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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42화 (142/181)

142화

검은머리 기사왕 142화

습지를 관통하는 늪은 광범위하게 조성되어있었다. 그 덕에 몸을 숨긴 나는 주변에 즐비한 오크 군단을 면밀하게 관찰하며 동부군을 향해 천천히 움직일 수 있었다.

끼이익, 탁! 탁! 쿵!

거기! 제대로 세워라!

습지대는 군대를 이끌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 점을 고려한 오크 지휘관은 그나마 땅이 평평한 지대 골라 통나무를 깔고 병사들이 지낼 진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보급품을 확보했다는 여유일까, 아니면 수적으로 우월하다는 자신감일까. 놈들은 굳이 지형적으로 불리한 전투가 아닌 동부군이 알아서 포기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 지휘관은 멍청한 놈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놈들 본대 위치까지 알아낸 다음 동부군과 합류해야겠다. 차가운 눈으로 진지를 살핀 나는 늪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터벅.

“- - - - - - - -!”

하지만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늪과 어둠 속으로 황급히 몸을 숨긴 나는 진지 방향에서 빠져나오는 한 무리 횃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화르륵!

거의 10분 단위로 오크 정찰병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찰병치고는 큰 규모가 전부 중무장한 것으로 보아 교전이나 습격을 염두에 둔 전투 정찰이 분명했다.

스르릉.

그래, 굳이 내 발로 찾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떠오른 나는 가지고 온 단검을 뽑아 든 뒤 오크 정찰대 뒤를 천천히 쫓아갔다.

“젠장, 또 우리만 개고생이야?”

“명령이니 어쩔 수 있나.”

이런 야밤에 전투 정찰은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오크 놈들은 큰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경계가 잠시 흐트러진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였다.

서걱!

컥!

뒤처진 후미를 따라잡았다. 순식간에 멱을 딴 나는 횃불을 늪으로 던졌다. 주변이 어두워진다.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뒤 두 번째 표적을 노려 단검을 던졌다.

푹!

작은 소음이 있었다. 두 번째 횃불이 꺼진다. 바로 앞에서 걸어가던 오크 놈이 이를 눈치챘지만, 내 몸은 이미 어둠을 빠져나와 살덩이에 박힌 단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서걱!

단검을 뽑자마자 또 한 놈을 죽였다. 핏물은 소음과 함께 허공을 맴돌았고 투덜거리던 놈들은 무심코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꺼진 횃불과 쓰러진 시체만이 있었다.

“적······!”

푹!

황급히 뿔피리를 불려는 인솔자를 죽인 나는 횃불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경악한 나머지 놈들은 본능적으로 무기를 들었다. 날붙이가 머리로 날아온다.

탁!

후웅. 후웅, 콰직!

하지만 오러가 실리지 않는 공격이 우습다. 날아오는 도끼를 낚아챈 나는 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뇌수가 팍하고 터지며 나머지 놈들이 경악으로 얼굴을 물들였다.

쾅! 빠드득!

무릎을 짓밟아 뼈를 깨부순다. 단검으로 갑옷 틈을 쑤시고 목젖을 뜯었다. 이런 어둠 속 육박전에선 그 어떠한 검술도, 오러도, 무의미하다. 오로지 짧은 판단뿐이다.

콰직!

“후우······.”

흙을 피로 씻었다. 짧게 숨을 내쉰 나는 바닥에 즐비한 시체를 늪으로 밀어내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러자 턱뼈와 정강이가 부러져 버둥거리는 놈만이 남았다.

“크륵! 크으으륵!”

“짧게 묻겠다.”

상상하지 못할 고통을 줄 수 있다. 이미 그 일부분을 맛본 오크 전사는 복부 아래 겨눠진 단검을 보며 부르르 떨었다. 진한 두려움을 엿본 나는 마지막 용건을 물었다.

“본대가 어디지?”

마지막 횃불이 꺼졌다. 안개와 어둠이 자욱해지자 용건도 마무리가 되었다. 핏자국을 깔끔하게 지워낸 나는 다시 늪으로 들어갔다. 길가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 * *

머리가 지끈하고 온몸이 뻐근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덧 초록색 선이 수평선에 걸쳐 있었다. 곧 여명이 온다는 것을 알리는 새벽 신호였다.

하지만 발각될 걱정 없었다. 그동안 부지런히 돌아다닌 덕분에 필요한 정보를 전부 얻은 것은 물론이고 리처드와 동부군이 있는 중앙지역까지 당도했으니 말이다.

여명이 오기 전 가장 어둡고 조용할 때다. 늪을 조용히 빠져나온 나는 아무런 빛도 들지 않는 습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저 멀리 동부군이 지은 진지가 보였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하지만 이상하게 초병은 보이지 않았고 횃불 또한 켜져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문득 불안한 생각을 떠올린 나는 걸음을 서둘러 진지로 다가갔다.

“머나먼 곳, 나는 보았네. 황금으로 일렁이는 보리밭과 하나뿐인 우리의 고향을.”

그 순간 노래가 들려왔다. 가냘픈 목소리는 옅게 낀 안개만큼이나 먹먹했다. 노래를 쫓아 걸어가자, 중무장한 동부군과 기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지막 노래를 듣고 있었다.

“이삭 푸른 내, 바삐 웃는 새. 동부로 향하는 별 아래 뛰노는 계절이 왔다네.”

다들 패잔병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눈빛만큼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고향, 내 가족, 전장 전 맡을 수 있는 마지막 그리움이었다.

“불운한 죽음도, 고귀한 삶도, 모두 이곳으로 오라. 고향은 아픔 없는 요람이오, 웃음뿐인 관이네······. 웃음뿐인 관이네.”

어떤 병사는 눈물을 훌쩍였다. 또 어떤 병사는 은은한 웃음을 머금으며 목걸이에 입술을 맞추었다. 동부군은 최후의 출격 직전, 마지막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선조들이 잠든 땅을 꾹꾹 밟아라. 황금시대 찬가를 부르자. 기다리던 오늘이 왔다.”

다 함께 읊조린 마지막 구절이 끝이 났다. 고요함이 찾아오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리처드가 그들은 향한 경의를 표했다. 동부군은 무기를 쥐고 함께 일어섰다.

그들에게 동부란 무엇이었을까. 토지, 바다, 강, 고향, 집, 가족, 분명 많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단연컨대 정체성이라는 말만큼 어울리는 단어는 없었다.

우리가 인간으로 죽는 한,

동부는 영원히 자유로울 것이다.

척! 척! 척! 척!

리처드 왕과 기사들을 필두로 동부군은 진군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습지를 포위하고 있는 오크 군단, 승리가 아닌 증명을 위한 전쟁을 위해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리처드 폐하!”

조금만 더 늦었어도 만나지 못할 뻔했다. 그들의 각오를 재확인한 나는 길을 막으며 리처드를 불렀다. 하지만 깜짝 놀란 동부 기사들은 황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아, 늪을 빠져나오느라 행색이 말이 아니었구나. 나는 진흙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을까 하다가 이내 빠르게 포기했다. 품에는 더럽혀지지 않은 상징이 하나 있었다.

펄럭!

소중히 간직한 깃발을 품에서 꺼냈다. 마치 흰 눈을 닮은 새하얀 깃발에는 북방 왕국과 기사왕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눈투성이는 이것만을 건네 달라 부탁했다.

터벅, 터벅, 터벅.

리처드가 기사들을 밀치고 걸어 나왔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벗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흉터로 가득한 얼굴 사이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지난 과거, 북방과 동부는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현실이라는 핑계로 형제를 외면하고 영원하리라 다짐했던 맹약을 끝내 지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 순간 과거를 잊지 않고 과오를 바로 세웠으니, 새로운 왕들을 위한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리처드는 떨리는 손으로 깃발을 받아들었다.

“맹약을······.”

“그래, 기사왕이 왔다.”

전율이 이뤘다. 기사왕이 직접 왔다는 소리에 동부군은 벅찬 눈물을 흘렸고 리처드는 무거운 고개를 떨구었다. 깃발은 더러운 손때가 묻었지만, 그것이 더 어울렸다.

* * *

“흐흐, 먹을 게 물밖에 없어서요.”

“괜찮다.”

천막을 열고 들어온 리처드는 꿉꿉한 냄새를 풍기는 온수 한잔을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이것이 소중한 식수임을 아는 나는 한 방울 한 방울 조심스럽게 삼켰다.

이제야 몸이 좀 녹는 기분이다. 불을 쬐며 흙을 닦아낸 나는 온수를 깔끔하게 비웠다. 그리고 선물을 받은 대가로 품속에서 직접 그린 습지 지도를 보여 주었다.

“적군 위치를 확인해라.”

광범위하게 조성된 습지를 중심으로 내부는 동부군이 밖으로는 오크군이 있다. 그리고 조금 동떨어진 절벽에서는 눈투성이와 북방군이 돌격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려 죽일 속셈이었군요.”

“승리를 확신한 거지.”

보급이 끊긴 것을 알고 있는 오크 입장에선 급할 필요가 없었다. 놈들은 이미 진지 공사를 시작했고 지금, 지도를 보는 이 순간에도 포위망은 더욱더 촘촘해지고 있었다.

“한 지점을 뚫을 생각이었나?”

“네, 기사들이 있으니까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불리한 상황은 몰라도 이른 시기는 적절했지.”

여기까지 동부군을 살려온 리처드답게 전장을 보는 눈이 훌륭하다. 아마 나였어도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 한 지점을 뚫고 습지 바깥 아군과 합류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적들이 알지 못하는 북방군의 존재가 있다. 무려 기사왕이 이끄는 북방 기병대는 오크 군단의 목을 찌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지도에서 눈을 뗀 나는 천막 밖을 살폈다. 습지는 여전히 눅눅하고 기분 나쁜 안개가 맴돌고 있었다. 물론 이 안개는 놈들이 점거한 지역에도 자욱하게 끼어 있을 것이다.

“안개는 얼마나 오래가지?”

“한 번도 갠 적이 없어요.”

습지는 특수한 환경이다. 거기다 시야를 방해하는 안개까지 동반했으니 이 전장은 온통 변수투성이였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나는 리처드를 향해 말했다.

“포위망을 뚫어야겠다.”

“역시 쿠트나 방향으로······.”

“아니, 북방군이 있는 절벽으로 간다.”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반격할 기회가 있다면 적에게 최대한 큰 피해를 주어야 한다. 그것이 오크 본대를 공격할 기회라면 더더욱 말이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북방군이 방향을 잡을 거다. 그 틈에 우리는 전진한다.”

“서로가 합류하는 지점은.”

“적 본대다.”

망치와 모루가 아닌 망치와 망치다. 우리는 안팎으로 뚫고 들어온 강철 동맹군은 적 본대를 그대로 찍어 버리고 포위망을 빠져나간다. 나는 지도 위에 서둘러 선을 그었다.

“시간은 오늘 밤.”

전장을 관통하는 선이다. 이 선만이 적의 숨통을 끊고 불리한 상황을 뒤집어줄 계기가 것이다. 오크 놈들을 몰아내고 동부를 되찾을 결전, 나는 하늘 아래 천명했다.

“해가 뜨기 전 전쟁을 끝낸다.”

반격을 가한다는 소식은 동부군 전체를 향해 전해졌다. 비록 들고 있는 검날이 나가고 창이 나갔지만, 그들은 강철보다 단단한 신념을 품고 오늘 밤을 기다렸다.

‘전투 준비.’

그렇게 최후라고 생각했던 해가 허무하게 물러갔다. 새로운 밤이 찾아온 것을 확인한 나는 얼굴을 재로 칠한 동부군과 함께 습지 속 안개로 조용히 숨어들었다.

까악! 까악! 까악!

어둠이 찾아왔다. 안개가 더욱더 짙다. 놈들이 세운 횃불은 흐릿했고 감시탑 또한 주변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피의 냄새를 맡고 온 까마귀 한 마리가 시작을 알렸다.

“······여기 있습니다, 경.”

한 동부 기사가 내게 활과 화살을 넘겼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화살 끝에 기름을 적신 천을 묶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북방군이 있는 하늘을 향해 발사했다.

퓽!

하늘 위로 유성우가 거슬러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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