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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53화 (153/181)

< 153화 >

검은머리 기사왕 153화

빈민촌은 내가 생각했던 규모를 아득하니 뛰어넘었다.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인 ‘넓다.’라는 개념보다는 ‘깊다.’라는 단어를 써도 될 만큼 짙은 어두움이 끼어 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구걸 꾼이 거리에 넘쳐났다. 매춘부는 구역 구분 없이 손을 내밀고 있었고 저 깊은 골목에선 나를 노려보는 탐욕스러운 눈빛이 살의마저 담고 있었다.

무분별하다. 동시에 조직적이다. 아마 손을 집어넣어 파 보면 이보다 더한 더러움이 묻어나올 것이다. 나는 이방인을 향한 관심이 끌리기 전 서둘러 마수를 뿌리쳤다.

뚝.

그리고 빠르게 걷다 보니 어느새 흔적이 끊겨버렸다. 눈앞에는 하필 3~4개가 되는 갈림길이 모습을 드러냈고 지나쳐 온 길보다 짙은 어두움이 저 멀리 깔려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갈림길 앞에는 마침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노파 한 명이 이가 다 빠진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자세를 숙여 남매의 행방을 물었다.

“지나가는 아이를 본 적 없습니까?”

노파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히죽 웃으며 오른손을 내민다. 무언가를 얹어 주기를 원하는 손바닥은 그 의도가 몹시 뻔해 보였다.

툭.

은화 하나를 올려 주었다. 하지만 욕심 많은 노파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검지 하나를 펴 보인다. 피식 웃은 나는 은화 하나를 더 꺼내 끝없는 욕심을 덜어 주었다.

척!

그제야 만족한 노파가 2번째 골목을 가리켰다. 유난히 어두운 골목이다. 나는 고맙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골목으로 들어섰다. 눅눅한 공기가 얼굴을 훅 때렸다.

찍찍.

골목은 점점 좁아지고 조용하기 그지없다. 발아래를 지나가는 시궁창 쥐가 무슨 일인지 나를 비웃는다. 이곳으로 지나갔다고? 의문은 점점 작은 확신으로 변했다.

터벅, 터벅, 뚝.

골목 끝은 작은 공터였다. 하수구가 성벽 밖으로 흘러나가는 이곳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공터로 이어지는 다른 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 새끼냐?”

“네, 형님. 저 새끼 맞습니다.”

남매를 집단 린치했던 녀석들이다. 말없이 도망친다 싶더니 역시 뒷배가 있었던 모양이다. 무리 숫자는 20명 남짓,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대머리 남성이 다가왔다.

“그냥 조용히 지나가셨어야지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 오셨을까. 관료 양반, 영업장에서 죽으면 아무리 왕이라도 못 찾아.”

“영업장이라. 이런 것도 영업으로 치나?”

“하, 시발. 알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이 도시에서 나만 몰랐나 보군.”

주변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린 대머리 남성은 바닥에 걸쭉한 침을 뱉었다. 그러자 주변 놈들이 기다렸다는 듯 퇴로를 가로막았다.

“······죽여. 돈은 가져오고.”

동전 하나 뺏겼다고 우르르 몰려왔을 놈들이 아니다. 역시 본래 목적은 이 묵직한 은화 주머니였다. 지나쳐 왔던 모든 눈이 사실상 감시하는 초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스릉.

놈들이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 보아하니 단순한 주머니칼이 아닌 제대로 된 북방 단검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 고리일까.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훙!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머리를 노린 단검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요령으로 익힌 기술이 아니다. 최소 사람 여럿은 죽여 봤을 진득한 살기가 사방에서 흘러들었다.

“죽여!”

목, 가슴, 배, 허벅지, 사방에서 달려든 패거리가 단검을 찔러 왔다. 하지만 나는 검을 뽑지 않았다. 이런 놈들에게는 검날은커녕 검집을 보여 주는 것마저 아까웠다.

쾅!

달려오는 놈 하나를 노려 배를 발로 걷어찼다. 동시에 내장이 파열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흙먼지가 사방에서 일어난다. 나는 손을 뻗어 당황한 또 다른 놈을 잡았다.

까드드득!

어깨뼈를 박살 내고 한 손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자 달려오던 놈들은 한 대 뒤엉켜 꼴사납게 쓰러졌다. 물론 일어나는 것보다 내가 턱을 걷어차는 게 더 빨랐다.

빠각!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며 몸을 풀자 바닥에는 어느새 대부분 놈이 쓰러져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대머리 남성이 재빨리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깡! 푹!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하지만 그냥 보내줄 리가 없었던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걷어차 놈의 허벅지에 명중시켰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대머리가 털썩 쓰러진다.

꾸욱.

끄아아악!

조용히 다가가 허벅지를 밟아 주었다. 놈은 끔찍한 비명과 함께 살면서 가장 운이 좋지 않았던 오늘을 탓했다. 나는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대머리를 향해 말했다.

“묻는 말에만 답해라.”

“시, 시발 너 누구야! 어떤······. 끄아악!”

버튼을 살포시 지르밟자 시끄러운 잡음이 꺼진다. 대머리는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어느새 아주 착하게 변한 놈에게 물었다.

“누가 용인했고, 누가 눈감았느냐.”

처음에는 증오 어린 눈동자에 끌렸고 나중에는 실태 파악을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이런 놈들을 만나게 되니 북방 내부에 숨어 있는 종양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았다.

높은 확률로 관료 중 일부가 연관되어 있다. 그게 아니라면 빈민촌 소굴 속 범죄가 이렇게 조직적으로 커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참담한 심정을 담아 열심히 밟았다.

“끄, 끄아아아악! 시, 시발! 2구역 경비 대장! 그 새끼야! 우리는 그 새끼밖에 몰라!”

다섯 개로 나눈 수도 구역 중 무려 한 구역 치안을 책임지는 관직이다. 엄청난 고위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나름 결정권을 지닌 중요한 관료 중 하나였다.

빠각!

애매하기에 더 눈에 띄지 않은 건가. 나는 놈의 양쪽 허벅지 뼈를 부러뜨려 불구로 만든 뒤 흙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골목을 빠져나왔다.

딸꾹!

길을 알려 줬던 노파도 빈민촌 수많은 끄나풀 중 하나다. 도망치려다 그 자리에 멈춰선 노파는 식은땀을 흘렸다. 해코지할 생각은 딱히 없다. 나는 잠자코 손을 내밀었다.

스륵.

노파가 받았던 은화 두 개를 얌전히 헌납한다. 그리고 말없이 바라보자 이번에는 남매가 지나갔던 제대로 된 길을 알려 주었다. 나는 작게 혀를 찬 뒤 걸음을 옮겼다.

찍찍!

서서히 해가 진다. 그나마 남아 있던 한 줄기 햇볕이 퇴근하자 숨어 있던 시궁창 쥐가 출근한다. 나는 다행히 빈민촌이 어두워지기 전 판잣집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똑똑.

빈민촌도 급이 있다고 가장 외곽인 지역이다. 그곳에 세워진 외딴 판잣집에선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예의상 노크와 함께 허름한 문을 열었다.

“- - - - - - -.”

녹슨 화로와 함께 다양한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하나 같이 비쩍 마른 아이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낯선 손님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사이에는 낯익은 남매도 있었다.

허억, 허억.

소년은 거적때기 위에 누워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물든 것으로 보아 상처가 덧난 모양이다. 이대로 두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사삭!

안으로 들어선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수많은 아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두려움을 이겨 내고 뭉치는 모습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괜, 괜찮아! 아는 분이셔!”

다행히 동생이 나를 알아봤다.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서 이방인에게 희망을 건 모양이다. 무사히 안으로 들어온 나는 가장 먼저 소년을 살폈다.

“엄, 엄마······.”

헛것을 보는지 무어라 중얼거린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것을 확인한 나는 유난히 부어 오른 오른팔을 발견했다. 아, 오늘 맞으면서 생긴 이 부상이 원인이었다.

우두둑!

아이들이 놀랄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뼈를 맞췄다. 그리고 굴러다니는 나무와 천을 이용해 임시 부목을 만들었다. 나는 깜짝 놀란 동생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안개꽃하고 개털 버섯이 필요하다. 만약 없다면 내일 아침 일찍······.”

“구할 수 있는 곳을 알아요!”

하나는 진통제고 하나는 항생제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인 만큼 아이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반드시 구해 오겠다는 녀석들에게 망설임 없이 동전을 쥐여 주었다.

“빨리 가자! 대장이 아파!”

“아, 아저씨 금방 다녀올게요!”

채비를 끝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굳이 다 같이 갈 필요가 있었나? 졸지에 소년과 홀로 남게 된 나는 입고 있던 로브를 어색하게 벗어 위에 덮어 주었다.

쌔액, 쌔액.

호흡이 많이 안정되었다. 아마 가져온 약재를 먹으면 금세 기운을 차릴 것이다. 나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판잣집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스럭.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눈을 떴다. 끓어오르는 열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텐데 용케 나를 바라본다. 녀석이 처음으로 뱉은 말은 안타깝게도 고맙다는 말이 아니었다.

“······우린 돈 없어.”

“그래 보여.”

“그럼 뭘 원하는데.”

조그마한 녀석이 현실을 좀 안다. 내가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소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홀로 세상을 살았던 자존심이 한낱 동정을 조롱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너 관료지?”

“그래.”

“당신 같은 사람들 잘 알아. 고귀한 척, 대단한 척하지만 정작 진짜 불쌍한 사람들한테는 관심도 없지. 동정이 장신구인 줄 알고 있어. 다들 똑같은 놈이라고.”

제 딴에는 저주를 퍼붓고 싶었던 모양인데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보고 있는 마음만 더 아파질 뿐이었다. 씁쓸함을 삼킨 나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북방을 증오하는구나.

“······우리를 버렸으니까.”

“내게 말해 봐.”

“말한다고 뭐가 바뀌어? 네가 왕이라도 돼?”

“혹시 모르지.”

소년은 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절망하는 이만큼 구원을 바라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녀석도 마찬가지였는지 작게 내뱉은 욕설 뒤로 끝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전쟁에 참전하셨던 군인이셨어. 도대체 왕국이 우리한테 뭐라고 몸도 마음도 다 바친 거야.”

“고마운 분들이구나. 보상이 있었을 텐데.”

“보상? 왕이 준다고 했던 그 보상? 그래, 받을 뻔했지. 부모님 공적을 빼돌린 그 부대장 새끼만 없었으면 말이야.”

죽거나 불구가 된 참전 병사는 모두 보상과 토지를 얻었다. 하지만 소년의 부모님 같은 경우는 부패한 관료들로 인해 공적은 물론 보상까지 억울하게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마침 팽창기였던 왕국은 이런 부정을 신경 쓰지 못했고 아이들은 졸지에 고아가 되어 구걸로 삶은 연명해야 했다. 이 모든 게 굽어살피지 못한 왕실의 잘못이었다.

“······네 말이 옳다. 왕국이 잘못했어.”

나는 왕을 대신해 사과했다. 그러자 모든 것을 토해낸 소년이 이제야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판잣집은 어느새 수십 년이 지난 설움으로 가득해져 있었다.

“쪽팔리게 씨······.”

울음을 터트렸던 소년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욕설로 끝까지 자존심을 챙기며 다시 눈을 떴다. 그 순간 녀석은 당혹함과 함께 내게 물었다.

“뭐, 뭐야. 다들 어디 갔어.”

“약재랑 먹을 것을 조금······.”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늦잖아!”

나보단 소년이 빈민촌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심부름치고는 늦는다고 하면 진짜 늦는 게 맞을 터. 밖은 어느덧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찾아와 있었다.

“일단 업혀라.”

나는 황급히 소년을 업고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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