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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48화 (148/181)

< 148화 >

검은머리 기사왕 148화

오크 군단은 패배했다. 단순히 한 차례 전투나 포괄적인 전쟁이 아닌 대륙 패권을 내주는 완벽한 패배였다. 그만큼 오크 황제 티그막의 죽음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군단의 대대적인 퇴각이 시작되었다. 분명 싸울 여력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황제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오크 종족은 머리를 잃은 뱀처럼 올바른 길을 찾지 못했다.

놈들은 갈라지고 또 갈라졌다. 복수를 원하는 자, 안위를 원하는 자, 또는 본토로 돌아가기 원하는 자들이 의견을 대립했다. 물론 그 대립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누가 오크를 이끌 것인가?’

오크 황제 티그막은 자식이 없었다. 심지어 지난 대숙청으로 3황자를 포함한 모든 형제를 참수하거나 암살했기에 사실상 오그르의 직계 자손은 끊겼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멸문이 아닌 애매한 정통성에서 발생했다. 오그르는 수많은 자식과 첩이 있었던 만큼 방계라고 부를 수 있는 형제와 친척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다음 황제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세대를 타고 내려온 핏줄은 마치 거미줄과도 같으니, 족보로 돌아본 가문은 황제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수많은 오크가 잊고 있던 명분 하나를 깨달은 것이다.

위아래로 흐른다고 다른 물이겠는가? 흐름을 주도하는 조류만이 앞서 흘러가는 법이다. 퇴각하는 군단에는 어느덧 큰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부월이 보이지 않는가! 황제께서 내게 친히 내리신 거다! 똑똑히 보라!”

힘은 또 다른 명분이었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이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오크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황제 티그막이 내린 부월로 자격을 증명하고자 했다.

“보이기는 하는데.”

하지만 자식을 남기지 못한 선왕이 허무하게 죽은 마당에 그 부월이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동안 묵묵히 입을 다물었던 족장들은 처음으로 불만을 표했다.

“진짜인지 증명할 방법이 있소?”

말만 번지르르하지 다 같은 욕망을 품고 있다. 그동안 자치권을 포기해야 했던 대족장 무리는 이번 기회에 뺏긴 이권을 되찾고자 황제 티그막이 내렸던 부월을 부정했다.

“무, 무어라! 감히!”

티그막이 살아 있을 때는 찍소리조차 못 하던 겁쟁이 놈들이다. 그들을 우습게 본 오크 영웅은 금방이라도 오러를 휘두를 듯 다가가 대족장 무리를 노려보았다.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요?”

하지만 족장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수많은 서전트와 전사를 뒤로 둔 채 정면으로 대립했다. 당황한 것은 도리어 기세등등하던 오크 영웅 쪽이었다.

“놈······!”

아무리 막강한 무력을 지녔다고 한들 이 많은 서전트와 전사를 상대할 수는 없다.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오크 영웅은 족장의 목을 쉽사리 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군단이 아니오.”

망설임을 읽은 족장들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마지막 회의가 되어 버린 천막을 빠져나와 각자의 부족으로 돌아갔다. 그 행동은 대규모 이탈을 예고하는 시발점이었다.

“본토로 돌아간다.”

그나마 유지하던 제국의 결속이 끊겼다. 무너진 협곡 관문을 앞두었던 오크 군단은 각 부족, 군벌, 탈영 집단으로 찢어져 본토로 돌아가거나 평야를 떠돌았다.

‘제국 분열.’

물론 그 여파는 중앙대륙인 본토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황제의 자식들이 패권을 다투었던 내전과는 차원이 다른 분쟁이 사실상 제국을 수백 개로 갈라 놓으려 했다.

* * *

불멸왕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북방 바다를 떠돌던 엘프 여왕은 즉각 퇴각을 명령했고 엘프군을 태운 원정 선단은 서부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험난한 여정이었다. 전쟁에서 반절이 죽고 돌아오는 길에 또 반절이 죽었다. 식량과 식수는 턱없이 부족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돌림병은 원정군 전체를 병들게 했다.

하지만 힘겹게 도착한 서부라고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수호신이었던 세계수가 사라지자 엘프 왕국은 연이은 흉년과 끔찍한 재앙으로 쑥대밭이 된 것이다.

오만의 대가였을까 아니면 배교의 죗값이었을까. 불멸왕을 새로운 신이라고 믿고 따르던 엘프 종족은 절망했다. 서부에는 오직 죽음의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배급 물자가 전부 떨어졌습니다, 폐하.”

“여왕 폐하! 귀족 대표가 뵙고자 합니다!”

누군가는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온갖 아우성과 원성의 대상이 된 엘프 여왕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었다. 그리고 얼굴이 수척한 신하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일단 왕실 재산을 이용해 필요한 물자를 지원해라. 찾아온 귀족 대표에게는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알현할 수 없다고 알려라.”

“······알겠습니다, 폐하.”

“혼자 있고 싶구나. 나가들 보아라.”

여왕이 내리는 지시는 대부분이 임시방편이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이것이 최선임을 알기에 씁쓸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화려하던 왕궁은 어느덧 황량함만이 남아 있었다.

하아.

엘프 여왕은 왕좌 위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침침한 눈을 감으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한숨에는 피곤함과 더불어 온갖 후회가 섞여 있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자신은 그저 왕국을 불멸하게 엘프를 위대하게 만들려고 한 것뿐인데 모든 것이 실패를 넘어 파탄하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꾸욱.

검성! 기사왕! 모두 그놈들 때문이다. 증오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 앞에 엘프 여왕은 주먹 쥔 손을 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조용하던 왕실 문이 급히 열렸다.

덜컹, 쾅!

“여왕 폐하!”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불멸왕 폐하가 돌아오셨습니다!”

실종되었던 불멸왕이 돌아왔다. 그 보고에 두 눈을 크게 뜬 엘프 여왕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엘븐 가드 단장의 안내를 따라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터벅!

그래, 반신 그 자체인 불멸왕 폐하가 그리 쉽게 죽을 리가 없다. 그동안 초조한 심정으로 소식을 기다리던 엘프 여왕은 저 멀리 보이는 왕실 항구에 도착했다.

“으음?”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겨우 배 한 척이었다. 위풍당당하던 엘븐 가드들은 어디다고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위태로운 선박 한 척만이 서부로 복귀한 것이다.

끼이익, 철썩.

유령선이나 다름없는 갑판 위 왕좌에는 불멸왕으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순간 이질적인 기운을 느낀 엘프 여왕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를 불렀다.

“불멸왕 폐하······?”

화려한 갑옷과 검은 보이지 않는다. 황금처럼 찰랑이던 머리는 새된 회색으로 변해 있었고 피부 또한 목 아래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변화한 불멸왕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틀렸다.”

그 말을 들은 엘프 여왕은 순간 측은함을 느꼈다. 뼈아픈 패배를 겪은 불멸왕이 죄책감을 느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아래 무릎 꿇은 그녀는 왕을 위로하려 했다.

“너희를 믿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마주한 불멸왕은 엘프가 아는 반신이 아니었다. 회색 머리, 회색 눈동자,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여왕과 마주한 불멸왕은 자신이 아닌 종족을 질책하고 있었다.

“쓸모없는 것들.”

“- - - - - - -!!”

엘프 여왕은 눈동자 너머에서 끔찍한 괴물을 보았다. 이건 자신이 아는 불멸왕이 아니었다. 순간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 그녀는 검집 위에 손을 올려두며 외쳤다.

“네, 네놈은 누구냐.”

회색 늑대에게 당했던 상처는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엘릭서가 필요할 만큼 극심했던 내상은 도대체 어떻게 치료한 것일까. 불멸왕은 입가를 올려 웃었다.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구나.”

몸에서 오러가 새어 나온다. 그 오러는 마치 시꺼먼 늪을 파헤치고 또 파헤쳐 진창과 함께 꺼낸 심연과 같은 색이었다. 엘븐 가드들은 본능적으로 검을 뽑으려 했다.

“내가 신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서걱! 서걱!

컥! 끄르륵.

순식간이었다. 검을 뽑지도 않은 불멸왕은 오러로 이루어진 검을 휘둘러 엘븐 가드 부대를 참살했다. 그 과정은 겨우 찰나, 엘프 여왕은 살기 위해 오러를 뽑았다.

쿵! 쨍그랑!

하지만 너무나 가볍게 오러와 검을 깨트린 불멸왕은 엘프 여왕의 목을 잡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오러 앞에 한낱 필멸자인 그녀는 너무나 무력해졌다.

“어, 어떻게······. 컥!”

이해할 수 없다. 믿을 수 없었다. 눈동자 뒤에 도사리는 어둠을 엿본 엘프 여왕은 불멸왕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목이 잡힌 그녀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처음부터 이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신체와 영혼을 구성하는 근원이 빨려 들어간다. 여왕은 반항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광기 어린 웃음을 짓고 있는 불멸왕은 그런 반항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치지지직!

세계수를 통제하고 흡수하던 능력이다. 불멸왕은 그 능력을 동족인 엘프에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자행의 대가는 영혼을 더럽히는 타락(墮落)이었다.

“하하하하 - - - -!!”

더 이상 세계수는 필요 없다. 그 열매를 대신할 자는 수없이 많으니까. 이미 수십 명의 엘븐 가드를 집어삼켰던 불멸왕은 끝내 신실한 엘프 여왕까지 죽이고 말았다.

털썩.

여왕은 절명했다. 그녀가 지니고 있던 파릇파릇한 생명력과 오러는 고스란히 불멸왕이 가지고 왔다. 그러자 목 아래 멈춰 있던 검은 피부는 놈을 완전히 물들였다.

우르르르, 척!

“불, 불멸왕 폐하?”

“여왕 폐하가 시해당했다!”

이변을 눈치챈 근위대가 서둘러 왕실 항구를 찾아왔다. 그리고 처참하게 죽어 있는 엘프 여왕 앞에 당황하며 검을 뽑았지만, 그들 또한 좋은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라, 아이들아.”

츠즈즈즈즈즉.

불멸왕이 검은 피와 구정으로 물든 입을 열자, 세계수를 통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권능이 발현되었다. 그 권능은 동족 포식을 제물로 바친 사념체 소환이었다.

“으, 으아아······!”

“지원군을 불러! 빨리!”

깊고 어두운 곳에서 괴이한 존재가 기어 나왔다. 타락한 영혼을 투영한 그 사념체 무리 앞에 왕실 근위대는 겁에 질려 도망치거나 사지가 처참하게 잘려 나갔다.

끼기기기기긱!

서걱! 콰직!

학살극이 벌어졌다. 불멸왕이 양손을 피로 물들 수 있을수록 그 힘은 더 강해졌고 사념체 숫자 또한 끝없이 늘어났다. 그 모습은 가히 언데드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었다.

언데드, 불멸하다.

“나를 죽음이라 부르라.”

불멸왕은 그제야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꺄아아아악!

엄, 엄마! 엄마!

왕궁이 불타올랐다. 수도 시민은 몰려오는 사념체 손에 학살당했고 사지가 잘린 시체는 양분이 되었다. 전례가 없었던 반신의 타락은 수도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까악! 까악!

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은 귀족과 엘프들은 수도와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영주들과 함께 힘을 모아 타락한 반신에게 끝까지 저항하고자 했다.

‘다크 엘프.’

모든 것은 연쇄적이고 상대적이었다. 북방과 동부 인간이 유례없는 평화를 쟁취한 사이, 오크 제국은 분열했으며 엘프 왕국은 항거할 수 없는 재앙을 맞이했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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