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검은머리 기사왕 146화
후우.
입을 벌리고 숨을 내뱉는다. 그러자 농후한 숨이 입김이 되어 퍼져나간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과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가는 시야. 변화를 느낀 나는 본능적으로 외쳤다.
“산개하라!”
오크 진영에서 발사된 화살이 앞서 달려오는 기병대 선두를 노렸다. 하지만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동맹군 기병대는 사방으로 산개하며 화살을 피해냈다.
피이이잉!
머리 바로 옆으로 화살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나는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려 적진을 살폈다. 마침 진영 후방에는 흙먼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 - -.
예상대로 우리를 요격하기 위한 오크 중기마대가 진영을 빠져나왔다. 그 움직임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빠르게 선두 속력을 올려 기사왕 눈투성이 옆을 스쳐 지나쳤다.
“부탁한다!”
“조심하세요!”
검은 코와 하얀 바람이 방향을 튼다. 동맹군 기병대는 각 선두를 따라 두 갈래로 나뉘었고 그 휑한 빈자리는 뒤늦게 발사된 화살만이 허무하게 꽂히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흥분한 검은 코가 연신 투레질했다. 저 멀리 달려오기 시작한 오크 중기마대를 경계한 것이다. 그만큼 놈들의 머릿수는 아군 기병대를 월등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지금부터는 뒤따라오는 아군을 믿고 적 기마대를 상대해야 한다. 내가 검을 뽑아 자세를 숙이자 검은 코는 기다렸다는 듯 바닥을 박찼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선두로 달린다. 또 달린다. 뒤따라오는 아군과 거리가 점점 벌어진다. 그와 반대로 마주 보고 달려오는 적 기마대와의 거리는 빠른 속도로 좁혀지고 있었다.
집중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나는 검은 코가 내뱉는 숨과 박동 그리고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드넓은 평원은 하얀 도화지가 되고 내 검은 검은색 먹이 되었다.
척!
100m 앞이다. 말과 몸을 온통 강철로 뒤집어쓴 놈들이 창을 내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움직이는 강철 성이요, 적을 보이는 족족 찢을 것만 같은 강철 마차였다.
다각! 다각! 다각!
하지만 균열이 보인다. 숨을 스으 들이켠 나는 검을 들었다. 균열을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깨져나가는 법이다. 검을 조용히 겨눈 나는 연장선을 휘둘렀다.
서걱!
아름다운 사선이다. 목과 몸통을 노리는 강철 창이 단 한 번 휘두름으로 양단된다. 물론 그 뒤에 오크와 말 또한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나는 선을 가르는 선이었다.
후웅, 서걱! 쾅!
피하고 휘두른다. 거슬리는 인마는 검은 코가 뿔로 꿰뚫는다. 영원히 뚫리지 않을 것 같던 적 중기마대는 비틀어졌다. 거기에 뒤이은 하얀 여파가 놈들을 집어삼켰다.
두두두두두 - - -!!! 쾅! 콰직!
서걱! 히히히힝!
내 뒤를 따라온 아군을 기병대가 갈라진 균열을 비집고 들어간다. 질량과 부피 돌파를 억제한 시너지는 한순간 폭발했다. 오크 중기마대는 말 그대로 찢어 발겨졌다.
푸르륵! 쾅!
히히히히힝!
한때 오크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북방 기병대가 뒤늦은 전성기를 되찾았다. 놈들이 자랑하던 강철 갑주는 거대한 뿔과 창에 치이고 짓밟혀 그대로 곤죽이 돼 버린다.
고향을 짓밟힌 동부군은 동부군대로, 그동안 설움을 폭발시킨 북방군은 북방군대로 적을 몰아붙였다. 전장은 아비규환 그 자체. 사방에서 악에 받친 고함이 난무했다.
죽어! 크아아악!
쾅! 콰직!
하지만 나는 흥분과 살의가 폭풍우가 치는 한가운데 겨울보다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전장을 빠르게 끝낼 적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르륵!
“그래.”
의도를 눈치챈 검은 코가 재빨리 옆걸음질 친다. 덕분에 전장을 살필 수 있는 시야가 탁 열리게 되었다. 시간이 없다. 나는 재빨리 귀와 눈을 열어 주변을 살폈다.
“젠장! 적은 소수다! 이겨 내란 말이야!”
그 순간 온갖 소음 사이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잡아냈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나는 유난히 화려한 갑옷과 강한 기운을 품고 있는 오크 장군을 발견해 내었다.
다각! 다각!
놈은 방심하고 있다. 영리한 검은 코는 은밀한 움직임으로 방향을 바꿨다. 거리가 점점 좁혀 오고 드디어 쓸 만한 경로가 보인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삐를 내리쳤다.
두두두두두두 - - - -!!
검은 코가 폭발하듯 나아간다. 깜짝 놀란 적 기마대가 앞을 막아 보지만, 휘두르는 검 앞에 전부 쓰러진다. 검은 코가 뛰어오른 순간 마주한 것은 적장의 얼굴이었다.
서걱!
한 줄기 섬광이 목을 스쳐 지나간다. 놈은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한 채 즉사했고 주변을 지키던 호위대 또한 넋이 나갔다. 나는 보란 듯이 존재감을 발휘했다.
“검, 검성이다!”
“검성이 여기 있다!!”
전장이 핏빛 혼란으로 휩싸였다. 오크 놈들은 짙은 패색을 읽었고 아군 기병대는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이제 우리 앞에 남은 것은 머리를 잃은 뱀뿐이었다.
쿵! 서걱! 콰직!
철저해야 한다. 나는 지휘권을 인계받은 놈들을 집요하게 노려 숨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그러자 구심점을 잃은 오크 중기마대는 여러 집단으로 갈려 고립되었다.
“부관!”
“경!”
마침 기병대 부관이 바삐 달려왔다. 나는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대충 닦으며 숨을 돌렸다. 일단 기마전 승리는 우리가 가져왔다. 이제 왕을 도울 차례다.
“도망치는 적은 추격하지 마라. 정리가 대충 끝나는 대로 본대와 합류해.”
“알겠습니다, 경!”
“나머지 부장들은 나를 따르라!”
부관에게 전장 정리를 부탁한 나는 거친 숨을 안정시키기 위해 심호흡했다. 그리고 그대로 격전지를 박차고 뛰쳐나가 한참 난리가 난 적 본대로 뛰어들었다.
두두두두두두 - - -!!
내 뒤로 열 명 남짓한 부장들이 따라온다. 오랜 시간 함께 싸워 온 숙련병들답게 아무런 문제없이 뒤따라온다. 눈이 좋은 한 부장이 황급히 오른쪽을 가리켰다.
“기사왕 폐하가 보입니다!”
나는 부장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오크 기마대를 상대하는 사이 눈투성이가 이끄는 기병대는 벌써 우익을 돌파해 본진을 치고 있었다.
쿵! 서걱! 츠즈즈즉!
괴, 괴물이다! 도망쳐!
검보다 큰 오러가 넘실거린다. 팔을 타고 흐르는 것도 모자라 온몸에서 오러가 흘러낸다. 오늘도 어김없이 흰색 날개를 펼친 눈투성이는 기사왕의 전신 그 자체였다.
‘뒤를 이을 자.’
존재만으로 공포가 되고 희망이 되는 이가 있다. 타오르는 불꽃이 된 눈투성이는 적을 불태우고 아군을 밝혔다. 가슴이 벅차오른 나는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기사왕 폐하를 따르라!”
이제 겁에 질려 떨던 아이가 아니다. 품에서 벗어난 눈투성이는 기사왕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두 번째 왕의 탄생을 본 나는 또 다른 줄기가 되어 본대를 급습했다.
쾅! 서걱!
몸을 사실 순간이 아니다. 기교를 부릴 시간마저 아깝다. 전장으로 섞여 들어간 나는 죽음의 농도를 올렸다. 뜨겁게 타오르는 심장이 포효와 함께 폭풍우를 불고 왔다.
“아아아아 - - - -!!!”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젊음은 이미 가을과 함께 지나갔다. 하지만 모든 꽃이 져버린 자리 낙엽을 양분으로 한 신념이 꽃을 피웠다. 나는 눈투성이를 향해 돌진했다.
“지금이 기회다! 기사왕을 죽여라!”
“서전트! 주변을 포위해!”
황제가 탄 마차가 지척이다. 깜짝 놀란 오크 영웅들은 서전트를 이끌고 눈투성이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수많은 창날과 영웅들의 오러가 기사왕을 향해 쇄도했다.
쾅!
“검성이다!”
“으아아아악!”
사각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쳐냈다. 그리고 동시에 서전트와 병사를 학살하며 눈투성이가 나아갈 길을 만들었다. 피가 튀겨나가는 사이로 녀석과 나는 눈을 마주쳤다.
많은 말을 필요 없었다. 검은 코와 하얀 바람은 기다렸다는 듯 경로를 교차했고 오크 영웅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같은 동작, 같은 숨, 같은 공격,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서걱!
내 공격이 오러를 벗겨낸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눈투성이의 공격은 오크 영웅을 참살했다. 이 땅 아래 감히 기사왕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다각, 다각, 다각!
얼굴을 더럽힌 핏물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내가 가르칠 게 없다. 오러, 검술, 긍지, 명예, 작은 소녀 눈투성이는 시대가 남긴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
‘내 자랑이 되겠구나.’
그러니 마지막으로 맞춰 보자꾸나. 나는 고요한 소음 속 눈을 감았고 눈투성이와 함께 검을 휘둘렀다. 앞으로 쇄도한 한 줄기 선이 순식간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말, 말도 안······! 끄르르륵!”
오크 영웅이 쓰러졌다. 기가 질린 서전트는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도망치는 황제를 추격하라! 기병대 부장은 끝까지 지켜낸 뿔 나팔을 꺼내 힘차게 불었다.
부우우우우우웅 - - - -!!!!
최후의 돌격이다. 살아남은 기병대는 오직 길을 뚫는 것에 초개와 같은 목숨을 던졌다. 어느덧 오크와 시체만이 가득한 전장 한가운데에는 나와 눈투성이만이 남았다.
“제, 제발 막아!”
“기사왕이 온다아아!”
우리 앞으로 화살 비가 내린다. 눈투성이 앞을 가로막은 나는 검으로 화살 비를 막으며 길을 텄다. 그러자 저 멀리 황제를 태운 마차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스승님!”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그대로 선두로 뛰쳐나가 공격과 시야를 끄는 미끼가 되었다. 모든 것이 경각에 달한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놨다.
“눈투성이! 너에게 맡기마!”
네가 아니면 할 수 없다. 선왕의 전설은 같은 기사왕만이 재현할 수 있다. 수백 개 창과 화살이 날아왔고 나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순간 검은 코가 마지막 숨을 다한다.
‘고맙다.’
녀석이 찰나를 벌어 주었다. 안장에서 벗어난 나는 날아오는 창을 낚아챘고 저 멀리 보이는 황제의 마차를 향해 날렸다. 전장 위로 한 줄기 섬광이 날아갔다.
쒜에에엑!
쾅!
창은 바퀴를 맞혔다. 황제를 태운 마차는 거센 요동과 함께 뒤틀렸고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기사왕이라는 말에 황급히 도망치던 오크 황제가 떨어져 내렸다.
“크아악! 젠장!”
“황, 황제 폐하!”
부하들을 미끼로 도망친 것도 모자라 마차에서 떨어져 더러운 흙바닥을 굴렀다. 땅으로 떨어진 황제의 권위 앞에 티그막은 고통보다 더한 치욕을 느끼고 있었다.
“놔!”
티그막은 친위대를 뿌리쳤다. 그리고 오크 군단 사이에 고립된 나를 노려보며 거칠게 달아오른 숨을 내쉬었다. 감추지 못한 두려움은 어느새 조소로 변해 가고 있었다.
녀석이 나를 비웃었다.
“결국, 실패했구나.”
피투성이가 된 내 주변으로 어느덧 장창부대와 서전트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크 군단을 전부 베어 버리는 것보다 아마 이 검이 부러지는 것이 더 빠를 듯 보였다.
스윽.
전투를 포기한 나는 기꺼이 검을 내렸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전장 위로 북방 수리가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드넓은 창공을 가로지른 녀석은 길게 울부짖었다.
삐이이이이익 - - - - -!!
“그래, 또 실패했다.”
이번에도 검이 닿지 못했다. 아마 다음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저 멀리 내려앉은 황혼처럼 나는 주름진 눈을 감았다. 검은 어느새 바닥에 꽂혀 있었다.
한 점 후회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하얀 바람이 분다. 그 위에 탄 검은 머리는 운명을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도 막지 못한다. 그 어떤 것도 녀석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이어받은 자가 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모두가 시선이 뺏긴 사이 오로지 황제만이 고개를 돌려 주마등을 마주했다. 그곳에는 실현된 북방 전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기사왕이 황제를 벨 것이다.’
망토를 흩날린 기사왕이 하얀 바람과 함께 날아올랐다. 새하얗게 펼친 날개, 오러를 머금은 왕의 검! 내 기억 속 선왕은 희미해지고 오직 눈투성이만이 남았다.
야만의 시대.
명예를 아는 자를 기사라 불렀다.
서걱!
황제의 목이 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