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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56화 (156/181)

< 156화 >

검은머리 기사왕 156화

엘프가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자존심이다. 차라리 목을 내놓으면 내놓았지 수치를 당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런 오만함이 바로 엘프 종족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종족이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앞에 그런 지조는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렸다. 공주 엘레나가 무릎을 꿇는 것도 모자라 기사왕 발등 위에 입을 맞춘 것이다.

‘부디 자비를······.’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역사는 기록했다. ‘엘프 종족이 인간 종족 아래 굴복하다.’ 이 한줄기 문장은 사실상 전쟁 종식을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직한 나무일수록 꺾기 쉽지 않다. 하지만 한번 꺾이게 된다면 다시 세워지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이런 엘프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기사왕은 기꺼이 자비를 베풀었다.

‘어머니 북방 아래 용서를 비십시오.’

이주를 허용하기에 앞서 공식적인 항복 절차가 진행되었다. 엘프 왕국의 지도자인 엘레나가 직접 전쟁이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친필 서명을 남긴 것이다.

엘프 종족은 약조에 따라 전쟁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그 액수는 가지고 온 왕실 재산은 물론이고 가지고 온 선박을 전부 팔아야 할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물론 이것은 북방을 향한 배상이지 북방 왕실을 향한 배상이 아니었다. 이를 별개로 취급한 재상은 또 다른 금액을 청구했고 악착같이 이를 받아내고자 했다.

앞으로 이뤄질 종족 이주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한 차례 치욕으로 기운을 잃은 공주 엘레나는 결국 꼭꼭 숨겨 놓았던 선조들의 유산을 진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항복 절차 뒤로 이어진 본격적인 이주 협상은 재상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협상이 이어졌다.

정착지는 총 18개 구역이 선정되었다. 엘프 종족이 한 지역에 터를 잡지 못하도록 북방 이곳저곳에 정착지를 분산한 것이다. 물론 지역 자치권은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재상은 각 분야 엘프 기술자와 예술가를 선별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남들보다 나은 대우라는 미끼 앞에 그들은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지식을 뱉어낼 것이다.

협상은 종료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공주 엘레나는 기꺼이 고개를 숙였고 드디어 망명 신분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이주 전 마지막 날 밤이 저물었다.

“치욕적이군······.”

“미리 준비한 듯 철저하오.”

그리고 상륙 하루 전, 재상에게 정신없이 휘둘렸던 엘프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사실상 말만 회동이지 자포자기한 상태로 모인 술자리나 마찬가지였다.

꿀꺽.

속이 답답하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제 겨우 한 병밖에 남지 않은 술을 나눠마신 엘프 귀족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내일이면 얼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일 것이다.

쿵!

“이렇게 끝낼 수는 없습니다.”

그 순간 귀족 중 가장 젊은 엘프가 호기롭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술기운이 오른 몸을 일으켜 언성을 높였다. 무례하다. 미간을 찡그린 한 귀족이 물었다.

“그럼 무슨 방법이라도 있나?”

“지금이라도 공주님을 설득해 해안가를 점령해야 합니다. 이 많은 엘프가 무력을 행사한다면 분명 협상 내용도 바뀔 겁니다.”

위험한 생각이다. 동시에 엘프 종족이 협상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해안가를 점령해 무력을 행사한다. 엘프 귀족들은 순간 짙은 고민에 빠졌다.

“정신 차리게.”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귀족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나섰다. 수염이 지긋한 엘프 귀족은 한심한 눈으로 귀족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젊은 엘프를 향해 외쳤다.

“요새 뒤쪽을 못 봤나?”

“······뒤쪽 말입니까?”

“그래, 북방군이 집결해 있더군.”

늙은 귀족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여기까지 눈치로만 살아남았다. 이들이 요새 안쪽만 볼 동안 그는 뒤쪽 집결지까지 전부 살피고 있었다.

“수도 군단이 온 거지.”

5년 전 북방이 아니다. 서부 엘프가 불멸왕과 미친 듯이 싸우는 사이 인간들은 군비를 늘리고 부대를 확충했다. 그 결과 가히 군단이라는 명칭이 아까울 만큼 성장했다.

언덕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북방군 본대, 지난 승리의 주역이었던 북방 기병대, 그리고 검성이 이끄는 북방 기사단까지, 모든 전력이 엘프를 아득하니 뛰어넘고 있었다.

“죽으려면 혼자 죽게.”

꼴깍, 꼴깍.

이제는 현실을 수긍할 차례도 되었다. 지난 5년간 많은 것을 내려놓은 늙은 엘프는 마지막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켰다. 그리고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린다.

“······나도 이만 가 보겠네.”

“다들 내일 보자고.”

모두 생각이 복잡하다. 앞으로 정착할 북방에서 먹고 살아야 할 고민을 해야 할 때였다. 어깨가 축 늘어진 귀족들은 젊은 귀족을 뒤로한 채 각자 거처로 흩어졌다.

“젠장.”

홀로 남은 젊은 귀족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

터벅, 터벅, 터벅.

방을 빠져나와 갑판으로 걸어 나왔다. 서로가 밧줄로 연결되어있는 거대한 선단은 짙은 밤만큼이나 조용했다. 북방은 참으로 춥구나. 젊은 귀족은 거처로 돌아가려 했다.

끽, 끼긱. 끽.

“- - - - - - - -?”

하지만 그 순간 기괴한 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마치 쥐 같기도 한 울음소리에 신경이 곤 듯 선 것이다. 젊은 귀족은 본능적으로 검과 횃불을 뽑아 들었다.

끼긱, 끽. 킥킥, 끽!

갑판 아래서 들려오는 소리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그는 검을 앞으로 겨눈 채 천천히 다가갔다. 북방이 보낸 첩자인가? 횃불이 서서히 어둠을 밝히기 시작했다.

끼이익! 끽!

까드득!

검은 물체가 어둠을 뛰쳐나왔다. 깜짝 놀란 젊은 귀족은 검을 휘둘렀지만, 날카로운 이빨은 이미 목을 물어 버린 지 오래였다. 시체와 시궁창 냄새! 언데드가 분명했다.

커억, 컥!

털썩!

물어뜯긴 목에서 핏물이 새어 나온다. 얼굴이 검게 변한 귀족은 그대로 쓰러졌고 숙주인 언데드 쥐는 게걸스럽게 내장을 파먹었다. 끔찍한 광경은 시작에 불과했다.

끼기긱! 끽!

시체가 되살아났다. 동시에 횃불은 꺼졌고 갑판 밑에선 기다렸다는 듯 숙주들이 쏟아져나왔다. 밧줄을 타고 선박을 넘는 언데드는 마치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 * *

바스락.

눈꺼풀이 저절로 떠졌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정신을 깨어나게 했다. 무슨 일인가. 나는 누워 있는 상태에서 손을 뻗어 검집을 쥐었다.

스륵.

방은 조용했다. 그 어디에도 별다른 이변이 보이지 않았다. 밤새 켜 두려고 피웠던 화로는 어느새 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서둘러 겉옷을 입었다.

끼이익.

가장 먼저 문 앞으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복도는 마찬가지로 어둡고 조용했으며 초병이 주기적으로 순찰하고 있었다. 내부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터벅, 터벅, 터벅.

괜한 걱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은 이성보다는 본능을 신뢰할 때가 있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들 때, 지금처럼 몸이 알아서 움직일 때 나는 작은 확신을 얻는다.

덜컹!

복도 창문을 열자 요새 풍경과 함께 북방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늘따라 달이 없는 하늘은 어두웠기에 넘실거리는 물결과 엘프 선단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이상하다. 시야 확보를 위한 횃불을 켜 놓았을 텐데 엘프 선박에는 불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작은 불안감에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검성 각하?”

“따라와라.”

그 순간 초병이 급히 달려왔다. 주변을 순찰하던 도중 혼자 걸어가는 상관을 발견한 것이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한 나는 초병과 함께 요새 성벽으로 걸어갔다.

화르륵!

“해안 초소로 신호를 보내.”

“알, 알겠습니다.”

신호기에 서둘러 불을 점화했다. 그리고 초병을 재촉해 해안가를 지키는 초소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깜빡, 깜빡, 깜빡, 가림판이 정확히 3번 불꽃을 점화시켰다.

“어어······? 답이 없습니다, 경.”

초소를 지키는 북방군은 정예병들이다. 아무리 시간이 걸린다고 한들 신호를 받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의문이 확신으로 변한 나는 당황한 초병을 향해 급히 외쳤다.

“즉시 경종을 울려라!”

“알겠습니다, 경!”

절차를 따질 겨를이 없다. 내 명령을 받은 초병은 급히 감시탑 위로 올라가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요새 내부는 순식간에 욕설과 고성으로 난리가 났다.

땡! 땡! 땡! 땡! 땡!

비상사태다! 서둘러 위치로!

병영에서 급히 무장한 북방군이 쏟아져 나온다. 아직 요새는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서둘러 활과 화살을 들어 불을 점화했다. 시위를 당겨 하늘을 향해 쏘았다.

끼기기긱, 핑!

한 줄기 작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 작은 불꽃은 어두운 해안가를 엿보기에는 충분했다. 주황색 불빛 사이로 수많은 언데드가 갯강구처럼 기어 오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초소병들은 다 어디 갔어!”

사람이 아니다. 다른 종족은 더더욱 아니다. 불멸왕이 만든 악의 결집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 언데드를 처음으로 마주한 북방군은 작은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동요하지 마라! 어머니 북방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전원 자리를 지켜라!”

그 순간 성벽 위를 질주한 나는 목소리에 세계수 기운을 실었다. 그러자 북방군은 빠른 속도로 정신을 차렸고 이내 각자 정해진 자리로 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궁병대! 불화살을 장전하라!”

“불화살을 장전하라!”

“서둘러! 빨리! 하나, 둘, 셋!”

화르륵!

반응이 빨라졌다. 내가 명령을 내리자 집결한 북방 궁병대는 즉각 시위를 당겼다. 사념체는 불이 약점이었듯 언데드 놈들 또한 불꽃이 유효할 것이다. 나는 재차 외쳤다.

“발사!”

촤자자자작!

퓽! 퓨웅! 퓽!

하늘 위로 수많은 불화살이 날아올랐다. 숙련된 궁병대답게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매서운 기세로 달려오던 언데드 부대는 한차례 저지당하며 녹아내렸다.

“기름을 끓여라! 빨리!”

“방진! 투창 준비이이이!”

불멸왕 사념체를 상대한 경험이 있는 노련한 북방군이다. 내가 중심을 지키며 지휘를 내리자 언데드 부대를 상대하기 위한 준비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발사!

퓨뷰뷰븅! 끼이익!

됐다, 시간을 끌면 재상과 눈투성이가 지원을 올 것이다. 나는 성벽 위 북방군을 독려하며 미친 듯이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그 순간 한 부장이 다급히 외쳤다.

“경! 초소병들입니다!”

손가락을 따라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모래 속에 숨어 있던 병사 수십이 급히 요새를 달려오고 있었다. 해안 초소병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인 모양이다.

“- - - - - - - -!!”

길이 막혔다. 퇴로도 막혔다. 때를 노리고 달려오던 초소병은 순식간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마치 한 몸처럼 움직임 언데드 군단은 포식을 위해 공간을 좁혀 들어갔다.

탁!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성벽 난간을 밟고 위로 뛰어올랐다. 경악한 부장이 다급히 손을 뻗어왔지만, 중력을 받은 몸은 이미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스르릉!

공중에서 검을 뽑는다. 언데드 부대가 마치 먹이를 받는 새끼 새처럼 입을 벌린다. 하지만 아가리로 들어온 것은 살점이 아닌 빠른 속도로 휘둘러진 검이었다.

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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