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검은머리 기사왕 143화
핑그르르 - - - -!!
푹!
사선을 그리며 날아간 단검이 오크 초병 둘을 순식간에 살해한다. 순간 칠흑 같던 주변이 고요함으로 물들자, 동부군은 기다렸다는 듯 본진 앞으로 접근했다
까닥, 까닥.
‘문을 열겠다.’
진로를 가로막은 목책이 꽤 두텁다. 리처드를 향해 재빨리 수신호를 보낸 나는 그대로 바닥을 박차 뛰어올랐다. 몸과 시야는 어느덧 목책을 딛고 바닥에 착지하고 있었다.
탁!
우두둑!
작은 소음을 들은 초병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가볍게 목을 꺾어 죽여 버린 나는 문 앞으로 다가가 걸쇠를 풀었다. 동부군이 우르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사박, 사박, 사박.
3일째 묽은 수프로만 연명해 온 동부군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번 전투가 최후이자 최고임을 직감한 그들은 쥐고 있는 무기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어둠 속 반짝이는 눈빛을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횃불을 하나둘 점화하기 시작한 동부군은 적군 병영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쨍그랑! 화르륵!
불, 불이다!
기름 항아리가 깨졌다. 동부군이 던진 횃불은 병영을 순식간에 화마로 휩싸이게 했고 사방에선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놈들이 공격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적, 적군이다!
깜짝 놀란 오크 전사들이 황급히 천막과 병영을 뛰쳐나온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던 동부군은 무방비한 놈들을 창으로 찔렀고, 보급품이 보이는 족족 불을 질렀다.
화르르륵! 서걱! 푹!
끄아아아아악!
불과 어둠, 그리고 안개가 뒤섞인다. 적이 누구인지, 또 아군은 누구인지조차 헷갈리는 상황에서 숨통을 끊고 있는 자들은 오직 준비되어있던 동부군뿐이었다.
동부 병사들은 그간 당해 온 치욕과 절망을 갚아 주겠다는 듯 본진 병영과 천막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기습이 훌륭하게 성공한 것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신호했다.
탁! 탁! 탁! 탁!
혼란은 또 다른 혼란이 가중돼야 빛을 발휘하는 법이다. 동부군이 병영을 기습한 사이 나와 리처드 그리고 정예인 동부 기사들은 본진 한가운데 본영을 향해 뛰어갔다.
후웅! 서걱!
선두에 선 나는 경종을 울리기 위해 뛰어가는 오크 전사 하나를 가볍게 양단했다. 그리고 뛰어가는 속도 그대로 굳게 닫혀 있는 두꺼운 본영 문을 발로 차 버렸다.
쾅!
후웅!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 양옆으로 오러 도끼가 떨어졌다. 하지만 기척을 읽고 있던 나는 반걸음 뒷걸음쳐 도끼를 피해냈다. 나는 찰나의 호흡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문 옆에서 적을 기다리던 서전트 머리를 통째로 베어냈다. 순간 더러운 뇌수가 사방으로 흩날리며 신호탄을 쏘았다. 동부 기사들이 고함과 함께 안으로 들이닥친다.
“기사단! 적을 섬멸하라!”
“으아아아아아 - - -!!!”
츠즈즈즉, 온 힘을 다해 오러를 뽑는다. 악에 받친 기사들은 급히 쏟아져 나오는 서전트 무리와 정면으로 격돌했다. 횃불이 일렁이는 본영 내부에선 비명이 난무했다.
끄아아아악!
이 빌어먹을 인간 놈들!
수적으로는 아군 기사들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선두로 나선 리처드와 나라는 존재는 이미 대등한 분투를 넘어 승기를 우리 쪽으로 가지고 오고 있었다.
“- - - - - - - - -.”
확신이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단순히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을 것이다. 한 합당 한 마리, 오러의 제약에서 벗어난 나는 피로 물든 폭풍을 몰고 다니고 있었다.
서걱! 서걱! 콰직!
무아지경이다. 아무것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놈들이 뽑은 오러는 목과 함께 통째로 날아갔고 급히 짠 진영은 우르르 무너진다. 나는 여전히 날카로운 검을 겨누었다
“검, 검성!”
“놈이 여기를 어떻게!”
오크 서전트가 삽시간에 무너져 내린다. 강철왕답게 활약한 리처드는 기세가 오른 기사들을 선두지휘했다. 그렇게 본영 내부 서전트 무리는 소탕이 되는듯했다.
찌르르르.
하지만 그 순간 감각이 위험을 경고했다. 찌르르 울리는 목덜미에 고개를 돌린 나는 서전트와는 차원이 다른 한 줄기 오러를 감지해낼 수 있었다. 본능이 몸을 움직였다.
쩌엉!
리처드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재빨리 막았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오러가 얼마나 농후한지 맞부딪친 소리가 다르다. 나는 공명하는 검날을 달래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시, 시무칸님!”
“멍청한 놈들.”
왜소한 체격, 굽은 등, 새된 머리와 볼품없는 수염, 초로 한 늙은 오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오크 서전트 무리는 두려움에 물든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시무칸, 1시대 오크 영웅. 인간들 사이에선 검귀라고 익히 알려진 놈이 군단과 합류한 상태였다. 주름진 얼굴을 찡그린 시무칸은 내가 들고 있는 검을 보며 말했다.
“오러를 막을 수 있는 검이라! 좋은 기연이 있었구나. 어디서 얻은 검이냐?”
놈의 눈빛이 욕심으로 일렁였다. 검귀라는 이명과 걸맞게 검을 탐내는 것이다. 오러를 막아 준 것이 전부 이 검 덕분이라고 생각한 건가. 나는 아무 말 없이 혀를 찼다.
“······뭐, 상관없겠지.”
착각은 자유다. 내 침묵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시무칸은 일순간 몰려온 불쾌함을 빠르게 감췄다. 그리고 습격을 받은 본진 상황을 둘러보며 끌끌 웃었다.
순간 기류가 바뀌었다.
척! 척! 척! 척!
“폐하! 적 증원군이 왔습니다!”
바깥 상황을 살피던 한 기사가 외쳤다. 한참 본진을 불태우던 동부군 앞으로 다른 오크 부대가 증원을 온 것이다. 끌끌 웃은 시무칸은 늙은 너구리처럼 속삭였다.
“수가 무뎠구나.”
그래, 놈의 말처럼 수가 무뎠다. 습격을 감행한 우리는 적 증원군이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어야 했다. 이것이 원래 동부군이 맞이했을 시나리오였다.
“왔다.”
하지만 동요하는 이는 없었다. 내가 맹약을 지키기 위해 왔듯 그들도 믿고 있었다. 우리가 위기에 빠진 순간 저 멀리 절벽에서 누군가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화르륵!
“음?”
횃불이 거세게 일렁인다. 바닥에 놓인 피 웅덩이가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 시무칸과 서전트 무리는 자신도 모르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두두두두두두두 - - -.
그곳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나무들 사이로 은은한 진동이 느껴진다. 서서히 커진다. 점차 강해진다. 발굽이 바닥을 박차며 다가왔다.
그리고 돌풍이 강타했다.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 - - - - - -!!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그 강인한 울림은 우리의 혼과 심장을 거세게 흔들었다. 적에게는 악몽을 아군에게는 희망을 주어라. 안개 사이로 하얀 바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륵!
다각! 다각! 다각!
하얀 사슴 위에 올라탄 검은 머리 기사왕은 검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줄기 하나로 시작한 흰색 파도는 어느새 기사왕 눈투성이를 따라 맹렬히 돌진하고 있었다.
기병대가 하얀 창이 된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두두두두두두두두 - - - -!!
쾅! 콰직! 끄아아악!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북방기병대가 순식간에 오크 증원군을 들이박았다. 그 엄청난 속도 앞에 대열은 찢겨나갔고 오크 종족이 자랑하는 갑옷마저 통째로 곤죽이 되었다.
살아남은 동부군이 함성을 지른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 나가 살아남은 오크 전사를 도륙하고 증원군을 포위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이 되었다.
“노오오옴!”
챙! 끼기기긱!
시무칸은 얼굴을 악귀처럼 물들였다. 그리고 마치 분노를 방출하듯 오러를 뽑아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자 끼기긱 거리는 괴음이 흘러나왔다.
크워어어어어!
기사단 돌격하라!
최후를 직감한 양측이 격돌했다. 그것이 자신의 승리일지 아니면 패배일지는 이번 전쟁으로 판가름 날 것이다. 나는 전장 속 전장에서 시무칸과 빠르게 검을 나누었다.
챙! 채앵!
검술이면 검술 오러면 오러 모든 것이 아득한 경지다. 현재 검을 나누는 검귀 시무칸은 한때 강자라고 불렸던 식민지 총독 오그마르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발악해보아라!”
범(凡)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 공격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놈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지 온갖 기교와 검술을 부리며 오러가 없는 나를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흐읍!”
쾅! 치지지직!
최대로 끌어올린 오러가 폭발했다. 그 공격을 막아낸 나는 뒤로 밀려 나갔고 검은 어느새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시무칸이 끌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명이 아깝구나. 오늘 내가 가져가겠다.”
그래, 놈은 항상 검성이라는 이명을 탐냈다. 그것이 검의 끝이라 생각하며 더 높은 경지를 갈구했기 때문이다. 숨을 가볍게 내쉰 나는 붉게 달아오른 검을 집어넣었다.
스르릉, 철컥.
“······포기했나?”
시무칸의 얼굴이 혐오로 물든다. 감히 검성이라는 이명을 더럽히는 내가 혐오스럽다는 듯 말이다. 놈은 여기서 끝내겠다는 듯 시퍼런 오러를 뿜으며 달려들었다.
치지지직!
시무칸의 검이 목을 노리고 있다. 수천 개로 쪼개는 장면 사이로 시간 또한 쪼개진다. 목이 잘리기 직전인 위급한 순간에도 내 심신은 넓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철컥! 서걱!
검을 다시 뽑았다. 가벼운 힘이 들어간 동작 뒤로 시무칸의 오러가 보였다. 호흡을 멈춘 나는 마치 흐르는 물을 썰어내듯 오러 속 감춰져 있는 검날을 잘랐다.
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걱!
두둥실!
오러를 막아내는 검이 아니라 본질을 베어내는 술이다. 주인은 잃은 오러는 흩어졌고 동시에 시무칸의 목이 베인다. 두둥실 떠오른 머리 아래로 피가 솟구쳤다.
뻐끔.
허공으로 날아오른 시무칸의 머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뻐끔, 뻐끔, 겨우 그 짧은 뻐끔거림이 놈이 마지막으로 남긴 의문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머리를 주워들었다.
“적장의 목을 베었다.”
오크 놈들 또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합으로 검귀를 베어 버림으로써 그 확신을 철저하게 부숴 주었다. 사방에서 겁에 질린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도, 도망쳐!
으아아아아아!!
이제부터는 전쟁이 아닌 섬멸이다. 순식간에 영웅을 잃은 오크 서전트 무리는 살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론 놈들이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극히 드물었다.
“하아, 하아.”
리처드가 거칠게 달아오른 숨을 내쉰다. 그리고 피로 범벅이 된 왕의 투구를 벗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방에서 들려온 승리의 함성에 그만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털썩!
“우리가 이겼어요?”
“그래, 이겼다.”
그동안 짊어져야 했던 책무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지금은 왕이 아닌 리처드로서 앉아있어도 된다. 녀석을 향해 다가간 나는 축져진 어깨를 조용히 토닥여 주었다.
“서둘러 빠져나가자.”
“······네!”
저 멀리 증원군을 섬멸한 기사왕 눈투성이가 다급히 달려오고 있다. 나는 녀석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하하 웃음을 터트린 리처드 또한 양손을 힘차게 흔들어준다.
그렇게 합류한 강철 동맹군은 포위망을 뚫고 습지대를 빠져나갔다. 뒤늦게 도착한 오크 부대가 발견한 것은 타오르는 본진과 장대 위에 걸린 시무칸의 목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