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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45화 (145/181)

145화

검은머리 기사왕 145화

둥! 둥! 둥! 둥! 쿵!

와아아아아아아아 - - - - -!!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최후를 알리는 공성전답게 수많은 사다리와 공성 무기가 모조리 동원되었고 빈약한 도시 쿠트나의 성문은 금세 뚫려 버리고 말았다.

서걱! 콰직!

퓨우우우웅, 푹!

하지만 목숨을 건 동부 민병대의 저항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왕국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결집력과 헬레나의 통솔력은 무너진 성문마저 탄탄하게 틀어막았다.

젠, 젠장! 무너진다!

으아아아악!

시뻘건 화마에 휩싸인 오크 공성탑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채 하루를 넘기지 못하리라 예상했던 쿠트나 공성전이 또 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민병치고는 제법 버티는군.”

이렇게 고전할 장소였나? 오크 황제 티그막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통을 터트린 오크 장군들이 앞으로 나와 부복했다.

“전사들은 더 투입하겠습니다, 폐하!”

“제가 다시 선두에 서겠습니다!”

성공적인 동부 원정으로 인해 새로운 황제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척하면 척 장단을 맞춰주는 장군들을 보며 티그막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다, 모두 나의 부덕이지.”

“폐, 폐하···!”

장군과 영웅들의 지지를 얻었으니 앞으로 황권은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다. 한 차례 마음에도 없는 겸양을 떤 황제 티그막은 근엄한 얼굴로 도시 쿠트나를 바라보았다.

쿠트나가 점령되면 수도까지는 금방이다. 가장 거슬리는 적이었던 리처드 왕은 죽었고 여왕도 곧 그 뒤를 따라갈 테니 동부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야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앞으로 또 다른 영토가 될 동부를 기반으로 선대왕을 죽인 북방은 물론이고 불멸왕과 여왕이 지배하는 서부까지 손에 넣을 것이다.

오크 종족 최초의 정복왕이다. 대륙 통일이라는 커다란 미래를 그린 황제 티그막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호위하는 오크 친위대에게 명령했다.

“연금술사들을 불러라.”

검은 가루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최후의 전쟁을 폭발로 마무리하고 싶었던 오크 황제 티그막은 싸늘한 눈동자를 빛냈다. 그 시선은 도시 쿠트나로 향하고 있었다.

* * *

“수레를 더 가져오세요!”

온몸을 적의 피로 물들인 왕비 헬레나가 후방 부대를 향해 외쳤다. 그러자 아무런 갑옷도 입지 않은 주민들이 바위가 가득 든 수레를 끌고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드르르륵, 쿵!

수레가 쓰러졌다. 그 부근에는 파괴된 수레들이 육중한 바위들과 함께 뒤엉켜 있었다. 기지를 발휘한 헬레나가 성문이 무너진 자리에서 수레로 장애물을 만든 것이다.

쨍그랑! 화르륵!

그리고 그 위로 기름 항아리와 불까지 옮겨 붙으니 기세등등하게 달려오던 오크들도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 헬레나가 아군 민병들을 향해 외쳤다.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진입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파괴된 성문 자리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는 임시일 뿐 기름 항아리와 수레가 떨어지면 놈들이 몰려 들어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 - - - - - - -.”

성벽 위로 시체가 가득하다. 예비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헬레나는 수레를 끌다 죽은 한 주민을 바라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이 경각을 향하고 있었다.

쿵! 쿵! 콰직!

크아아아아 - -- !!

그 순간 성벽 위로 거대한 함성이 들려왔다. 무너진 공성탑을 대신해 투입된 공성 병기가 성벽을 돌파한 것이다. 피로 범벅이 된 오크 놈들이 물밀 듯 몰려왔다.

살, 살려줘!

끄아아아아악!

성문을 막기에도 버거운 상황이다. 설상가상 성벽까지 뚫려 버렸으니 민병들 사기는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문 헬레나는 호위 기사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후퇴 명령을 내리세요!”

“알겠습니다!”

다급한 후퇴 신호가 떨어졌다. 속수무책 공격받던 민병대는 다급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잡일을 지원하기 위해 왔던 비무장 주민들 또한 서둘러 도망쳤다.

콰직!

“감, 감사합니다!”

“서두르렴!”

여차하면 무방비한 뒤가 잡힐 수 있는 상황이다. 기사들을 이끈 헬레나는 뒤처진 주민들을 챙기며 오크 놈들 앞을 틀어막았다. 검에 맺힌 오러가 위태롭게 일렁인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대부분 주민이 후방으로 후퇴했다. 이제 남은 것은 불타오르는 시가지와 내성뿐이었다. 헬레나는 자신을 재촉하는 호위 기사들을 따라 다급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쾅! 쿠르르르릉!

도시 성벽이 완전히 함락당한 것이 보인다. 불타오르는 성문마저 밀어 버린 오크 군단은 초록색 파도가 되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 앞에 그들은 뛰었다.

화르르륵!

사방이 불타오르는 화마다. 하늘에는 검은 연기가 가득하고 불똥은 어지럽게 떠다닌다. 비명, 절망, 죽음, 이 모든 것이 폭풍우가 되어 운명을 결정짓고 있었다.

탁! 탁! 탁! 탁!

저 멀리 내성이 보인다. 마지막 인원을 기다리던 민병들이 초조한 얼굴로 활과 창을 겨누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 헬레나는 한 치 망설임 없이 폐문을 명령했다.

“성문을 닫으세요!”

드르륵, 드르륵!

빨리! 빨리 들어가!

쿵!

도르래가 급히 돌아간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마지막 주민이 내성으로 들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헬레나와 기사뿐, 성문을 닫은 영주가 민병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왕비 전하를 엄호하라!”

퓨우우우웅! 푹!

쒜에에엑! 챙!

오크와 거리는 불과 100m다. 엄호를 명령한 영주는 다급히 튼튼한 밧줄을 던졌다. 헬레나와 기사들은 오크 놈들이 도착하기 직전 밧줄을 붙잡을 수가 있었다.

탁!

올라가면 살 수 있다. 사활을 건 엄호 아래 헬레나와 기사들은 무사히 성벽을 오르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진격해 오는 오크 앞으로 광기 어린 고함이 들려왔다.

크아아아아아아 - - - -!!

웃통을 깐 오크 전사들이 검은색 나무통을 든 채 달려오고 있다. 그리고 두 눈을 붉은 광기로 물들인 놈은 날아오는 화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문으로 달려들었다.

치직.

쿵! 도착했다. 동시에 무언가가 다 타 버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 속 인간들이 본 것은 암흑이었다. 뒤이어 찾아온 폭발이 눈 부신 빛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앙 - - - - -!!!!!!!

성문이 폭발했다. 오크 놈들은 물론이고 그 위를 지키던 민병이 산화한다. 그리고 가까스로 올라왔던 헬레나는 순간 통제할 수 없는 부유감을 느끼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쿵! 콰직!

강하게 부딪혔다.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초월적인 의지는 붙고 끊기를 반복하는 의식을 일깨웠다. 헬레나는 가까스로 한쪽 눈을 떴다.

삐이이이이이이이 - - - - - -.

이명이 가득하다. 시야는 어지럽다. 갑옷에는 알 수 없는 파편이 박혀 있었고 목 또한 아무런 목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겨우 잡힌 초점 사이로 마지막 광경이 보였다.

채앵! 챙! 서걱!

놈들이 무너져 내린 내성 사이로 물밀 듯 몰려온다. 운 좋게 폭발을 피한 동부 민병대가 대항해 보지만, 수많은 도끼를 든 오크 전사들에게 온몸이 난자당해 죽어갔다.

물어 뜯긴다. 찢겨 나간다. 항전하는 민병대도 도망치는 주민들도 막다른 최후 앞에 섰다. 감히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아래 헬레나는 비틀비틀 바닥을 짚었다.

끄르르륵.

제발 그만해. 목소리 대신 나온 것은 피였다. 목을 끓는 설움을 뱉은 헬레나는 피눈물을 흘렸다. 몸을 난자하는 고통도 최후를 직감한 체념보다 참담하지 않았다.

“- - - - - - -!!”

무어라 외친 오크 전사 하나가 자신을 지목한다. 놈들 눈동자는 공적을 향한 탐욕으로 물들며 순식간에 주변을 포위했다. 헬레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오러를 쥐어짰다.

츠즈즉.

‘리처드.’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승산 없는 전쟁을 결정한 순간 자신은 오늘까지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찰나의 연속 아래 후회는 남지 않았다. 행복했다. 함께 했던 내내 모든 게 행복한 꿈이었다.

‘다음 생에도 꼭.’

어머니 북방이 있다면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그때는 영원히, 헤어짐 없이 말이다.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을 뿌리친 헬레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군단을 향해 달려갔다.

뿌우우우우우우우우 - - - -!!

그 순간 모든 게 멈췄다. 귀를 의심한 오크들은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시간과 공간을 넘은 백색 뿔피리가 드디어 쿠트나 앞에서 불어졌다.

펄럭!

세찬 바람이 분다. 삐이익 울음을 터트린 북방 수리가 겨울 고산을 넘어 동부로 내려왔다. 천천히 창공을 가로지른 수리는 오크 군단 위를 오만하게 가로질렀다.

부우우우우우우웅 - - - !!

둥! 둥! 둥! 둥! 둥!

뿔피리가 재차 울린다. 마치 철을 내려치는 것 같은 북소리가 사방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러자 하나로 뭉친 인간 부대가 깃발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인고의 세월을 이겨, 재뿐인 유산을 딛고, 강철 동맹이 화염 아래 재탄생했다.

* * *

“대열을 정비하라!”

“곧바로 진격한다!”

숨을 돌릴 틈 없이 뛰어왔다. 쿠트나 바로 앞까지 행군은 강철 동맹군은 오크 군단을 마주했다. 하지만 엄청난 병력 앞에서도 강철 동맹군은 곧바로 진격을 준비했다.

다각! 다각! 다각!

수백 번, 수천 번 했던 훈련이다. 정예인 북방 기병대는 나를 선두로 대열을 이뤘고 급히 전투마를 구해 재편한 동부 기병대 또한 그 뒤를 급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리처드!”

“준비됐습니다!”

강철 동맹 기병대가 적진을 돌파하는 사이 리처드가 이끄는 보병 부대는 쿠트나를 구원해야 한다. 위치를 확인한 나는 서둘러 주변을 선회해 눈투성이를 향해 달려갔다.

“내가 적 기병대를 상대하겠다! 너는 곧바로 갈라져 나가 황제의 목을 쳐라!”

“알겠어요!”

지원군이 왔다지만 전력은 우리가 압도적으로 열세다. 전면전은 승산이 없으니 돌파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 표적은 황제의 목. 우리는 지난 선왕의 승리를 재현할 것이다.

“이랴!”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준비는 끝났다. 어머니 북방을 향해 기도한 나는 평원을 한 바퀴 돌아 선두를 향해 달려가 섰다. 나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은 젊었던 그날과 하등 다르지 않았다.

“형제들아.”

바람이 불어온다. 따가운 싸라기눈 사이로 먼저 떠난 형제들이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은 거대했고 위대했으며 또한 명예로웠다. 나는 망토를 벗어 평원으로 날렸다.

펄럭!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려라.”

검은 코가 속보했다. 그 뒤로 백과 흑이 뒤섞인 북방군이 천천히 전진했다. 펄럭이는 수많은 깃발은 오만한 황제와 오크 놈들에게 누가 왔는지를 말해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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