 뿔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곳으로 뭉쳐 대열을 이루었다.

스릉!

나는 주춤거리는 구울의 목을 베었다. 검을 한 바퀴 돌려 핏물을 흩날리자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방진이 든 떡갈나무 방패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쿵! 쿵! 쿵! 쿵! 쿵!

북소리에 맞춰 발을 뻗는다. 떡갈나무 방진은 움직이는 요새처럼 성문을 빠져나왔다. 그 뒤에선 궁병대가 발사하는 불화살이 언데드의 접근을 일체 봉쇄했다.

내 뒤로 수많은 투기가 느껴진다. 그것은 감히 죽음에 대항하고자 나선 수많은 인간이었다. 어머니 북방의 이름 아래 싸우자. 언데드 군단을 향한 돌격이 시작되었다.

“돌격! 적을 분쇄하라!”

“으아아아아아 - - - -!!!”

쿵! 쿵! 콰앙! 콰직!

서걱! 화르륵!

타오르는 불이 놈들에게 꽂혔다. 튼튼한 방진 앞에 언데드 무리는 감히 돌격을 가해오지 못했다. 5년간 갈고 닦은 북방군의 저력은 죽음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다.

서걱!

“경! 받으십시오!”

“고맙다!”

최대한 결을 보고 자르려 했다. 하지만 몸체가 어찌나 질긴지 검날이 전부 나가 버렸다. 나는 부장이 건네는 새로운 검을 서둘러 받아들고 방진과 함께 돌격했다.

쾅! 돌격!!!

크아아아!

사각 방진이 언데드 군단을 뚫는다. 서서히 해안가가 가까워졌고 엘프들이 내뱉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그 짧은 사이를 참지 못한 나는 언데드 무리를 빠르게 돌파했다.

“검성이다! 검성이 왔다!”

나를 발견한 한 엘븐 가드가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엘프들의 시선이 전장으로 난입한 나와 북방군으로 향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정, 정말 와 주셨군요, 경!”

그 순간 온몸이 바닷물과 피로 젖은 엘레나와 귀족들이 급히 뛰어왔다. 그녀는 설마 이리 빨리 와 줄 줄 몰랐다는 듯 하얗게 질린 얼굴에 화색을 띠고 있었다.

“어디서 온 놈들이지?”

“숙주가 쥐들 몸에 숨어 있었습니다! 선박을 급히 불태우고 있기는 한데······.”

원인은 숙주가 심어진 쥐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숨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증식이 진행중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를 악문 나는 공주와 귀족들을 향해 외쳤다.

“일단 합류하라!”

단순한 돌파로는 답이 없다. 적어도 언데드 무리를 해안으로 밀어붙이고 비무장 엘프들이 도망칠 길을 열어야 한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다가오는 북방군을 지휘했다.

“발사!”

“틈을 내주지 마!”

북방군 방진이 언데드를 막고 궁병대와 합류한 엘프 병사들이 화살을 발사한다. 동시에 숙주가 있을지 모르는 선박이 불타며 비무장 엘프들이 무사히 상륙했다.

이미 많은 엘프가 저 깊은 바다 아래 수장당했다. 남은 이들이라도 무사히 데려가야 왕의 약조를 지킬 수 있었다. 나는 방패를 밟고 뛰어넘어 전장을 헤집었다.

우우웅!

세계수 파편이 공명한다. 알 수 없는 빛이 주변을 밝히며 언데드 무리를 물러나게 했다. 푸르른 기운이다. 저 수도 너머 세계수 나무가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기운이 서린 검을 높게 추켜들었다. 사방으로 초록색 오로라가 뻗어나가자 북방군은 고함을 내질렀고 엘프군은 잊고 있었던 자신들의 신 세계수를 위해 성호를 그었다.

조준, 발사!

퓨우우우우! 파바박!

엘프와 인간은 앙숙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껄끄러움은 여전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절대 악(惡) 불멸왕의 존재는 엘프와 인간을 하나로 묶게 해 주었다.

어머니 북방이 지켜보신다. 세계수가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용기를 얻은 연합군은 점차 언데드를 몰아내고 있었다. 치열한 승기가 코앞에 다가온 듯 보였다.

후우우우우웅 - - - -!!

콰르르릉!

하지만 불멸왕이 이런 허술한 안배를 해 둘 리가 없었다. 하늘에는 익숙한 돌풍과 함께 검은색 먹구름이 넘실거렸다. 천둥 번개 사이로 사념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크르르르르!

세계수 권능이 필요했던 예전과는 달리 타락한 불멸왕은 사념체와 권능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언데드 사이로 보이는 검은색 사념체만 무려 수십 마리가 넘었다.

“아아······.”

사념체와 싸워 본 경험이 있는 엘프와 북방군은 놈이 지닌 위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념체가 무려 수십 마리라니! 사기는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크아아아!

언데드 군단은 두려움을 읽었다. 두려움을 먹고 자란 오염과 타락은 주변을 검게 물들이며 방진을 밀어붙였다. 전황은 순식간에 언데드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서걱! 쾅!

끄아아악! 불을 가져와!

수십 마리 사념체가 방진으로 달려들었다. 떡갈나무 방패는 순식간에 부서졌고 밀려난 북방군은 무기력하게 날아갔다. 내가 손쓸 틈도 없이 곳곳에 구멍이 생겨났다.

이것이 타락한 불멸왕의 진짜 위력인가. 줄기는커녕 점점 늘어나는 언데드 앞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전부 숨을 죽였다. 나는 겨누고 있던 검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경······?”

공주 엘레나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이 없자 포기했다고 생각했는지 무거운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내가 검을 내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깃발을 다오.”

내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깨끗한 깃발을 내밀었다. 의문 가득한 시선이 한곳에 집중된 가운데 기류를 읽은 나는 깃발을 하늘 높이 펄럭였다.

끼이이익, 덜컹!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린다. 미친 듯이 공세를 취하던 언데드도 힘겹게 방패를 들어 올리던 북방군도 거짓말처럼 멈췄다. 요새에서 시작된 진동이 서서히 커졌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나는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그리고 깃발을 바닥에 꽂으며 저 요새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왜 이렇게 늦게 출발했는가. 작게 혀를 차자 진짜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성문 밖으로 북방 기병대와 기사단이 쏟아져 나온다. 흰 뿔 사슴과 하얀 망토가 펄럭이는 백색 무리는 감히 북방 땅을 탐낸 언데드 군단을 향해 돌격을 가했다.

뿌우우우우우우우 - - -!!

거창! 기병대가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기사단은 푸른색 오러를 뽑아 사방을 밝혔고 그 선두에는 단연코 가장 밝은 빛이 있었다. 기사왕이 오러 날개를 펼쳤다.

“기사왕 폐하가 오셨다!”

두두두두두, 쿵!

콰직! 끼이이익!

기병대가 언데드 무리와 격돌했다. 육중한 몸체와 뿔 앞에 선두는 그대로 녹아내렸고 푸른색 오러는 사방에 빗발쳤다. 기세가 오른 북방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 - - -!!

등대가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표류하는 풍랑 위, 빛이 달하는 곳이 바로 북방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나는 어깨를 폈고 이내 거대한 사념체를 향해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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