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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40화 (140/181)

140화

검은머리 기사왕 140화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히히힝!

“폐하!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리처드 왕이 동부군을 이끈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 주군의 걱정한 한 호위 기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외쳤다.

“괜찮다!”

하지만 리처드 왕은 단호히 거부하며 고삐를 쥐었다. 모두가 사활을 건 전장에서 자신만이 특별취급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이랴!”

리처드는 다시 말을 몰았다. 그리고 기사들과 함께 곧 동부군이 도착할 소돔 근방을 선회했다.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길과 거리에는 피난민 행렬이 줄을 이었다.

다각, 다각, 다각!

폐하께서 오셨다!

인구가 많은 동부 왕국답게 피난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본 리처드는 그대로 말을 몰아 소돔 수비군이 모여있는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피난은 얼마나 더 걸리겠는가?”

“최소 하루는 더 필요합니다, 폐하!”

현재 협곡 관문과 가장 인접한 곳에 있는 소돔은 북방과 동부 무역을 책임지는 무역 도시다. 그만큼 많은 물자가 있었기에 오크 군단의 최우선 목표가 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벽이 허술한 소돔과 근방은 방어선을 구축하기 마땅한 장소가 아니었다. 일단 적군이 진격할 교통이 너무나 편했고 인구 밀집이 심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대학살이 일어나고 만다. 일찍이 대대적인 피난 명령을 내렸던 리처드는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그리고 짧은 독려와 함께 피난민 행렬을 향해 달려갔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리, 리처드 폐하다!

폐하! 저희도 싸우게 해 주십시오!

무려 리처드 왕조가 시작되었던 소돔이다. 그의 자부심이 있던 주민들은 동부왕을 반기며 결사 항전을 외쳤다. 하지만 리처드는 몰려오는 사람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대들의 뜻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위해 죽을 때가 아니다! 살아서 만나자! 동부를 위해서!”

동부를 위해 살아서 만나자. 그 말 한마디에 소요 사태는 빠르게 잦아들었다. 주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고 이내 통제를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꾸욱.

그래, 살아서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한동안 피난민 행렬을 지켜보던 리처드 왕은 고삐와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호위 기사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로날드는 경은 소식이 있는가.”

“······죄송합니다, 폐하.”

동부군 퇴각도, 소돔 피난민도, 전부 기사 로날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리처드는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을 알면서도 계속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피난민 행렬이 멀어진다. 리처드는 홀로 선 평야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호위 기사들은 서둘러 사방을 몸으로 가려 왕의 눈물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철컥!

이토록 눈물마저 무거운 자리였다. 투구로 얼굴을 가린 리처드는 다시 말을 몰아 소돔을 향해 달려갔다. 감정을 채 추스르기 도전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이,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협곡 관문이 함락당했다는 소식에 수도 두피디아는 난리가 났다. 동부 방어선인 관문 함락은 곧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던 리처드 왕의 패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왕이 죽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그 때문인지 혼란스러운 수도 치안은 날이 갈수록 악화하였고, 도시와 근방 마을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정말 왕이 죽기라도 한 걸까? 거짓말처럼 연락이 끊긴 전방 소식에 왕국 신하들과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각 영지를 다스리는 지방 영주들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모두 당신들 탓 아니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먹구름이 드리웠다. 중심을 잃은 신하들은 싸우기 바빴으며 수도는 지원군은커녕 치안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벅차 보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파국으로 향하기 직전이었다.

쾅!

그 순간 문이 열렸다. 한참 언성을 높이던 신하들은 문을 부실 듯 열고 등장한 한 인물 앞에 깜짝 놀랐다. 왕비 ‘헬레나’. 그녀가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등장했다.

“이 무슨 추태입니까?”

무장한 헬레나는 동부 까마귀를 이끌던 그 시절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서슬이 퍼런 눈동자와 목소리 앞에 한참 언성을 높이던 신하들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실력이면 실력, 명분이면 명분, 그 어디 하나 모자람이 없는 그녀다. 리처드 왕의 아내이자 동부 까마귀 수장인 헬레나는 이 혼란을 수습하고 통제할 최적의 인물이었다.

헬레나는 호통쳤다.

“당장 유언비어를 퍼트린 자들부터 잡아들이세요! 제가 직접 목을 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왕비 전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직접 목을 치겠다는 살벌한 명령에 근위병들은 서둘러 군례를 올렸다. 홀 내부는 어느새 왕실의 위엄이 혼란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원군 편성은 어찌 되었죠?”

“그, 그게 병력이 부족······.”

“병력이 부족하면 전쟁은 끝입니까? 당장 수도 민병대부터 소집하세요!”

리처드 왕이 지휘하는 전방은 지원군 하나가 절실한 상황이다. 급히 소집한 민병대라도 보내야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방 왕국의 지원을 기다릴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왕비 전하!”

지원군과 보급 물자 편성, 치안 강화, 병력 징집, 정말 해야 할 것투성이다. 순식간에 왕실을 휘어잡은 헬레나는 대륙 전역 지도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영주들은 아직도 답이 없군요.”

“······다시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적극적으로 리처드 왕을 지원하는 영주들이 대다수인 반면 얌체처럼 거짓 보고만을 울리며 눈치를 살피는 영주들이 있었다.

역시 사람의 본성은 위기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 이 기회에 종양을 도려내고자 한 헬레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뇨, 조용히 통보하세요. 전쟁이 끝나면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요.”

왕국의 위기를 외면하는 것이 반역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는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서기는 급히 서신을 작성해 동부 전역으로 보냈다.

‘리처드 폐하를 지원하라.’

동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올바른 선택을 했을 때, 올바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법, 눈투성이가 던진 눈송이는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굴러갔다.

* * *

두두두두두두 - - - - !!

저 멀리 백색 관문이 보인다. 보병들과 잠시 떨어져 달려온 북방 기병대는 왕국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후방 병영에서 한 무리 기수들이 급히 달려왔다.

“기사왕 폐하를 뵙습니다!”

뒤를 이어 백색 관문을 책임지게 된 남자는 무척이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과거 주된 성문을 책임졌던 북방군 부장이 진급을 거듭한 끝에 늑대의 후임자가 된 것이다.

“다들 잘 버텨 주었습니다.”

“······아닙니다, 폐하.”

졸지에 존경하는 총사령관을 잃고 홀로 남겨진 백색 관문이다. 상실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눈투성이는 그들과 일일이 손을 잡아주며 짧은 위로를 건넸다.

마음 같아서는 더 오래 체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급히 물자를 보급받으며 숨을 돌렸다. 투구를 벗은 눈투성이가 조용히 물었다.

“관문 밖 상황은 어떻습니까?”

“저희를 향한 공격은 멈췄습니다. 아마 동부로 모든 전력을 집중한 모양입니다.”

백색 관문은 뚫리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오크들 입장에선 괜한 병력을 소모하는 것보다 관문이 뚫린 동부를 공격해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서둘러야겠군요.”

적의 모든 전력이 동부로 향하고 있다. 조용히 읊조린 눈투성이는 한숨과 함께 다시 투구를 썼다. 그러자 관문 사령관이 급히 병력을 호출하며 고개를 숙였다.

삐익!

“원거리 부대가 필요할 것 같아 활에 능한 병사들을 급히 차출했습니다. 부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십시오, 폐하.”

“정말 고마워요.”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끌어모았을 증원군 앞에 눈투성이는 기꺼이 감사함을 표했다. 무거운 숨을 돌린 우리는 다시 안장에 올라탔다.

척, 척, 척, 척!

뿌우우우우우우 - - - -!!

“서둘러 합류하라!”

마침 뒤쫓아오던 보병대가 도착했다. 관문 궁병대를 합류시킨 우리는 곧바로 동부로 떠날 준비를 끝냈다. 사방에서 펄럭이는 깃발과 함께 육중한 백색 관문이 열렸다.

덜컹! 쿠르르르르릉- - - -!

마침 해가 드리운다. 육중한 문이 열리며 성문이 가리고 있던 빛이 우리를 반겼다. 성벽 위 병사들이 관문을 빠져나가는 기사왕 부대를 향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쿠쿵, 쿠쿵, 쿠쿵,

우리는 무엇을 증명하는가. 이 땅 위에 죽어간 선조와 형제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한다. 야만의 시대, 암흑의 나날, 이 모든 것은 한낱 과거 이야기가 될 것이다.

* * *

“젠장, 부럽구먼.”

협곡 초입 방어를 책임지게 된 배불뚝이 장군 그록은 불타오르는 협곡 관문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놈도 태생이 오크인지라 약탈과 전쟁이 절실한 것이다.

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무력도, 부대 규모도 형편없는 그록이 나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그록은 바닥에 걸쭉한 침을 뱉었다.

크륵!

다른 전사들도 의욕을 잃기에는 마찬가지였다. 경계를 서는 둥 마는 둥 후방을 지켜보던 오크 서전트는 급기야 무능력한 그록을 향해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대장! 정말 이대로 끝인가!”

“나! 못 돌아간다! 싸운다!”

전장에서 싸우지 않으면 오크가 아니다. 이대로 고향에 맨손으로 돌아갔다가는 환영은커녕 쫓겨나게 생겼다. 그록을 향한 불만이 사방에서 빗발치는 아우성으로 바뀌었다.

“조용히 해! 시끄럽다!”

다른 오크 장군이었다면 곧바로 목을 쳐 상황을 진압했을 것이다. 하지만 튀어나온 배만큼이나 무력이 약했던 배불뚝이 그록은 무작정 막사로 도망만 치려 했다.

땡! 땡! 땡! 땡! 땡!

“적이다! 적군이 온다!”

그 순간 감시탑 위에 올라가 있던 한 초병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렸다. 놈이 가리킨 방향에는 오크 전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적군이 이곳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전쟁이다!”

눈보라가 거세다. 병력 규모와 깃발을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뭔 상관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적이 왔다는 것이고 굶주린 오크 전사들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군, 전투태세!”

“우아아아아아아 - - - -!!”

둥, 둥, 둥, 둥!

그록은 곧바로 전투태세를 명령했다. 그러자 본대에선 함성이 터져 나왔고 오합지졸로만 보였던 오크 전사들과 서전트는 순식간에 대열을 이루기 시작했다.

규모가 작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오크 기준이다. 관문과 이어지는 협곡 초입에는 어느새 초록색 물결이 넘실거렸다. 그록은 육중한 배를 출렁이며 선두로 걸어갔다.

“궁병대! 발사 준비!”

“오우! 오우!”

그나저나 무슨 부대지? 이 방향은 동부가 아닌 본토와 북방일 텐데 말이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그록과 그 부하들은 일찍이 해야 했던 생각을 뒤늦게 하고 말았다.

후우우우우웅 - - -!!

“크륵!”

“켁!”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온 돌풍으로 인해 자세가 흔들리고 말았다. 순간 자욱하던 눈보라 사라지고 평원을 달려오는 한 무리 병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펄럭!

깃발이 당당하게 흔들리고 있다. 입맛을 다시던 그록은 선두에 휘날리는 깃발 문양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동시에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다.

“아, 아······!!”

기사왕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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