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검은머리 기사왕 141화
북방이 동부를 지원한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그 지원군이 이렇게 빨리 당도할 것이란 것은 오크 황제 티그막조차 안배하지 못했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별다른 전조는 없었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겨울 눈보라와 함께 나타난 북방기병대는 후방을 점거하고 있던 오크 부대를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궤멸시켜버렸다.
악에 받친 공격에 그 손속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하늘에서 내리는 눈조차 그 위를 덮어주지 못했다. 협곡 초입은 그렇게 놈들이 흘린 피로 웅덩이를 이루었다.
하지만 승리를 만끽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급하게 숨만 돌린 북방군은 전장이 정리되자마자 곧바로 협곡을 가로질렀고 드디어 관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까악! 까악! 까악!
“- - - - - - - - -.”
주황빛 노을 너머로 까마귀가 운다. 하늘에는 여전히 검은 연기가 자욱하다. 처참하게 무너진 협곡 관문을 마주한 북방군은 그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강철 동맹이 함께 건설한 협곡 관문은 어디 가고 파괴된 성벽과 불타오른 시체만이 남았는가. 코끝을 찌르는 탄내는 그날 벌어졌던 전투와 참상을 떠올리게 했다.
“내부로 진입하라.”
척!
하지만 분노조차 차가워져야 할 때다. 가장 먼저 이성을 되찾은 눈투성이는 신속하게 진입을 명령했다. 그러자 북방군은 주변을 경계하며 무너진 성벽을 넘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오크 군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보급 기지를 철저하게 약탈한 놈들은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더 이상 판단한 모양이다. 나는 곧바로 안장 위에서 내렸다.
탁!
스슥.
곳곳에 시체 구덩이가 보인다. 오크 놈들답게 포로와 시체를 구분 없이 집어넣어 통째로 불태워버린 것이다. 차가운 분노를 삼킨 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재를 만졌다.
“반나절.”
마지막 부대가 떠난 지 겨우 반나절이 지났다. 우리가 후방 부대와 전투를 벌이는 절묘한 순간 관문을 떠난 것이다. 오크 군단은 철저하게 동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스승님.”
“잠시 숨 좀 돌려라.”
수도부터 협곡까지 쉴 틈 없이 달려왔다. 투구를 벗은 눈투성이는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눈동자 또한 많이 지쳐있었다. 나는 수통을 내밀며 휴식을 권했다.
꼴깍, 꼴깍.
곧 해가질 것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반나절 전 이곳을 떠난 오크 부대를 추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왕에게는 적절한 조언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
“놈들은 약탈한 보급 물자를 전부 가지고 있을 거다. 아마 동부군과 대치 중인 전선으로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겠지.”
예상치 못한 관문 함락으로 모든 연락망이 혼돈을 겪는 중이다. 그렇다는 건 지원군을 온 우리조차 리처드와 동부군이 어떤 움직임을 취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소돔 방어? 턱도 없다. 전면전? 허무맹랑하다. 평원 전투에서 동부군은 절대로 오크 군단을 이길 수 없다. 아마 최후방까지 몰려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한다.
“······만약 추격한다면.”
“동부군을 발견할 수 있다.”
후방 보급 부대를 추격하는 것만큼 동부군을 찾는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내 조언을 적절하게 받아들인 눈투성이는 모두가 수긍할만한 현실적인 결정을 내렸다.
“3시간 뒤에 출발할게요.”
“충분하다.”
3시간이면 체력을 회복하기 적당한 시간이다. 다들 강행군으로 많이 지쳐 있었을 것이다. 야간 행군이 결정된 것을 확인한 나는 북방군 전체를 향해 휴식을 명령했다.
“이만 쉬어라.”
북적거림과 함께 임시 숙영지가 건설되었다. 피곤해 보이는 눈투성이를 독려한 나는 주변을 경계한다는 핑계로 숙영지를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바로 무너진 성벽이었다.
수성에 능한 북방 왕국은 성벽을 쌓는 기술이 무척이나 뛰어나다. 그런 집약체를 동원한 것이 바로 동부 입구인 협곡 관문이었는데 쉽게 무너진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폭음을 들었습니다.’
협곡 관문이 함락되는 날 강한 폭음을 들었다고 증언한 백색 관문 병사들이 있다. 흐릿한 기억 속 무언가를 떠올린 나는 지반이 무너져내린 성벽을 향해 다가갔다.
킁킁.
기름 냄새는 아니다. 진한 탄내와 매캐한 냄새······. 분명 대륙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질적인 것들뿐이다. 마른 침을 삼킨 나는 단검을 뽑아 그을림을 서걱서걱 긁었다.
흑색화약이었다.
* * *
하나 된 아래 뭉친 오크 군단은 막강함을 넘어 대륙 최고의 군사 집단으로 변해갔다. 동부를 집어삼키는 포식과 전쟁을 향한 광기가 고스란히 전력으로 변모한 것이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병력을 모아 방어선을 구축해도 오크 군단은 파도처럼 몰려와 동부군을 쓸어버렸다. 평원에선 오크를 상대할 수 있는 군대는 없었다.
함락당하는 소돔, 불태워지는 마을,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오크 군단 앞에 왕국은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남은 희망은 오직 동부왕 리처드뿐이었다.
“폐하.”
“나는 괜찮다. 병사들에게 주어라.”
“드셔야 합니다.”
각지에서 벌어지는 약탈로 인해 보급은 끊긴 지 오래다. 당연히 동부군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음식은 최대한 양이 많게 보이도록 끓인 묽은 수프가 전부였다.
떠다니는 거라곤 옅은 기름띠뿐이구나. 어쩔 수 없이 그릇을 받아든 리처드는 수프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마저도 다른 병사들에게는 감지덕지하는 상황이었다.
“놈들은?”
“일단 진군을 멈췄습니다.”
빽빽한 숲과 험난한 산이 많은 북방과는 달리 동부는 평원이 주를 이는 곳이다. 덕분에 지형적 이점을 볼 수 있는 게릴라전과 지연전은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피난민이 대피할 시간이 필요했던 리처드는 어쩔 수 없이 공격과 퇴각을 반복하며 물러났고 결국 쿠트나와 그리 멀지 않은 습지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리처드는 고개를 떨구었다.
“포위당했군.”
“······폐하.”
오크 군단은 진군을 멈춘 것이 아니다. 그저 불필요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동부군을 포위했을 뿐이다. 아마 적 지휘관은 열약한 보급 상황도 알고 있을 게 뻔했다.
리처드는 두 손을 펼쳐 보았다. 말라붙은 피와 상처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보다 아픈 것은 이 손으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습지에 또 한 번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저 멀리 지겨운 선전이 들려온다.
[항복하라! 살길은 오직 그뿐이다! 지금 무기를 내려놓으면 죄는 묻지 않겠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싸운 죄? 후손을 위해 왕국을 재건한 죄? 아니라면 불의 앞에 저항하고 정의를 똑바로 세우려고 한 죄란 말인가.
리처드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동부군은 지친 얼굴로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망마저 사라졌을 때 심연보다 지독한 어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륵.
리처드는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투구 위에 달린 새겨진 문양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동부를 수호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쓴 왕관은 여전히 마음속에 빛나고 있었다.
“······병사들을 살려야겠다.”
“폐하?”
헬레나는 분명 쿠트나 부군에 민병대를 집결시켰을 것이다. 거기까지 길을 낸다면 나머지 동부군을 살릴 수 있다. 자신이 직접 포위망을 뚫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꾸욱.
손바닥은 주먹이 되었다. 심장은 강철이 되었다.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킨 리처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개가 걷히고 해가 밝아오는 내일, 마지막 운명을 걸 것이다.
* * *
새벽이 되자마자 관문을 떠난 북방군은 오크 놈들이 남긴 흔적을 뒤쫓았다. 그리고 여명이 떠오르기 직전 본대와 합류하려던 보급 부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적을 몰살하라!’
예상이 적중했다. 후발 주자인 놈들은 관문을 깡그리 약탈한 물자를 본대로 옮기고 있었다. 우리는 놈들은 발견하자마자 북방기병대를 앞에서 빠르게 기습했다.
‘도망쳐! 도, 도망!’
‘제발······! 끄아아아악!’
그동안 수많은 화마와 학살 현장을 본 북방군은 악에 받쳤다. 그리고 그 악은 고스란히 전투력으로 변모하니, 오크 부대는 말 그대로 남김없이 몰살을 당했다.
‘리처드와 동부군이 포위당했다.’
하지만 통쾌한 승전과는 반대로 작전 문서를 통해 알아낸 동부 상황은 최악이었다. 리처드 왕이 이끈 동부군이 뒤로 밀리다 못해 습지에 포위를 당하고 만 것이다.
놈들이 과연 항복하지 않는 적을 살려두겠는가. 동부군 전멸은 물론이고 리처드 왕까지 죽임을 당하게 생겼다. 조급해진 우리는 곧바로 습지를 향해 진격했다.
두두두두두두두 - - -!!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지형, 날씨, 체력, 이 모든 것을 무시한 우리는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더 달려 습지 근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푸르륵! 푸륵!
쉿! 다들 고개 숙여!
해가 진 하늘은 어두웠다. 덕분에 절벽 위에 진을 친 북방군은 습지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습지 전체를 포위한 수많은 횃불과 천막들은 오크 군단이 확실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습지 중앙을 관찰했다. 그러자 그곳에도 옅은 횃불 몇 개가 작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리처드 왕이 이끄는 동부군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다.
“후우······.”
어머니 북방이시여, 감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마찬가지로 상황을 파악한 눈투성이가 눈동자를 살벌하게 빛냈다.
“바로 돌격할까요?”
“진정해라.”
누구를 닮았는지 너무 호전적이다. 나는 움찔거리는 눈투성이를 진정시키며 다시 습지를 바라보았다. 마침 습지는 어두운 밤공기와 함께 안개가 짙게 끼고 있었다.
“내가 다녀오마.”
“네? 혼자요?”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는 양측 군대가 반드시 공조해야 한다. 지금은 적을 향한 무모한 야습보다는 지원군이 왔음을 알리고 함께 싸우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여럿은 걸리적거린다.”
전서구는 없다. 전령은 가다가 죽을 것이다. 저 사지를 은밀하게 뚫고 동부군과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눈투성이는 그제야 이해하며 답했다.
“······부탁드릴게요, 스승님.”
“신호를 기다려라.”
나는 곧바로 안장 위에서 내려 망토와 갑옷을 벗었다. 그리고 검과 비수 여러 개를 챙긴 뒤 안개가 짙어지기를 기다렸다. 지금이다. 어둠이 조용히 어둠으로 스며들었다.
스르륵.
탁!
젊은 시절 밥 먹듯이 했던 것이 암행이다. 순식간에 절벽에서 뛰어내린 나는 짧은 부유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몸은 가볍게 돌아 나무줄기를 붙잡았다.
대롱, 대롱.
포위망이 빽빽하다. 저 사이를 걸어갔다가는 습지로 들어서기도 전에 발각될 것이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 나는 나무줄기에 매달린 채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마침 습지와 이어지는 늪이 보인다. 깊은 늪이 가지고 있는 수렁 탓에 오크 놈들도 그 부근은 다가가지 않고 있었다. 저곳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놓았다.
풍덩!
차가운 물이 온몸을 적신다. 눅눅한 수초 냄새와 진흙이 손발을 더럽혔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반갑게 늪을 받아들이며 심연 보다 깊은 어둠으로 스며들었다.
소리를 지워라. 냄새를 숨겨라. 나는 마치 악어처럼 머리만을 내밀었다. 그리고 횃불을 들고 있는 오크 놈들을 피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늪지로 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