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검은머리 기사왕 144화
습지대를 빠져나온 동맹군은 적의 추격을 가볍게 따돌렸다. 그리고 멀지 않은 협곡에 임시 숙영지를 건설하여 쓰러지기 직전인 병사들에게 휴식할 시간을 주었다.
침공이 있었던 날 이후 한시도 편히 쉬어본 적이 없는 동부군이다. 천막 안에 드러누운 리처드 왕과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짹, 짹짹!
그렇게 폭풍과도 같던 새벽이 지나 아침이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깊은 잠이 빠졌던 나는 뻐근한 몸과 함께 일어났다. 천막 밖을 지키던 초병이 넌지시 말을 전해 왔다.
“경,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다.”
눈투성이가 나를 찾는다는 말에 서둘러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푼 다음 곧바로 천막 밖을 빠져나왔다.
터벅, 터벅, 터벅.
아침이 왔음에도 숙영지는 여전히 고요했다. 여유롭게 걸음을 옮긴 나는 병사들이 분주히 오고 가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킁킁.
순간 상쾌한 박하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천막 내부에는 머리를 묶은 눈투성이가 차 한잔과 함께 홀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앗, 스승님! 잘 주무셨어요?”
역시 젊음이 좋다. 나는 그새 체력을 회복한 눈투성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녀석이 히히 웃으며 김이 올라오는 양철 찻잔을 내밀었다.
“드실래요? 박하 차인데.”
“으, 됐다. 서류나 줘.”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냄새다. 인상을 쓰며 거절한 나는 눈투성이가 보고 있던 서류를 챙겨 들었다. 그곳에는 말라붙은 핏자국과 함께 뭉뚝한 글씨가 잔뜩 쓰여 있었다.
보아하니 리처드 글씨체다.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틈틈이 기록을 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류에 쓰인 숫자와 명단을 전부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처드가 대단한 일을 했어.”
여차하면 수많은 동부인이 학살을 당할 뻔한 전쟁이다. 그러나 리처드와 동부군의 피나는 노력으로 피난 작전은 성공했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왕국의 본질이란 곧 인간이다. 비록 전쟁에서 패배하고 땅을 빼앗겼지만, 동부가 다시 일어설 저력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전사한 병사들을 위해 작게 기도했다.
펄럭.
“크흠, 큼! 좀 늦었습니다.”
“더 자지 그랬냐.”
“에이, 왜 그러십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졸린 눈을 한 리처드가 천막을 찾아왔다. 민망한 듯 웃음을 흘린 녀석은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았다. 씻지 못한 머리가 온통 까치집이었다.
타닥, 탁.
작게 타오르는 난로, 협소한 천막과 허름한 의자, 참 소박한 공간이다. 오랜만에 평상복을 입고 마주 앉은 우리 셋은 아무런 말 없이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리처드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두 분 모두.”
동부왕으로서 감사를 표할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 리처드로서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같은 친구, 같은 형제, 같은 가족이 항상 서로를 위하듯 말이다.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동부가 우리를 믿었듯 우리도 동부도 믿었다. 서로가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했으니 장황한 말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리처드는 촉촉한 눈가를 닦으며 웃음을 머금었다.
짝!
“자! 이제 일 이야기 좀 하죠.”
그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분위기를 빠르게 환기한 눈투성이는 동부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그 위에 오늘 새롭게 편성된 부대인 강철 동맹군을 표기했다.
“현재까지는 순조로웠어요.”
동부가 속수무책 밀리는 상황에서 규합한 동맹군이 첫 승전고를 울렸다. 이것은 아무리 오크 군단을 이끄는 황제 티그막이라도 쉽게 생각하지 못할 전조 중 하나였다.
“앞으로가 고비군요.”
하지만 우리가 이 흐름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면 이 모든 노력은 단순한 병력 낭비에 불과하다. 지금은 결정 하나하나가 신중해야 하고 또한 효율적이어야 했다.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장기전으로 간다.”
놈들의 유일한 약점은 보급이다. 그 많은 전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현지 조달로는 턱도 없다. 결국, 본토에서 받아야 할 텐데 그게 현실적으로 까마득한 이야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군단이 군단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민병대와 함께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고 오크 놈들이 말라죽을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었다.
“쿠트나로 향해야겠군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합류한다.”
승전고를 울렸으니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 곧바로 움직인다. 그렇게 각오를 다진 우리는 세세한 일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펄럭.
“폐하,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기병대 부장이 황급히 눈투성이를 찾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우리는 서둘러 검을 챙겨 천막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죠?”
“정찰대가 누군가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피난민들 같은데, 그들이 리처드 폐하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숙영지가 시끄러워진 것을 보아 단순한 피난민이 아닌 모양이다. 병사들은 진정시킨 우리는 서둘러 입구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정찰대가 데려왔다는 피난민들이 있었다.
“폐하!”
더럽고 허름한 옷, 수척한 얼굴과 불안한 눈동자, 전형적인 피난민 가족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인 리처드를 발견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정, 정말 리처드 폐하십니까?”
“맞다! 이 난리 통에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같이 간 행렬은 어디 있지?”
할 말이 있다는 게 도와달라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아파진 리처드는 그들을 달래며 다른 피난민 행렬 무리를 찾았다. 하지만 그들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저희뿐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소돔에서······.”
“저, 저희는 동쪽에서 왔습니다, 폐하.”
한줄기 벼락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쪽이 아닌 동쪽, 동쪽은 도시 쿠트나가 있는 방향이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리처드는 눈투성이와 눈을 마주쳤다.
“전군 이동 준비!”
눈투성이가 급히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깜짝 놀란 병사들은 서둘러 천막을 향해 뛰어갔고 사방에선 고함과 함께 무장한 병사들이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서둘러라! 한시가 급하다!”
두두두두두두두 - - - -!!
군단을 두 개로 나눈 황제 티그막이 도시 쿠트나로 우회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강철 동맹군은 서둘러 숙영지를 접고 동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 * *
“왕비 전하.”
왕비 헬레나와 동부 영주들이 모인 그레이트 홀로 참담한 얼굴을 한 기사가 다급히 찾아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제발 아니기만을 빌었던 소식 하나를 전해 왔다.
“도시가 포위되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나. 순간 머리가 아찔해진 헬레나는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힘없이 주저앉을 수는 없었기에 소식을 전해온 기사를 향해 되물었다.
“······적 사령관은 누구죠?”
“황제 티그막입니다.”
동부 민병대를 소집한 헬레나는 각 영주 군과 함께 수도 두피디아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도시 쿠트나를 거쳐 리처드가 있으리라 예상되는 지역으로 진군할 생각이었다.
‘적이 쳐들어온다!’
하지만 그 진군은 습지를 우회한 오크 2군단으로 인해 저지당했다. 황제 티그막은 기어코 동부 왕국의 함락시키고자 앞선 도시인 쿠트나로 진격해 온 것이다.
인근 마을은 전부 화마에 휩싸였다. 학살을 저지른 오크 군단은 기다렸다는 듯 쿠트나를 포위했고 왕비 헬레나와 동부 영주들은 그대로 발이 묶인 신세가 되었다.
웅성웅성.
적 사령관이 황제라는 말에 그레이트 홀은 혼란으로 휩싸였다. 한참 언성을 높이던 한 영주가 헬레나를 향해 물었다.
“폐하께선 정말 돌아가신 겁니까?”
“어딜 감히 망발을 입에 담는가!”
리처드 왕이 상대해야 할 오크 군단이 왜 쿠트나까지 진격했는가? 정말 왕이 죽고 동부군이 패배한 것인가? 단순 유언비어라고 취급했던 소문이 사실처럼 다가왔다.
소식이 끊어진 왕, 괴멸한 동부군과 어디 있는지 모를 북방군, 절망적인 뿐인 상황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한 영주가 허탈하다는 듯 말했다.
“······저희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기둥이던 왕이 죽었다. 수성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가 있다고 한들 전부 발악일 뿐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위험이 경각에 달한 순간 마지막 선택만이 그들에게 남았다.
“왕실이라도 도망쳐야 합니다.”
“백성은 어찌하고 왕실만 갑니까!”
영주들은 크고 작은 집단으로 갈렸다. 유약한 이들은 왕실이라도 도망치기를 권유했고 강인한 이들은 결사 항전을 외쳤다.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언쟁으로 번져나갔다.
“그럼 왕실도 함께 죽자는 소리입니까!”
“이 작자가 감히!”
망명을 주장하는 영주는 분명 소수였다. 하지만 충성을 맹세한 왕이 사라지자 그 의견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이 아닌 현실이 모두를 흔들리게 한 것이다.
“왕비 전하! 끝까지 동부의 명맥을 이으셔야 합니다! 훗날을 도모하십시오!”
침몰하는 배 위에 꼭 선장이 남을 필요는 없다. 반대하는 이들을 뿌리치고 나온 한 영주의 외침이 모든 이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쩌면 저것이 정답일지도 몰랐다.
모두가 왕비를 바라보았다.
“저는······.”
침묵을 유지하던 헬레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거칠게 달아오른 숨을 내뱉은 영주들은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무언가를 체념한 듯한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체념이 아니었다.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습니다.”
살고자 하면 빌어먹을 수 있다. 내일이 있다면 고통도 기꺼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남이 아닌 스스로가 부끄럽다고 여긴다면 그 선택은 더 이상 이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어나,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앞으로 후손들이 살아갈 이 땅 위에 우리가 남길 것은 무엇인가. 산 자는 역사로 남을 수 없는 법이다.
“그이는 강철 같은 왕이었죠.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선택을 했을 겁니다.”
운명을 바꿀 변환점이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리처드가 항전을 선택한 의지는 동부를 넘어 이곳까지 전해졌다. 헬레나는 영주들을 향해 외쳤다.
“동부 왕국은 결사 항전합니다.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성인은 무장시키고 나머지 주민들은 광산으로 대피시키세요.”
“······명을 따르겠습니다, 왕비 전하!”
왕실은 도망치지 않는다. 그 단호한 뜻을 전해 들은 영주들은 서둘러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각자 다른 생각, 다른 마음가짐을 가진 채 도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왕국 깃발을 걸어라!”
항전 소식은 도시 전역으로 전해졌다. 기사들은 서둘러 왕실이 보관하고 있던 깃발을 들고 성탑으로 향했다. 도시 쿠트나 꼭대기에선 항전을 알리는 깃발이 펄럭였다.
털썩.
모두가 자리를 떠났다. 다리에 힘이 풀린 헬레나는 자리에 앉았다. 파르르 떨리던 두 눈을 감은 그녀는 남편인 리처드를 떠올리며 무릎 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반드시 살아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