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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50화 (150/181)

< 150화 >

검은머리 기사왕 150화

눈코 뜰 새 없었던 순간이 지나 내게도 벌써 다섯 번째 겨울이 찾아왔다. 계절이 변화하는 수많은 사건과 일상 속에 햇수로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버렸다.

‘오크 제국 분열.’

그리고 그동안 대륙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가장 먼저 중앙대륙을 호령했던 오크 종족이 황제 티그막의 후계 문제로 인해 수많은 군벌과 부족으로 나뉘고 만 것이다.

지난 형제들끼리 벌였던 내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나마 정통성이 남아 있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오직 힘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되는 난세가 찾아왔으니까.

하루에도 수백 번씩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오크 제국은 뚜렷한 동맹 구도가 없는 전쟁만을 반복해 왔다.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졌다고 한들 그것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분열된 오크 제국은 더 이상 북방과 동부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었다.

‘엘프 왕국 멸망.’

그리고 지난 침공의 대가는 오크 종족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무려 수천 년 동안 이어지던 고도 문명 엘프 왕국이 타락한 불멸왕 손에 멸망하고 만 것이다.

주신이 되지 못한 놈이 끝내 악신이 되기를 선택할 것일까. 포식을 통해 권능을 얻은 불멸왕은 여왕을 무참히 살해한 것도 모자라 수많은 엘프 영혼을 타락시켜 버렸다.

들려오는 바로는 오염된 땅에 접근하는 것만으로 치료할 수 없는 질병과 정신병에 걸린다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우리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전쟁이 끝난 대륙 정세는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침공을 성공적으로 이겨낸 북방과 동부 왕국은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두 번째 황금시대.’

가장 먼저 수도에 뿌리를 내렸던 세계수가 완전히 개화했다. 스노우가든 전체를 감싸 안은 거대한 수호신은 온갖 축복을 인간에게 내려 북방 땅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휴경지와 비료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축복을 받은 대지는 씨앗을 뿌리는 족족 풍년이었으니 왕국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농경지가 북방 곳곳에 탄생했다.

축복을 받은 북방 인간들은 자잘한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또한, 낮아지는 영아 사망률과 높아진 평균 수명은 자연스레 왕국 성장의 동력인 인구 증가를 불러왔다.

수도 스노우가든은 번화했다. 이름이 있었던 지역은 전부 도시로 증축되었고 새로운 마을 또한 우후죽순 생겨났다. 말 그대로 지도는 매년 바뀌어 가고 있었다.

‘강철 동맹.’

물론 동부라고 이에 뒤처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찍이 잠재력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기술력과 교역 영향력을 바탕으로 왕국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켰다.

특히 강철과 불을 다루는 제련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우리 인간을 원수라고 생각하는 오크 종족들조차 동부산 강철 무기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다.

이렇듯 북방과 동부는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분야가 나날이 발전해 오롯한 인간 문명을 꽃피웠다. 그것은 감히 첫 번째 황금시대를 넘었다고 평할 만큼 찬란한 시기였다.

그리고 왕국과 평화가 밀알처럼 잘 무르익을 시기 때마침 경사가 찾아왔다. 소녀에서 왕이 되었던 눈투성이가 드디어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성인이 된 것이다.

‘봉우리가 꽃을 피웠구나.’

그날만큼은 모든 것이 조용했다. 수도 시민 전체가 바라보는 왕궁 앞에 엄숙한 성인식이 거행되었고 나는 작아진 왕관을 손수 벗겨 새로운 왕관으로 교체해 주었다.

무려 세계수 잎으로 만든 월계관이다. 눈투성이가 웃으면서 그 관을 받아들이자 세계수는 기쁘게 가지를 흔들었고 자리에 모인 모든 시민은 벅찬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 - - -!!

세상과 모든 이들이 올려다보는 자리에 선 기사왕 눈투성이는 아름다움과 강직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무(武)명과 걸맞은 운명, 바야흐로 진정한 인간의 왕이었다.

‘후계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5년 사이 이처럼 기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눈투성이가 성인이 되자마자, 잠시 미뤄두고 있었던 기사왕의 후계 문제가 발목을 붙잡고 만 것이다.

관료와 시민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하면 이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북방이 사랑하는 눈투성이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고 지난 전설을 만들어낸 계기이기도 했으니까.

만약 후계를 정한다면 왕의 자식이어야 하는가? 아니라면 상징과도 같은 검은 머리여야 하는가? 혹은 선왕의 유훈을 따라 검성이 정한 다른 후계여야 하는가.

온갖 갑론을박이 있었다. 물론 그 이야기는 눈투성이의 귀까지 들어왔지만, 자애롭게 웃고 넘겼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왕실을 향한 혼인 제의가 온 것이 말이다.

‘저희 가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폐하.’

간혹 사람은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법이다. 왕의 자애로운 웃음을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한 북방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숙이며 열렬히 구혼했다.

전쟁 영웅이 세운 신흥 가문부터 앞날이 창창한 젊은 기사들까지, 한때 눈투성이가 지나는 길은 꽃과 선물 그리고 젊은 청년들이 사랑을 노래한 구애 편지들이 가득했다.

‘조건을 걸겠어요.’

하지만 눈투성이는 그 모든 제의를 가볍게 거절했다. 그리고 혹여나 이유를 물어볼 것을 염려했는지 왕실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딱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저희 스승님을 이기고 오세요.’

성인이 된 기사왕은 나를 스승이자 대부라고 불렀다. 혼인 제의는 당연히 아버지 허락이 있어야 하는 법, 기사의 땅인 북방답게 모든 것은 검으로서 말하게 되었다.

‘경! 제발 혼인을 허락해 주십시오!’

‘죽어라.’

‘왕국의 훗날을 위하여······.’

‘너는 두 번 죽어라.’

왕실을 찾아오는 족족 박살을 내주었다. 물론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기에 코피를 터트리는 것으로 끝냈지만, 감히 우리 눈투성이와 탐낸 죄는 톡톡히 받아야 했다.

‘아!’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100명이 넘는 청년을 눕혀놓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나는 그게 실수였다는 것을 알고 말았다.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

허스칼 푸른 손이 먼저 떠나고 그 뒤를 거친 귀리와 회색 늑대가 따라갔다. 한때 북방군 주축이었던 퇴역 기사는 전원 죽거나 은퇴했으니 사실상 빈 자리가 더 많았다.

내년에는 붉은 강철이 건강 문제로 은퇴할 예정이다. 내 나이도 이제 훗날을 생각해야 할 때고 또 다른 1세대 영웅인 재상 기억하는 새와 검은 화살 또한 불멸이 아니다.

말 그대로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1세대 영웅이 아닌 끝까지 눈투성이를 보좌하고 새 시대를 열어갈 다음 영웅들을 말이다.

물론 이 생각은 세계수 열매를 거절했을 때부터 품고 있었지만, 실행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어쩌면 눈투성이 곁을 떠나기 싫은 나의 미련한 욕심일지도 몰랐다.

“집중해, 검성.”

그 순간 상념에 빠진 귓가로 누군가 속삭여왔다. 간지러움에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옆을 바라봤고 이내 히히 웃음을 짓고 있는 검은 화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애냐?”

“나는 아직 젊으니까 괜찮아!”

“하하.”

세월이 체감되는 인간과는 달리 검은 화살은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정말 당당하게 외치는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두 분 다 집중하세요.”

“음.”

웃는 소리가 시끄러웠던 모양인지 보다 못한 재상이 나서 우리를 나무랐다. 지금이 알현 대기 중이란 것을 깨달은 나와 검은 화살은 빠르게 표정을 관리했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왕좌 위에 앉은 눈투성이가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었다. 졸지에 눈을 마주쳐 버린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웠다.

탁, 탁.

“마르실 사제가 만남을 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정되어있던 국무회의가 진행되었다. 이번 회의는 정치 망명인이자 불멸왕의 위협을 경고했던 엘프 마르실의 공식적인 알현이 있었다.

“기사왕 폐하를 뵙습니다.”

그동안 공을 인정받은 그녀는 엘프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북방 관료로 살아가고 있었다. 세계수를 모시는 사제답게 성지를 관리하는 일에 빠삭했기 때문이다.

“만나서 반가워요, 마르실 사제.”

밝은 표정을 보아하니 그간 북방에 잘 녹아들었던 모양이다. 그녀를 기특하게 여긴 기사왕 눈투성이는 밝은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왕과 신하는 수직 관계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성향이 자유로운 북방 왕국 특성상 군신 관계가 그리 딱딱하지 않았다. 왕은 매번 관료를 만나듯 똑같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알현을 청했나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마르실 사제는 다시 한번 부복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를 표하며 다른 사심이 없음을 밝혔고 이내 서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서부와 관련된 일입니다, 폐하.”

현재 북방에서 엘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자는 다름이 아닌 마르실 사제였다. 그것을 잘 아는 눈투성이는 그녀에게 일찍이 서부와 관련된 첩보 임무를 명령해 둔 상태였다.

“이쪽으로 가지고 오세요.”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서부 정세다. 1세대 영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물린 눈투성이는 조심스럽게 서신을 받았다. 동시에 반듯하던 미간이 조용히 찡그려졌다.

“공식적인 요청인가요?”

“맞습니다, 폐하.”

엘프는 북방을 침공한 적이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외교와 교류는 청하지 않았으며 5년이 지난 지금도 암묵적인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망명 요청이네요.”

하지만 유일한 소통 창구인 마르실 통해 갑작스러운 망명 요청이 전해졌다. 최후의 요새로 내몰린 엘프와 귀족들은 물론이고 그동안 정체를 몰랐던 한 인물까지 말이다.

‘엘프 공주, 엘레나.’

살해당한 엘프 여왕의 엘렌도르의 친손녀이자 남은 엘프 세력을 이끄는 지도자라고 쓰여있다. 어떻게 버티고 있었나 했더니 왕가의 후손이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뻔뻔하군요.”

그리고 그 서신 앞에 눈투성이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엘프를 향한 뜨거운 증오 앞에 마르실 사제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박으며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그대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공은 공, 사는 사다. 마르실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손짓한 눈투성이는 재상을 향해 서신을 내밀었다. 그 서신에는 왕가 직인과 함께 세부적인 내용이 쓰여있었다.

공주와 귀족들이 주장하는 것은 간단했다. 유일한 퇴로인 북방 바다를 통해 엘프 난민을 받아주고 타락한 불멸왕과 공동 전선을 펼치자. 말 그대로 뻔뻔한 요구였다.

하지만 동시에 쉬이 넘기지 못할 제안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불멸왕이란 존재는 한때 북방을 위협했던 적이자 인류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경들 생각은 어떻나요?”

눈투성이는 우리의 지혜를 빌리고자 했다.

작가의말

곧 완결이냐고 묻는 독자님들이 계서서... 아직 완결 아닙니다. 눈투성이가 크는 것도 보고 가셔야죠. 개인적으로 북방과 동부 수복이 1부, 대침공이 2부, 지금 이 내용이 3부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200화쯤 되겠네요. 알찬 내용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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