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기사왕-154화 (154/181)

< 154화 >

검은머리 기사왕 154화

“아마 저 골목으로 갔을 거야!”

짙은 어둠이 찾아온 빈민촌은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로였다. 하지만 모든 골목을 꿰고 있는 소년 덕분에 길을 헤매지는 않았다. 나는 발목에 힘껏 힘을 주었다.

탁! 탁! 탁! 탁!

오랜만에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래도 소싯적 주력이 아직 죽지는 않았는지 주변 광경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정말 금방이었다.

“저기!”

소년이 다급히 가리킨 장소에는 어둠과 함께 수많은 횃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소년은 그 모습이 생소한지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이상해. 다들 왜······.”

밤에 나와서 좋을 게 없는 빈민촌이다. 하지만 무슨 변고라도 생겼는지 근방에는 소란을 듣고 몰려온 빈민촌 주민들이 가득했다. 순간 욕설이 섞인 고성이 들려왔다.

“당장 애새끼들 데리고 찾아와!”

“구경났어! 다 꺼져!”

익숙한 목소리가 하나 있다. 소년을 업은 나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심부름을 보냈던 아이들이 한 대 뭉쳐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어?”

허벅지 뼈를 부숴 놓았던 대머리 두목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다. 그리고 인파를 헤치고 나온 나를 향해 다급히 삿대질했다. 얼굴을 용케 알아본 모양이다.

“이 개 같은······!”

오늘 실수를 많이 했다. 진즉에 허벅지가 아닌 목뼈를 부숴 놨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도 많이 죽었구나. 한숨과 함께 소년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어, 어쩌려고!”

좀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저주하더니 이제는 걱정까지 해 준다. 아무리 조숙한 척, 강인한 척해 봐도 마음은 애처럼 여렸다.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앞으로 나섰다.

“너, 너 이 개X끼 드디어 찾았다! 시발! 멀쩡히 걸어서 돌아갈 줄 알았어?”

대머리 얼굴이 문어처럼 우락부락해졌다. 허벅지 뼈를 부숴 놓으면 얌전히 물러날 줄 알았더니 기어코 패거리를 모아 복수를 꾸민 것이다. 나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 - - - - - - -.”

아이들 사이로 소년의 어린 동생이 보였다. 얼굴이 퉁퉁 부은 채 정신을 잃은 녀석은 오빠에게 가져다 줄 약재를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나는 대머리를 향해 물었다.

“······해를 끼칠 애들은 아니었을 텐데 꼭 때릴 필요까지 있었나?”

주민들은 웅성거림을 멈춘다. 자연스럽게 주변을 포위한 패거리도 미간을 찡그린다. 그래, 이방인이 무엇을 알겠는가. 대머리 남성은 끌끌 웃으며 나를 조롱했다.

“이쪽 바닥에선 치이는 게 저런 애들이야. 누가 고아를 신경이나 쓸 것 같아? 괜한 동정 부리다가 너처럼 객사하는 거지.”

누구의 잘못인가. 악의를 지닌 자? 외면한 대중? 아니면 아래를 보지 못한 위정자. 나는 횃불 사이로 일렁이는 수많은 패거리와 주민 그리고 빈민촌을 한 시야로 담았다.

“들개 머리! 드디어 네 차례다!”

대머리 두목이 외치자 패거리들 사이에서 한 장발 남성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놈은 단검이나 몽둥이가 전부인 패거리와는 다르게 오른손에 장검을 들고 있었다.

오러 사용자다.

츠즈즈즉!

“하하! 또 날뛰어 봐, 새끼야!”

무슨 자신감인가 했더니 어디서 오러 사용자를 고용해 온 모양이다. 끽해 봐야 갓 발현 단계를 넘은 놈 같지만, 전장이 아닌 바닥에선 상당한 실력자라고 평할 만했다.

“도, 도망쳐! 도망치라고 바보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주민들이 뒤로 물러섰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 또한 도망치라고 연신 외친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들개 머리를 향해 다가갔다.

“군에 몸을 담았나?”

“······궁금한 게 많군.”

“족보가 없어 보여서 말이야.”

족보가 없다. 오러 사용자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들개 머리 또한 마찬가지인지 흉터 가득한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리며 달려들었다.

탁, 탁, 탁, 탁! 후웅!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가 좁혀졌다. 날카로운 오러 검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대머리 두목은 비열하게 웃었고 사람들은 곧 일어나게 될 참상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스릉! 서걱.

“·········뭐?”

하지만 기대하던 풍경은 없었다. 금방이라도 살과 뼈를 가를 것 같은 오러가 먼지처럼 흩날렸기 때문이다. 들개 머리는 인지 부조화가 온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툭.

오러를 무시하고 검을 잘랐다. 매개체가 사라진 오러는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 검을 뽑았던 나는 한 차례 휘두름으로 두 가지를 베어 낸 지 오래였다.

하나는 검.

또 하나는 목이다.

커억, 컥!

목 아래로 붉은 실선이 생긴다. 그 실선은 점점 커져 가며 핏물이 쏟아졌다. 검을 떨어트린 들개 머리는 황급히 목을 막았고 이내 불신 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그게 끝이었다. 놈은 그 허무한 유언을 마지막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대머리 두목과 패거리는 한순간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해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털썩!

“막, 막아! 막으라고!”

정신을 차린 대머리 두목이 의자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다가오는 나를 향해 패거리를 밀치며 황급히 도망쳤다. 사방에서 50명은 가뿐하게 넘을 놈들이 몰려들었다.

“뒤로 물러나 있어라.”

소년과 아이들 앞을 가로막았다. 이상하게도 이 좁은 구역은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게 느껴졌다. 핏물 한 점 묻지 않은 칼날, 나는 가벼운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후웅, 탁! 서걱!

콰직! 끄르륵!

살려 둘 가치가 없는 놈들이다. 처단이 아닌 도축을 해야 한다. 쓰레기를 치우듯 던지고 찌꺼기를 떼듯 긁는다. 놈들은 타오르는 불을 향해 달려드는 한낱 부나방이었다.

땡그랑!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반절이 넘는 패거리가 순식간에 도살당하자 나머지는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었다. 떨어지는 날붙이를 끝으로 나는 피를 털어냈다.

“아······.”

뒤를 보자 아이들 앞을 가로막은 소년이 주저앉아 있었다. 눈동자에는 한여름 밤 꿈처럼 넋이 나간 별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다.

삐이이익! 삐익!

어이! 거기 무기 내려놔!

저 멀리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신고를 받고 온 북방 경비대가 빈민촌을 찾아온 것이다. 주민들은 황급히 흩어졌고 오줌을 지렸던 대머리 남성은 반색하며 기어갔다.

“여, 여깁니다, 나으리! 저놈입니다!”

넌지시 언질을 받았는지 경비대를 모조리 이끌고 왔다.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아마 놈이 뇌물을 가득 먹인 2구역 경비 대장이 친히 달려와 준 모양이었다.

“······한심한 놈. 또 무슨 일이냐.”

“살인범입니다! 죄다 죽여 놨다고요!”

“사람 죽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쯧! 경비대! 당장 체포해서 끌고 와!”

돈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체계적으로 행하라 정해 둔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당장 창부터 들이미는 것을 보니 말이다. 검을 집어넣은 나는 경비 대장을 향해 물었다.

“죄목이 뭐지?”

“뭐? 이런 건방진······.”

놈의 얼굴이 순간 불쾌함으로 물든다. 한낱 빈민촌 떨거지가 감히 말을 걸어왔다는 것이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침 불어온 바람이 횃불을 키웠다.

나는 양손을 내밀었다.

“묶어라.”

시끄럽던 소음이 한순간 사라진다. 사방에서 온갖 감정이 뒤섞인 시선이 느껴진다. 경비대는 겨누고 있던 창을 내렸고 오만하던 경비 대장은 할 말을 잃었다.

“뭐하나? 내게 죄가 있다면 어서 물어라.”

털썩!

“검, 검성 각하.”

내 얼굴을 알아본 경비 대장이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수많은 경비대원이 파도처럼 군례를 올렸다. 나는 그제야 손을 내리고 놈을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죄는 네게 있는 모양이구나.”

* * *

불호령이 떨어졌다. 해가 밝자마자 수도 치안을 담당하는 모든 경비 대장이 빈민촌이 있는 2구역으로 몰려와 머리를 박았다. 최소인원만을 남긴 총집결이었다.

가장 먼저 범죄 조직과 결탁했던 2구역 경비 대장과 그 밑에 있던 부장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증거와 증인은 차고 넘쳤고 하나같이 끔찍한 범죄와 연루되어 있었다.

사채업은 기본이다. 빚을 갚지 못한 하층민들은 매춘과 구걸 그리고 강제적 노동으로 내몰려 돈을 빼앗겼고 아무런 죄가 없는 아이들까지 장애로 만들어 구걸을 시켰다.

소매치기, 절도, 강도, 살인, 모든 범죄가 이쪽과 연결되어 있다. 거기다 중죄라고 칭해지는 노예 사업까지 벌였으니 파견된 조사단조차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각하!’

이를 직접 행한 대머리 두목과 패거리는 사형이 확정되었다. 또한, 결탁한 관료들은 즉각적인 직위 해제와 함께 왕국 군법 상 이례적인 교수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모든 것을 왕실의 이름으로 행하라.’

물론 잘못된 일을 바르게 되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왕실은 대대적인 파견을 통해 빈민촌 주민들이 어떤 경로로 들어왔고 또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 꼼꼼하게 조사했다.

빚이 있던 자는 노동자들은 해방되었다. 강제로 매춘을 해야 했던 사람들은 고향과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물론 갈 곳이 없는 자들을 위한 보호소도 건설을 시작했다.

어이! 거기 조심해!

하나, 둘, 셋! 콰르릉!

고용된 노동자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거대한 망치를 이용해 빈민촌을 가리고 있던 지붕과 경계벽을 전부 철거했다. 어두웠던 하늘 위로 드디어 햇볕이 들기 시작했다.

“경, 말씀하신 대로 전부 철거했습니다.”

“수고 많았다. 제대로 삯을 치러 주어라.”

햇빛이 다시 찾아온 빈민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도로 스며들었다. 겨우 지붕과 벽을 허문 것뿐인데, 번화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골목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 이것으로 되었다. 이제 이곳에도 새벽이 찾아올 것이다. 마음의 짐을 덜어낸 나는 기지개를 개운하게 켰다. 그러자 바로 옆으로 소년과 아이들이 다가왔다.

“아, 아저씨······. 아니, 기사님.”

깨끗하게 변한 아이들 모습만큼이나 나를 부르는 호칭도 어느새 바뀌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던 소년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웃어른을 향한 제대로 된 인사였다.

“정, 정말 고맙습니다.”

분노한 기사왕 눈투성이가 직접 나섰다. 아마 녀석은 부모의 빼앗긴 보상과 명예를 되찾을 것이며 부정하게 공적을 취한 자들은 전부 목을 베어 정의를 세울 것이다.

또한, 보호소와 더불어 고아들을 가르칠 학교가 건설되고 있다. 빈민촌 아이들과 훗날 생길 고아들 모두 왕이 직접 후원하는 교육 기관 아래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게 되었다.

새로운 바람이었다. 끝없는 발전만을 거듭하던 북방 왕국은 이 기점을 시작으로 다른 정책에도 관심을 돌리게 될 것이다. 나는 소년과 아이들이 진심으로 기특했다.

“네 부모는 훌륭하신 분이었다.”

나는 자세를 숙여 소년과 아이들의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녀석들이 흘리고 갔던 허름한 동전을 꺼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니 떳떳하게 살아라.”

소년과 아이들이 울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