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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52화 (152/181)

< 152화 >

검은머리 기사왕 152화

난항을 예상했던 엘프 망명 문제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왕의 뜻이 워낙 확고하기도 하고 유능한 재상이 계획부터 실행까지 총지휘를 맡았기 때문이다.

제일 걱정이었던 문제가 해결된 마당에 북방이 망설일 필요가 있겠는가. 거침없이 써 내려간 왕의 서신은 즉각 마르실 사제를 통해 엘프 공주가 있는 서부로 전해졌다.

소문으로는 무척이나 분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엘프들에게 있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오직 이 썩은 동아줄뿐이니, 놈들이 잡거나 뿌리치는 건 언제나 자유였다.

물론 기쁜 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우리를 걱정하게 했던 눈투성이의 속마음을 드디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즉각 재상 기억하는 새와 상담했다.

‘심리적으로 불안하셨을 뿐이에요. 워낙 마음이 여리시고 섬세한 분이니까요.’

‘내가 무엇을 하면 될까?’

‘다른 것을 경험하게 해 주세요. 나이대가 비슷한 인물을 주변에 두는 것도 좋죠.’

의학에 정통한 재상은 거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는 정신과 심리도 연구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스승과 대부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좋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 검술과 공부 말고는 무언가를 해 본 게 없는 눈투성이다.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경험해 보고 나이대가 비슷한 또래와 교류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정말 고맙다, 재상.’

무언가 실마리를 얻은 기분이다. 경지가 올랐을 때보다 더한 충족감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는 오늘따라 포근한 날씨를 만끽하며 그대로 왕실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깡! 깡! 깡!

화르륵!

근 5년 사이 왕실 대장간은 증축과 또 증축을 거듭해 거대한 시설로 거듭났다. 그만큼 수많은 장인과 명품 무기를 배출했으며 명성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전설적인 북방 대장장이 붉은 강철이 있었다. 벌써 수십 년째 전수하고 있는 그의 기술은 왕실 대장간의 정수였으며 미래를 위한 튼튼한 기반이었다.

“오! 부러지는 검!”

하지만 세월은 야속했다. 1세대 영웅이 퇴장하고 새 시대가 찾아오듯 가장 나이가 많았던 붉은 강철은 어느새 백발 할아버지가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요즘 놀고먹고 있다길래 와 봤다.”

대장장이는 망치를 들 힘이 없는 순간 화로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것은 나이를 먹은 붉은 강철도 마찬가지였기에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강철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왜? 아쉽기라도 하냐?”

“아쉽기는. 부러워서 그렇지.”

묵묵히 우리의 뒤를 봐주었던 붉은 강철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뭉클해지는 속내를 애써 숨겼다. 그리고 오랜 친우와 함께 기분 좋게 웃었다.

“아, 맞다. 소개해 줄 녀석이 있어.”

“녀석?”

“그래, 이제야 기회가 생기는군.”

작게 혀를 찬 붉은 강철은 쓰고 있던 두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작업이 한참 진행 중인 대장간 한가운데를 향해 외치자 한 늠름한 북방 청년이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스승님, 부르셨어요?”

북방에선 드물게 보이는 붉은색 머리를 한 청년이다. 그는 강철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분명 스승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순간 두 귀를 의심한 내가 급히 되물었다.

“제자라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외골수이기로 유명한 붉은 강철이 이런 말년에 제자를 들이다니 말이다. 세월이 친우를 변하게 한 걸까. 나는 다가오는 청년과 손을 맞잡았다.

“이,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경! 부디 편안하게 대해 주십시오.”

“나도 반갑다.”

강렬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무척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붉은 강철은 그런 소심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쯧쯧 혀를 찼다.

“이름은 장작 머리다. 2년 전에 입문한 수련생인데 실력이 제법 쓸 만하더라. 내가 은퇴하면 네 검을 봐 줄 검공이 될 거야.”

붉은 강철답게 평이 꽤 박하다. 하지만 말은 저렇게 해도 장작 머리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애틋함이 가득하다. 아마 인성과 실력 면에서 이미 검증이 된 모양이다.

“잘 부탁한다.”

“부탁은 무슨! 아직 배워야 할 것 천지야. 너도 괜히 헛바람 들지 말고 잘 따라와!”

“노,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잘 전수하기를 바란다. 나는 보기 좋은 사제관계를 한동안 바라보다 이내 원래 용건이었던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재상이 직접 지어 준 귀한 약재였다.

“받아. 나는 이만 가 봐야 하니까.”

“오! 물건 잘 받았다. 재상한테 고맙다고 꼭 전해 주고······. 병영으로 가는 길이지?”

“그래, 할 일이 있어서.”

“그럼 가는 길에 이거 하나만 전해 줘.”

붉은 강철은 내게 은화 주머니를 던졌다. 수도 번화가에 있는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후에 치르는 값이 분명했다. 나는 받아줄까 말까 하다가 결국 가방에 넣어 주었다.

“간다.”

볼일은 끝났다. 괜히 바쁜 사람들 잡고 있어봤자 다른 대장장이들만 고생한다. 나는 짧게 손을 흔들어 준 뒤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순간 강철이 외쳤다.

“검성!”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를 부른 붉은 강철 뒤로 일행들이 젊은 시절 함께했던 기억이 천천히 스치고 지나갔다. 환하게 웃은 붉은 강철은 대장간이 떠나가라 외쳤다.

“고맙다!”

무엇이 고마운지는 몰랐다. 항상 고마운 것뿐이었으니까. 미련처럼 걸음을 멈췄던 나는 다시 걸어갔다. 코끝을 맴도는 대장간 냄새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 * *

물건 좀 보고 가세요! 싸고 좋아요!

아줌마! 짐마차 지나가잖아!

수도 스노우가든이 번영함에 따라 가장 큰 이득을 본 지역은 당연히 번화가였다. 북방의 온갖 상업과 문화 기반이 모인 만큼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시장과 가게는 항상 손님들이 붐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열리는 연극과 거리 공연은 삭막한 삶을 풍요롭게 했다. 이 모든 것이 싹트기 시작한 북방의 문화였다.

사각, 사각.

그리고 겸사겸사 번화가를 지나가게 된 나는 갈색 로브를 눌러썼다. 그리고 한 인심 좋은 과일 장수가 건넨 겨울 사과를 맛있게 먹으며 수도 번화가를 구경했다.

구경만으로 재미가 쏠쏠하다. 왕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에 나는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충족했다. 다음에는 꼭 눈투성이와 함께 이 번화한 거리를 구경하러 올 것이다.

찰랑, 찰랑.

마침 저 멀리 붉은 강철이 다녀간 상회가 시야에 들어왔다. 은화 주머니의 묵직한 무게를 느낀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소리가 들려왔다.

퍽!

“- - - - - - - -.”

번화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바쁘고 시끄러웠다. 덕분에 골목에서 들려오는 이런 작은 소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퍽! 퍽!

번화가 좁은 골목은 어두웠다. 하지만 그사이에는 분명 누군가를 둘러싼 그림자가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골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X발! 독한 새끼!”

“손목을 부러뜨려 버려!”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녀석들이 남매로 보이는 소년과 여자아이를 짓밟고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다 같은 허름한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일까. 어쩌면 상황은 뻔해 보였다.

“내놔!”

“끄아악! 나를 물잖아!”

원인은 동전 하나였다. 운 좋게 삯을 받은 남매의 돈을 저들은 갈취하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빠로 보이는 소년은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으아아앙, 오빠!

발목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맞고 있는 오빠를 보며 엉엉 울었다. 결국, 그 광경을 보다 못한 나는 마치 들으란 듯이 인기척을 내며 골목으로 들어섰다.

“대장!”

순간 발길질이 멈췄다. 아직 앳돼 보이는 녀석들은 갑자기 등장한 나를 보며 깜짝 놀랐다. 마치 그들만의 세상에 와서는 안 될 또 다른 이방인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X발, 관료잖아.”

“······다들 돌아가.”

나이가 어린것들치고는 눈썰미가 너무 좋다. 로브 안에 숨겨진 북방 관료 복장을 발견한 녀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골목으로 도망쳐 버렸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쿨럭! 쿨럭!

“오, 오빠! 괜찮아?”

한참 얻어맞던 소년이 거칠게 기침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여자아이가 다가갔지만, 다친 건 둘 다 매한가지다. 나는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다가갔다.

“자, 피부터 닦아라.”

온몸이 멍투성이다. 이렇게 맞은 날이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낀 나는 피를 흘리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닦아 주려고 했다.

탁!

하지만 소년은 매몰차게 손을 쳐냈다. 손짓이 매섭다. 나를 노려보는 눈동자에는 짙은 증오가 섞여 있다. 그렇게 도움을 거부한 소년은 동생의 손을 잡고 뛰어갔다.

“음.”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짓은 아니다. 하지만 살면서 저런 어린 소년에게 증오를 받을만한 일은 한 적은 없었다. 나는 남매가 가지고 가지 못한 동전을 주워들었다.

손때가 묻은 작은 동전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걸린다. 왜냐하면, 소년의 증오가 향한 곳은 내가 아닌 이 로브 속 북방 관료가 입는 옷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과거가 있기에 북방을 향한 증오를 보이는 걸까. 한차례 번화가를 돌아본 나는 떨어진 손수건을 챙겼다. 그리고 남매가 사라졌던 골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터벅, 터벅, 터벅.

높게 올린 가게 건물로 인해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골목 바닥에는 시궁창 냄새가 진동했고 막힌 하수구로는 쥐들이 넘나들었다. 모든 것이 생소한 풍경이었다.

펄럭.

골목 끝이 보인다. 앞을 가로막은 천을 벗겨낸 나는 본능처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진득한 절망의 냄새와 함께 이면 속 숨어 있던 빈민촌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내가 걸어온 더러운 골목을 확장한 것이 바로 이 공간이었다. 개미굴처럼 이어진 골목과 수많은 판잣집. 나는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빛과 어둠.’

겨우 번화가와 200m 떨어진 곳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이 거대한 빈민촌은 기사왕의 책상 위로 올라오지 못한 수도 스노우가든의 어둡고 칙칙한 단면이었다.

가진 자가 있다면 못 가진 자도 있다. 성공한 자가 있다면 실패한 자도 있다. 도태, 소외, 고립, 절망, 문명의 발전은 무릇 인간의 발전만을 뜻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두운 골목을 걸었다.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절망을 맡았다. 현재 내게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수는 있다는 징조였다.

이것이 처음이다.

핑! 팽그르르르.

남매가 놓고 간 동전을 손가락 위로 한번 튕겼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소중하게 챙긴 뒤 옅게 남아 있는 자취를 쫓았다. 그 방향은 남매가 급히 뛰어간 골목이었다.

‘연체하면 큰일 난다!’

붉은 강철의 목소리가 죄책감을 건드렸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양심을 포기한 나는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퇴직금 받지 않는가. 돈은 녀석이 알아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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