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검은머리 기사왕 151화
까다로운 문제에 직면하면 항상 누군가의 지혜를 빌리던 눈투성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인지 눈빛을 총명하게 반짝였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나였다.
“알다시피 대침공이 끝난 지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소중한 형제를 잃었듯 사람들도 수많은 가족을 잃었지.”
겨울 침공은 북방과 동부의 명운을 걸었던 대전쟁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죽은 이들만 묻는 것만 해도 몇 달이 걸릴 만큼 처참했다.
“아픔을 잊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야.”
죽음을 또 다른 여정이라 생각하는 게 전통이다. 하지만 그런 전통을 지키는 북방인들조차 매해 겨울 추모를 위한 등불을 달아 두는데 왕실이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용서하는 건 더더욱 무리겠지.”
은혜와 원수라는 것은 간혹 이해관계를 아득히 뛰어넘을 때가 있다. 서류 위에 적혀 있는 수치가 전부가 아니듯 왕이라면 민심을 헤아리고 보살필 줄 알아야 했다.
내 의견은 여기서 끝이다. 기사왕 눈투성이는 곰곰이 생각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침묵이 찾아오자 가만히 앉아있던 재상이 방긋방긋 웃었다.
“이번에는 제가 악역인가요?”
정해진 답은 없다. 조언은 언제나 반대쪽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는 법이다. 총명한 기사왕을 위해 기꺼이 악역을 맡은 재상은 따뜻한 찻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가끔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있어요. 비록 당장은 욕을 먹을지언정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수십 년 동안 북방 왕국을 운영한 재상 기억하는 새는 시원하게 결정할 때보다 답답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더 많았다.
“이 사안 또한 그래요. 한 가지 이점을 버리고 열 가지 이득을 얻을 수가 있죠. 작게는 서부의 구체적인 근황 정보와 크게는 고도로 발달한 엘프 문명의 흡수까지요.”
접근할 수 없는 서부의 근황 정보와 엘프 문명의 완전한 흡수라. 마음은 아니라고 외치는데 귓가는 솔깃해진다. 그래, 이게 바로 절대적인 이익이 주는 무서움이다.
“대가는 양심이에요, 폐하.”
기사왕 눈투성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 군주이자 모든 백성이 사랑하는 성군이다. 아마 망명을 공표한다면 불만을 품을지언정 따르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하실 능력 또한 충분하시니까요.”
재상이라면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 최대한 넓고 커다란 대계를 그려놓을 것이다. 불멸왕에 대한 대처는 물론 야금야금 뜯어 먹어야 하는 엘프들의 문명까지도 말이다.
“- - - - - - - -.”
조언을 마지막으로 재상은 공손히 인사한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쪽은 의리 또 다른 한쪽은 실리, 이 모든 것은 직면한 기사왕 눈투성이는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고민될 것이다. 나조차도 솔깃했는데 모든 것을 결정할 눈투성이의 고민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선택해야 한다. 왕관이 주는 무게는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후우.
올해 들어 가장 큰 부담감을 느낀 눈투성이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가만히 침묵을 지키는 나와 재상을 둘러보다 정말 우연히 한 사람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팔랑, 팔랑.
얌전히 앉아 있던 검은 화살은 지겨움을 참지 못했는지 손장난을 치고 있다. 나는 검집 깃털을 가지고 노는 그녀를 나무라려 했지만, 먼저 말을 건 이는 눈투성이였다.
“경의 생각은 어떤가요?”
“네, 네?”
검은 화살을 소스라치게 놀랐다. 평소 머리를 쓰는 포지션이 아닌 녀석에게 있어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눈투성이는 편히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다른 생각이 있으신가 해서요. 아무래도 엘프라는 종족을 잘 아시니까요.”
마르실 사제와는 달리 검은 화살은 엘프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다. 어쩌면 가장 중립적인 의견을 내줄 수 있을지 몰랐다. 그 의중은 읽은 녀석은 볼을 긁적였다.
“아, 으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의견은 많을수록 좋으니 적당한 절충안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조언이면 된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하던 검은 화살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꼭 망명을 받아 줄 필요가 있을까요?”
“스승님과 같은 의견이시군요.”
엘프 사회에서 긴 차별을 받아온 검은 화살이다. 북방 그 누구보다 엘프 종족을 싫어하는 만큼 나와 의견이 같나 했다. 하지만 역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다.
“건방지잖아요. 전쟁에서 진 주제에 망명이라니······. 항복해도 받아줄까 말까인데.”
“아!”
순간 눈투성이와 재상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감정이 섞인 작은 푸념 속에서 자신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은 것이다. 눈투성이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우리가 종전을 선언했었나요?”
“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이 야만적인 대륙에 선전포고라는 예의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공식적인 종전 선언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외교적으로 엘프와 우리는 전쟁 중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우리가 이겼죠.”
따지고 보면 패전국인 엘프 놈들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청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외교적인 안배도 전부 사라져 버린 지금 눈투성이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망명이 아닌 항복은 권유하세요. 인도적인 대우를 원한다면 진정한 사과와 유족들을 위한 보상이 필요할 거예요.”
말이라는 게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이다.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난민이 전쟁 포로가 되고 전후 책임자가 법이다. 단호한 명령 앞에 재상은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현명하신 결정입니다, 폐하.”
종족 보존이 최우선인 엘프로선 선택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단어를 하나 바꿈으로써 내부 문제 또한, 해결되었다. 골치 아팠던 국무회의는 여기서 끝이었다.
“경, 정말 좋은 조언이었어요.”
“지혜로움을 숨기고 계셨군요.”
“잘했다, 검은 화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칭찬과 감탄 앞에 검은 화살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녀는 모든 것을 의도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기 시작했다.
솔직히 조금 바보 같았다.
* * *
터벅, 터벅, 터벅.
국무회의가 끝이 나고 복귀하는 길이다. 나는 오랜만에 눈투성이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물론 근위대는 먼저 복귀하게 했기에 주변은 나와 아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유지되었다.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서 후련하기도 했고 마침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수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투성이가 먼저 물었다.
“스승님.”
“음?”
“요즘도 혼인을 위해 찾아오나요?”
“간혹가다 있다.”
한창때는 정말 하루에도 10번씩 결투를 받아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찾아오는 빈도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한 달에 한 명꼴로 도전하는 추세였다.
눈투성이가 푸념했다.
“국서 자리가 그리 탐이 날까요?”
“신부가 예뻐서 일수도 있지.”
“우웩! 스승님, 완전 느끼해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다. 국서라는 직위도 직위지만, 아름다운 겉모습을 보고 달려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 내면에 있는 진정한 고귀함은 보지 못한 채 말이다.
눈투성이가 조용히 물었다.
“스승님은 궁금하지 않으세요?”
“무엇을?”
“제가 이러는 이유를요.”
그래, 솔직히 말해서 궁금하다. 나는 물론이고 왕실과 북방 그리고 동부마저 궁금해하고 있다. 눈투성이가 이토록 혼인 제안을 꺼리며 시도조차 하지 않는지를 말이다.
“네 뜻이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침묵 또한 존중하고자 했다. 내가 아는 눈투성이라면 무언가를 행할 때 반드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나는 그동안 감춰 두었던 속마음을 처음으로 꺼냈다.
“만약······.”
“네?”
“싫다면 내게 말해라. 쑥덕거리는 놈도, 재촉하는 이들도 전부 입을 다물게 해 주마.”
왕이 후계를 정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이 왕국을 지탱하게 하는 의무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내 고향 북방이 아닌 인간 눈투성이를 위하고 싶었다.
“······스승님.”
“그러니 잠시 내려놓아라.”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들고 있던 것을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고통스러웠던 삶을 통해 터득했었던 나는 눈투성이가 같은 길을 밟지 않기를 원했다.
대답은 없었다. 집무실로 향하는 길이 조금 가까워졌다. 문을 바로 앞에 둔 나는 체념보다는 또 다른 계기가 되기를 기원하며 눈투성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녀석이 입을 열었다.
“두려웠어요.”
백색이라 한들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들에게 완벽한 기사왕 눈투성이 또한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면의 두려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무엇이 말이냐.”
“모두 제 곁을 떠나잖아요.”
잠시 잊고 있었다. 나의 시작은 눈투성이와 마주친 그 순간이었지만, 눈투성이의 시작은 지독한 고독이었다. 나는 녀석이 지녔던 결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만큼 아파요. 이 마음이······.”
눈투성이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하지만 야속한 운명은 아이가 사랑하는 것을 전부 데려갔다. 가족도, 친구도, 형제도, 그리고 예정된 나 자신 또한 말이다.
그렇기에 눈투성이는 선택했다. 아프지 않기 위해 사랑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이다. 파르르 떨고 있는 맑은 눈동자 아래 보석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스승님, 왜 떠날 준비를 하시는 거예요?”
아이는 알고 있었다. 내가 세계수 열매를 먹지 않은 것도, 남은 수명을 다음 세대를 위해 쓰려는 것도 말이다. 그것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눈투성이를 초조하게 했다.
“제 곁에 있어 주신다고 했잖아요.”
혼자 걸어갈 길이 아니었다. 떠나는 이보다, 남는 이가 더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나는 지난 과오를 뼈저리게 후회하며 눈투성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왕이 된 이후 편히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오직 둘만이 서 있는 복도에서 기사왕의 눈물을 가려 주었다. 그러자 코를 훌쩍인 눈투성이가 내게 물었다.
“실망하셨죠?”
“아니, 전혀.”
완벽한 인간은 없다. 누구나 결점을 지니고 있고 말 못 할 아픔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모난 구석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성을 완성하는 미완성의 조각이었다.
“천천히 다시 시작해 보자.”
“······처음부터요?”
“그래.”
단추를 잘못 끼웠다면 풀고 다시 꿰면 된다. 걸어온 길이 틀렸다면 되돌아가 다시 길을 찾으면 된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제자에게 해 줄 마지막 수업일지도 몰랐다.
‘고맙다.’
가르쳐 준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 또 한 가지를 배운 나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함께했다. 긴 통로를 지나 함께했던 과거가 스쳐 지나간다.
내가 순풍이 될 테니 너는 돛을 펴라. 인생이라는 풍랑에서 아이는 어른이 될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저 웃음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