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검은머리 기사왕 147화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붉은 진창이 물든 평야 한가운데를 걸어 시체들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곳에는 흰 뿔 사슴 검은 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르륵!
녀석이 반갑게 투레질한다. 하지만 이미 생을 다한 녀석은 눈을 반쯤 뜨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피로 물든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흰 뿔 사슴 중 유난히 체구가 작았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사슴보다 용맹했으며 또한 영리했다. 만약 검은 코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달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미안하다.”
무리한 요구만을 했고 항상 신세만 졌던 파트너다. 나는 어머니 곁으로 떠나려는 형제를 향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러자 검은 코는 피투성이 손을 핥으며 이리 물었다.
‘어때, 내가 최고였지?’
어머니 북방의 안배가 끝났다. 이미 숨이 끊긴 검은 코는 평온한 얼굴과 함께 형제들 곁으로 떠나갔다. 빛을 잃어 가는 눈동자. 나는 눈꺼풀을 감겨 주며 대답했다.
“······그래, 바람처럼 빨랐다.”
마지막 이별이 끝이 났다. 어머니 북방을 향해 짧게 기도한 나는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눈투성이가 내 어깨를 부축해 주었다.
“스승님.”
내가 작아진 건지, 아니면 녀석이 성장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그리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몸을 기댔다.
터벅, 터벅.
평야는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전쟁이 종식된 겨울은 아무런 변화 없이 눈 결정을 뿌리고 있었다. 무심코 옆을 바라보자 눈투성이가 눈물로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슬프냐.”
“슬프지 않아요.”
눈투성이는 맑은 눈동자를 깜빡인다. 그리고 전장을 떠나고 있는 수많은 영혼과 빛나는 사념을 배웅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 눈물은 한 꺼풀 벗어낸 허물이었다.
명예로운 전장이 있다면 이곳이다. 그리고 숭고한 죽음이 있다면 저들일 것이다. 눈투성이는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것은 기쁨 어린 눈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기사왕 폐하.”
“······폐하.”
우리는 고요한 전장을 건넜다. 살아남은 동맹군 기병대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뒤를 따라왔다. 어느덧 흩어졌던 무리는 하나가 되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 - - - - -.”
멀게만 느껴졌던 도시 쿠트나가 바로 앞에 있었다. 무너진 성벽 폐허에는 수많은 시민과 동맹군이 왕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눈투성이를 향해 말해 주었다.
“네가 지킨 자들이다.”
용기와 신념이 동부의 운명을 바꾸었다. 작고 여렸던 시골 소녀가 우리가 지키지 못했던 기사도를 끝내 수호해 낸 것이다. 나는 부축에서 벗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 - - - - - -!!”
저 뒤에서 한차례 소란이 들려왔다. 부동을 유지하던 동맹군은 기다렸다는 듯 양옆으로 물러났고 이내 동부왕 리처드와 그의 아내 까마귀 헬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헉!
급히 뛰쳐나온 그 둘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나는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척! 척!
그 순간 모든 동맹군이 기다렸다는 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하늘 아래 가장 지고한 자가 누구인가. 이들이 표하는 모든 경의는 기사왕을 위해 바치는 찬사였다.
“북방은······!”
오크를 향해 돌격한 기병대 중 살아남은 이는 겨우 수십이었다. 동부를 지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은 것이다. 초연함을 마주한 헬레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동부 형제여.”
기사왕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동맹군을 지나쳐 리처드와 헬레나 앞에 걸음을 멈췄다. 환하게 웃은 눈투성이는 리처드 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맹세를 지켜주어 고맙습니다.”
동부와 북방은 함께 싸웠다. 지난 위기도 앞으로 있을 위험도 서로가 쌓은 믿음으로 이겨 낼 것이다. 손을 내민 눈투성이 앞에 리처드는 투구를 벗으며 외쳤다.
“아니요.”
리처드는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헬레나와 함께 한쪽 무릎을 꿇으며 지고한 자만이 바로 서 있게 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기사왕 눈투성이를 올려다보았다.
리처드가 고개를 숙였다.
“내 경의를 받으세요, 기사왕.”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선왕이 그토록 바라던 광경을 보고 있자니, 눈이 시려온 탓이다. 기나긴 암흑을 지나 마주한 그들의 시대는 떠오른 태양처럼 찬란했다.
* * *
깊은 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한참 조용해야 할 수도 스노우가든 앞에는 북방 시민군이 모인 임시 집결지가 바삐 출정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하아.
그 누구 하나 편히 잠을 잘 수 없는 밤이다. 거의 일주일 만에 자택으로 돌아온 재상 기억하는 새는 창밖으로 보이는 집결지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출정을 기다리는 시민군 대부분은 너무 늙거나 너무 어린 병사들이었다.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쥐어짜 모집한 병력이기에 이런 극단적인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동부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병력이 필요했고 한계가 온 북방이 보낼 수 있는 추가 지원군이라고는 이런 급조한 병력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제대로 된 무장을 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얼굴이 수척하다 못해 까맣게 죽어 버린 재상은 괜히 비어 있는 전서구 통만을 매만지고 있었다.
“- - - - - - - -.”
출정한 동부 지원군과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일주일하고도 반나절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나마 유지되던 연락선이 길어지자 전령도 전서구도 더 이상 오지 않은 것이다.
검성은 괜찮을까. 폐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추가 지원군을 편제하는 바쁜 와중에도 재상 기억하는 새의 마음은 저 머나먼 동부를 향하고 있었다.
비틀.
또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과로와 불면증으로 인해 병이 재발한 듯하다. 하지만 재상은 차갑게 식은 차를 마시는 것을 끝으로 다시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아프다고 쉴 틈이 없었다. 자신이 안전한 후방에서 목숨을 안위하는 사이 검성과 폐하는 적과 싸우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지원군을 보내 도움이 되어야 한다.
사각, 사각.
일단 무장과 보급은 끝났으니 준비되는 대로 출정할 일만이 남았다. 최종재가를 내린 재상은 해안요새를 지키고 있는 검은 화살을 향해 마지막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
하지만 그 순간 잠들었다고 생각한 딸 오목눈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사이 무럭무럭 자란 아이는 혼자 집무실을 찾아올 만큼 수도 생활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오, 오목눈이니?”
딸의 목소리를 듣는 날보다 잠든 얼굴을 보는 날이 더 많았던 그녀다. 깜짝 놀란 기억하는 새는 벽을 더듬거리며 다가오는 친딸 오목눈이를 서둘러 끌어안았다.
“시끄러워서 깼구나.”
“으응, 아냐.”
평소 생각이 깊은 아이다. 아마 어머니이자 재상인 엄마가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슬픈 얼굴을 한 오목눈이는 그녀의 소매를 꼭 움켜잡았다.
“엄마 우리 정말 산으로 돌아가요?”
“······선생님이 그리 말했니?”
“아니요, 애들이 알려 줬어요.”
현재 북방은 바람 앞의 촛불이다. 그 분위기는 왕실은 물론이고 저 민간 지역까지 넓게 펴진 상태였다. 아마 수업을 듣던 오목눈이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저는 돌아가기 싫어요.”
딸아이가 울먹였다. 그 눈물 앞에 기억하는 새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몰려오는 복잡한 감정 앞에 처음 든 감정은 바로 지난 과거와 후회였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었다.’
젊었을 적 그녀는 소중한 사람을 더 이상 잃기 싫었다. 그렇기에 비겁한 배신임을 알면서도 북방과 검성을 배신했고 딸아이와 함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이 위험한 세상 속 오목눈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과 단절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신만의 멍청한 착각이었다.
“엄마랑 함께 있는 이곳이 좋아요. 폐하도, 삼촌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좋아요. 우리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새는 새장을 벗어날 때 날아가는 법이다. 깊은 산속에서 태어난 오목눈이는 좋은 어른과 친구를 만나는 드넓은 하늘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틀렸었다. 자신이 지켜야 했던 것은 새장이 아닌 딸아이가 훨훨 날아오를 하늘이었다. 막연하던 현실 속을 방황하던 기억하는 새는 한 가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 떠나지 말자.”
기사왕을 믿고 검성을 믿는다. 딸아이를 꼭 끌어안은 그녀는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안심한 오목눈이는 소매를 꼭 부여잡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스륵.
늦은 새벽이다. 애틋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본 기억하는 새는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내일 아침 일찍 출정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지금 잠을 자 둬야 할 것 같다.
파르륵!
“······?”
하지만 그 순간 유리창이 흔들리는 창밖으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얼떨결에 바라본 그곳에는 어둠을 헤매던 비둘기 한 마리가 등불 근처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추운 겨울에다 어두운 밤이다. 이런 상황에 비둘기가 날아다닐 리가 없다. 하지만 등불 근처에 앉은 비둘기는 마치 창문을 열어 달라는 듯 부리를 콕콕 쪼고 있었다.
길을 잃기라도 했나? 보통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도착하는 전서구가 웬일로 늦은 밤에 찾아왔다. 오목눈이를 끌어안은 그녀는 천천히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구르륵. 구구!
창문을 콕콕 쪼던 비둘기가 전서구 새장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듯 녀석의 오른쪽 다리 끈을 푼 재상은 서신을 받아들었다. 발신지는 다름 아닌 백색 관문이었다.
“으음······.”
창문을 열어 놔서 그런지 찬 바람이 들어온다. 품에 안겨 있던 오목눈이는 몽롱한 얼굴로 몸을 뒤척였다. 기억하는 새는 무슨 일인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톡!
그 순간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이마에 물이 떨어진 오목눈이는 잠결에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버릇처럼 만지던 엄마의 얼굴과 함께 흥건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엄마, 울어?”
“으응.”
“슬픈 거야?”
“아니, 기뻐서.”
어린 오목눈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기쁜데 왜 울고 있는 걸까. 눈물은 떨어지고 또 떨어져 얼굴을 적셨고 오목눈이는 아무 말 없이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백색 관문에서 전함.]
그날 새벽 소집된 시민군은 임시 해체되었다. 동시에 재상이 받은 서신은 북방 전역으로 전해졌으며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찾아온 아침과 함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 - -!!
흐윽, 흑. 만세!
함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서로를 끌어안은 사람들은 인간이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한 세상이 끝내 찾아왔음을 실감했다. 모든 것은 한 통의 서신으로 끝이 났다.
[강철 동맹군의 승리.]
길었던 전쟁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