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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55화 (155/181)

< 155화 >

검은머리 기사왕 155화

공주 엘레나는 무척이나 기구한 삶을 살았다. 여왕 엘렌도르의 유일한 딸이었지만, 왕실에서 함께 살기는커녕 단 한 번도 정이라는 것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수명과 젊음을 연장해 주는 엘릭서가 있는 이상 왕위는 영원불멸했기 때문이다. 여왕에게 있어 친자식은 그저 껄끄러운 경쟁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덕분에 엘레나는 평생을 탑 안에 갇혀 살았다.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조차 지켜갈 때쯤 공주는 이 기구한 운명을 수긍했고 엘프 왕국 사이에서 점차 잊혀 가는 듯했다.

‘여왕이 죽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알고 있던 세상이 무너졌다. 반신이라 불리는 불멸왕이 엘프 여왕을 시해한 것도 모자라 왕국 수도를 어둠으로 물들여 버린 것이다.

수천 년 역사였던 왕실이 불태워졌다. 시민들은 무참히 학살당하거나 지방으로 도망쳤다. 엘프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은 그저 하나로 뭉쳐 대항하는 것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심에는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된 엘프 공주 엘레나가 있었다. 여왕의 딸이라는 적통과 명분은 혈통주의로 똘똘 뭉친 엘프를 규합하기 충분했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엘프 공주 엘레나는 뛰어난 지도자였다. 엘프 사회와 격리되어 살아가는 동안 쌓은 방대한 지식과 유연한 사고는 위기를 타개하기 좋은 수단이었다.

엘프 종족은 하나로 뭉쳤다. 요새를 쌓고 타락한 불멸왕과 저항했다. 무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불멸왕 군단과 싸워온 엘프 공주 엘레나는 운명을 이 서부에 걸고 있었다.

“공주님! 요새 성문이 뚫렸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계는 명확했다. 죽음을 먹고 자라는 저 불멸왕 군단은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고 요새를 공격해 왔고 하필 오늘이 그 서부 최후의 날이었다.

“······모두 해안으로 후퇴하세요.”

더 이상 선택권은 없다. 북방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공주 엘레나는 이틀 전부터 대 이주를 준비해 왔다. 해안가에는 이미 수많은 엘프 피난민이 선박에 탑승한 상태였다.

삐이이이이이이 - - - -!

날카로운 호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후까지 항전하던 엘프 병사들은 그제야 후퇴를 시작했고 마침 뚫린 성문 안으로 수많은 언데드와 사념체가 밀려 들어왔다.

땅이 핏물로 물든다. 성벽이 검게 그을린다. 놈들이 지나친 자리는 마치 썩어 가는 살점처럼 오염되고 있었다. 끝까지 지키던 마지막 초록 영지가 함락되는 순간이었다.

“공주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아직 건재한 원거리 화력 덕분에 병사들은 무사히 후퇴하고 있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공주 엘레나는 몇 남지 않은 엘븐 가드와 함께 선박 위로 올라섰다.

“엘레나 공주! 이야기 좀 합시다!”

“왕국이 항복한다는 소리가 정말이요!”

그 순간 후방에 처박혀 있던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와 아우성쳤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고 나서야 뒤늦게 달려온 것이다. 공주는 불쾌한 기색을 애써 지우며 대답했다.

“저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또 다른 돌파구를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왕과 북방은 완강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엘프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항복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도 항복이라니! 체면이란 게 있지!”

“이런 치욕 받아들일 수 없소!”

머리가 지끈거린다. 비겁하고 옹졸하며 멍청하기까지 한 귀족들을 보며 공주 엘레나는 강한 살의를 느꼈다. 결국, 가면처럼 쓰고 있던 표정이 깨지며 독설을 흘러나왔다.

“······그러면 끝까지 싸우시죠.”

“공, 공주.”

“왕국과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동안 엘프 왕족이라는 의무감 때문에 앞으로 나섰던 엘레나다. 만약 명예를 위해 지금 죽어야 한다면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서 지옥으로 몸을 던질 의향이 있었다.

크흠! 큼!

하지만 귀족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서슬 퍼런 독설 앞에 대부분 귀족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했다. 대책 없던 불만과 아우성은 금세 가라앉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 - - - - -!!!!

때마침 함락된 요새 너머로 괴성이 들려왔다. 서둘러 고개를 돌린 성벽 위에는 커다란 생명체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엘레나는 다급히 외쳤다.

“돛을 펴세요! 서둘러 떠납니다!”

대륙은 모르고 있다. 죽음을 먹고 자란 불멸왕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 또 그 권능이 탄생시킨 존재가 무엇인지 말이다. 수많은 언데드가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펄럭!

돛이 펴졌고 선단은 해안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졸지에 고향을 잃은 엘프들은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 그 눈물은 어리석었던 과거를 향한 참회이자 짙은 고해였다.

쏴아아아아.

해안에 늘어선 선박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엘프 대 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기사왕 눈투성이는 즉각 북방군을 소집, 약속 장소인 해안 요새를 향해 진군했다.

* * *

그날 이후로 북방은 한차례 작은 진통을 겪었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챈 기사왕과 재상이 부정부패를 뿌리 뽑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한 것이다.

수도 관료, 지방 영주, 각 지역 행정관이라면 예외 없이 감찰 대상에 들어갔다. 거기서 적발한 부정부패만 해도 수십 건이 넘어갔으며 크고 작은 죄 또한 다양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부정과 연루된 대부분이 왕실 고위직이나 영주가 아닌 중견 혹은 말단 직위들이었다.

기사왕은 즉각 체포를 명령했고 죄를 공명정대하게 판결했다. 이로써 억울했던 이들은 보상을 받았으며 긴 평화로 안일해져 있던 관료들은 정신을 차렸다.

절대적 완벽은 없다. 올바른 방향만이 있을 뿐이다. 문제가 있다면 보완하고 걱정이 된다면 예방하면 된다. 눈투성이는 점점 치국을 위한 왕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다각, 다각.

저 멀리 하얀 모자를 쓴 북방 고산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북방군 보급 부대를 점검하던 재상 기억하는 새가 어느새 내 곁으로 사슴을 물고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곰곰이 하세요?”

“그냥 옛 생각이 나서.”

나이를 먹을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그 상념이 꼭 심각한 사안은 아니더라도 어느새 떠올리고 되새김질한다. 선조들 말처럼 어머니 북방과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재상은 말없이 웃었다. 이제 일행들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이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나는 한동안 그녀와 마주 보고 웃은 뒤 주변을 둘러봤다.

“폐하께선?”

“선두에 계세요.”

멀지 않은 곳에 선두가 있다. 재상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북방군을 이끄는 기사왕을 발견했다. 눈투성이는 젊은 지휘관들과 한창 의논 중이었다.

의외였다. 항상 우리의 조언과 함께 결정하던 평소와는 달리 요즘은 젊은 관료와 지휘관들에게도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아마 내 조언을 듣고 난 이후였을 것이다.

재상이 흐뭇하게 웃었다.

“보기 좋죠?”

젊은 관료들 사이에 둘러싸인 눈투성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은 푸르른 봄내음이었고 젊음이 주는 예찬이었다. 나는 선두로 달리려던 고삐를 잠시 놓았다.

둥지 속 새가 날아올랐었다. 그리고 그 새는 순풍을 타고 다른 하늘로 활공할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고산을 바라보며 눈가를 적신 먹먹함을 날려 보냈다.

삐이익!

그 순간 저 멀리 호적이 울렸다. 주변을 정찰하던 검은 화살이 신호를 보낸 것이다. 나와 재상은 기다렸다는 듯 사슴을 몰았고 이내 바로 앞 언덕까지 달려갔다.

다각! 다각! 다각!

바다 향기가 난다. 언덕 아래는 푸른색 바다와 그것을 지키는 해안 요새가 북방군을 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딱 하나가 풍경을 더럽히고 있었다.

“저쪽도 도착한 모양이네요.”

“음.”

바다를 건너온 선단이 해안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물론 지난 침공 때와는 다르게 선박에는 백색 깃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작게 혀를 차며 기수를 돌렸다.

* * *

단 한 척의 배만이 무사히 상륙했다. 그곳에는 공주 엘레나를 포함한 소수 엘프 귀족이 타고 있었다. 무장을 해제한 그들은 아무런 호위 없이 해안 요새로 들어왔다.

덜컹!

터벅, 터벅, 터벅.

굳게 닫혀 있던 그레이트 홀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프 공주를 선두로 귀족들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묵직한 분위기가 홀을 감싼다.

“- - - - - - - -.”

눈빛으로 죽일 수 있었다면 수백 번 죽였을 것이다. 그만큼 엘프 사절단을 바라보는 관료와 기사들의 눈은 사나웠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했다간 목이 달아날 것이다.

“사절은 예를 표하시오.”

공주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이 마주한 왕좌에는 기사왕 눈투성이가 앉아있었다. 분명 체구가 자신보다 작을 터인데 기운은 마치 태산처럼 거대했다.

꿀꺽.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단순한 무위나 실력이 아닌 고귀함이 왕을 감싸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인 여왕에게서조차 쉽게 느끼지 못했던 찬란한 아우라였다.

“······기사왕 폐하를 뵙습니다.”

엘레나가 고개를 숙이자 살벌했던 기운이 잠시 사라졌다. 공손한 인사를 받은 기사왕이 직접 왕좌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눈투성이는 자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환영합니다, 서쪽 땅에서 온 엘프여. 항해 도중 큰 불편함은 없었습니까?”

북방은 망명만 거절했을 뿐이지 실제로 많은 것을 양보했다. 즉각 구금이 아닌 인도적인 무장해제는 물론이고 엘프 난민이 마실 식수도 기꺼이 제공해 주었으니 말이다.

“······폐하 덕분에 평안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비라는 것을 아는 엘레나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 눈투성이는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안타깝게도 본론은 이제 시작이었다.

“너무 평안했던 모양이군요.”

“예? 그게 무슨······.”

“왜 약조를 지키지 않았죠?”

강한 기운이 짓누른다. 순간 숨이 막힌 엘레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떨었다. 기사왕이 이토록 진노한 이유가 무엇일까. 공주 앞으로 서신이 한 장 떨어졌다.

재상이 입을 열었다.

툭!

“저희가 약조한 인원보다 대략 10배는 더 많더군요. 저희 왕국은 나머지 엘프들을 받아 줄 이유가 없습니다, 공주.”

패착이다.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미리 약조했던 사항을 어기고 말았다. 북방이 받아주지 않는 엘프들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엘레나는 애절하게 외쳤다.

“고, 고향과 가족을 잃은 불쌍한 이들입니다! 기사왕 폐하! 부디 자비를······.”

“고향과 가족을 잃었군요.”

아! 순간 간절하게 애원하던 엘레나는 말문이 막혔다. 기사왕이 내뱉은 한 마디 물음이 모순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마 눈투성이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내 형제들은 아니었습니까?”

목숨으로 일어나 죽음으로 지켜낸 동토다. 기사왕 눈투성이는 산자는 물론 떠나간 이들 또한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몰려오는 추위에 떨림을 참을 수 없었다.

털썩!

마지막 엘프 왕족의 핏줄이 무릎을 꿇었다. 수천 년간 이어졌던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하늘 아래 이제 북방보다 빛나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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