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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39화 (139/181)

139화

검은머리 기사왕 139화

협곡 관문은 동부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곳만 철저하게 막으면 동부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협곡이 뚫리면 동부만큼 쉬운 먹잇감은 없었다.

연쇄적인 붕괴였다. 성벽이 무너져 내리자마자 진입한 오크 군단은 나머지 왼쪽 성벽과 관문 그리고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내성마저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퇴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동부군은 뒤로 물러나는 즉시 산발적으로 흩어졌고, 전장은 아비규환으로 돌변했다. 사방에서 적과 교전하는 고함과 비명이 아우성쳤다.

로날드가 처절하게 외쳤다.

“폐하! 갑옷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리처드는 동부왕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덕분에 1순위 대상이 되어 온갖 저격과 공격을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오러를 사방으로 뿜어내며 단호하게 외쳤다.

“갑옷을 보고 모이는 자들이 있다! 기사단! 내게 깃발을 다오! 어서!”

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때는 바로 군대가 후퇴할 때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리처드는 한 기사가 힘겹게 들고 있던 왕국 깃발을 뺏어 들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펄럭!

고삐를 내려친 리처드가 동부를 상징하는 깃발을 펄럭이며 전장을 질주했다. 그러자 속수무책 도망치던 동부군 병사들은 하나둘 그 뒤를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폐하를 보호하라!”

실전으로 다져진 판단이다. 위험하더라도 왕을 믿고 따라야 한다. 로날드와 동부 기사단은 리처드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필사적으로 쳐내며 길을 뚫어 주었다.

“리, 리처드 폐하다!”

“이쪽이야! 이쪽으로 모여!”

전장 상황이 워낙 불리해서 그렇지 동부군은 더 이상 오합지졸 군대가 아니다. 뒤따라온 동부 병사들은 어느새 동부 깃발 아래 대열을 이뤄 재집결을 끝내 가고 있었다.

이대로만 잘 버텨 주면 나머지 병사들도 합류할 것이다. 단내가 올라오는 숨을 훅 뱉어낸 리처드는 고개를 들어 올려 검은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관문을 바라보았다.

화르륵! 챙! 채앵!

내성을 돌파한 오크 군단은 보급품이 쌓여 있는 후방 기지를 약탈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돌적인 놈들 특성상 퇴각하는 동부군을 잡기 위해 진군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동부군이 재집결하고 후퇴하기 위해서는 오크 군단을 저지하고 따돌려 줄 군대가 필요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리처드는 결국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진격을 저지할 군대가 필요하다! 움직일 수 있는 병사를 추려서 방어를······!”

“폐하를 후방까지 호위하라!”

하지만 리처드의 명령이 채 끝나기 전 노년 기사 로날드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동부 기사들을 향해 호위를 명령한 뒤 대열을 이룬 병사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로날드 경?”

“폐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건 왕이 아닌 기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저곳은 사지다. 세상 그 어떤 기사가 주군을 사지로 내몬단 말인가. 왕으로서 역할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기사가 그 역할을 할 때다. 순간 리처드 표정이 어두워졌다.

“······불허한다.”

태어날 때부터 기어코 동부왕이 되었을 때까지 자신과 온갖 고생을 함께해 온 기사 로날드다. 그는 단순히 기사임을 넘어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자 아버지였다.

“폐하.”

로날드는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백발 머리가 휘날리며 흉터와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이 드러난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년 기사는 이제 막 개화한 젊은 왕을 바라봤다.

“꼭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니 쉬이 무너지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굳건히 버틴다면 북방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러 올 겁니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노년 기사가 내뱉은 각오는 기사의 정수였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검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 로날드는 그대로 뒤돌아 달렸다.

“집결 부대는 나를 따르라!”

동부군을 이끌고 패배한 전장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자 하얗게 변한 세상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심장을 울렸던 그 외침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우리를 기억해 주시오, 동부의 기사여! 오늘 우리가 무엇을 위해 죽는지!’

거친 귀리 경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광경은 이토록 아름다웠구나. 노년 기사 로날드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앞에 펼쳐진 기사의 길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려갔다.

* * *

지난 승리로 숨을 돌린 북방 왕국은 빠른 요새 재건에 들어갔다. 아무리 적을 물리쳤다고 해도 저 바다를 떠도는 엘프 여왕이 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거기다 괴멸 직전까지 갔던 군을 재편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군도 편제해야 했다. 우리는 회색 늑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몰려드는 행정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협곡 관문 함락.’

하지만 동부에서 날아온 전서구 한 통은 모든 행정을 멈추게 했다. 눈투성이는 즉각 비상 회의를 소집했고 우리는 해안 요새로 뒤로 한 채 수도로 바삐 달려갔다.

‘전원 소집하세요.’

단순한 국무회의가 아니다. 수도로 입성한 기사왕은 대신들을 포함한 모든 관료, 기사를 그레이트 홀로 모았다. 그리고 왕좌에 앉기도 전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동부로 지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웅성웅성.

그 순간 그레이트 홀은 웅성거리므로 가득해졌다. 그것은 기사왕을 향한 거역이나 의심이 아닌 현실적인 대책을 세우려는 움직임이었다. 한 관료가 고개를 숙였다.

“폐하, 동부 왕국 또한 상당한 병력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관문이 점령당했다고 해도 아직 여지가 있을 겁니다.”

“시기를 늦추란 말인가요?”

“······북방 방위도 벅찬 상황입니다, 폐하. 저희는 오크를 상대할 병력이 없습니다.”

관료의 말이 옳았다. 그동안 전선을 3개나 홀로 감당했던 북방군은 회색 늑대와 허스칼, 그리고 요새 방어군을 포함한 수많은 형제를 어머니 곁으로 보내야 했다.

그나마 재상이 급히 파견한 시민군들 덕분에 숨을 돌린 것이지 원래라면 요새 재건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북방 왕국은 현재 반격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관료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무리 기사왕이라고 해도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원한다면 모든 북방인들이 따르겠지만, 그들 또한 북방을 사랑하는 구성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눈투성이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속에는 초조함과 더불어 비참함이 섞여 있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관료와 기사들은 똑같은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후우우우웅 - - -.

그레이트 홀은 쌀쌀했다. 겨울과 함께 찾아온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추위를 느낀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홀 한가운데 있는 화로를 향해 다가갔다.

타닥, 탁.

화롯불이 약하다. 나는 바닥에 놓인 땔감을 하나 주워 그 위에 넣었다. 그러자 불은 거짓말처럼 땔감을 삼키며 타올랐다. 곧 따뜻함이 그레이트 홀을 감싸 안았다.

“그날과 똑같지 않은가.”

“······경?”

시선이 내게 모였다. 나는 화르르 타오르는 화롯불 너머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순간 선왕을 모셨던 시절, 동부를 지원하지 못했던 기억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원은 불가합니다, 폐하!’

‘당장 관문을 지키는 것도 한계입니다!’

똑같다. 동부가 공격받았던 과거 왕과 우리는 지원을 고민하고 있었다. 선왕은 지원 의지를 강하게 표했지만, 미래를 걱정한 우리가 그 의지를 꺾고 만 것이다.

그렇게 북방은 동부를 버렸고 강철 동맹은 함께 몰락했다. 그리고 나는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다. 그날 앞으로 나서지 못했던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 말이다.

‘짐은 그리 생각한다.’

선왕의 목소리가 나와 선명히 겹쳤다.

“우리는 선으로 이어져 있다. 그 선은 선조가 지켜온 유대이며 투쟁이 만들어 낸 결집이다. 그런데 그 선이 지금 끊기려 한다.”

“북방이 패배하는 날이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정의가 쓰러지고 불의를 외면하는 날. 그래, 결속이 희미해진 지금이다.”

본질을 잊지 마라. 우리는 뿌리가 있다. 선왕이 외쳤던 말은 시대를 넘어 내 입으로 전해졌다. 과거가 지난 현재, 같은 공간, 같은 풍경이 화롯불과 함께 불타올랐다.

“우리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잔재가 회상을 만든다. 이 땅 위에 남아 있던 사념이 가슴 속 깊이 가라앉았다.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인 가운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기사왕 눈투성이였다.

터벅, 터벅, 터벅.

어느덧 두려움은 사라졌다. 두 눈동자에는 그 어떠한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왕좌에서 일어난 눈투성이는 모든 이들을 지나쳐 화롯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지원군을 편성하세요.”

중요한 것은 선택의 결과가 아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냐이다. 무거운 침묵이 웅성거림을 대신하였을 때 관료와 기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굳센 지지를 보냈다.

운명은 불꽃과도 같은 것, 아무리 맹렬히 타오른다고 한들 찰나로 기억될 뿐이다. 하지만 그 재 속에서 태어나는 새가 있으니 우리는 그 새는 죽지 않는 신념이었다.

“동부를 돕겠습니다.”

* * *

최소한의 방위는 해야 하는 탓에 많은 병사는 데려가지 못한다. 대신 수성전에서 활용하기 힘든 흰 뿔 사슴 기병대만큼은 지원군에 아낌없이 포함할 수 있었다.

일단 요새 전투에서 살아남은 정예 북방 기병대를 전부 차출했다. 그리고 지원을 위해 달려온 시민 기병대와 승마 경험이 있는 병사들 또한 전부 지원군으로 편성했다.

하지만 기병대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수도를 방위하는 시민군을 포함해 각 영지에서 보내 준 소수 군대와 합류했다. 그러자 최소치를 맞춘 지원군이 탄생했다.

현재 동부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빠른 속도가 중요했다. 지원군은 딱 동부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에 보급 물자만을 챙긴 뒤 수도 스노우가든 앞에 집결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와 눈투성이가 없는 사이 재상과 검은 화살이 북방을 지켜 줄 것이다. 성벽으로 몰려든 수도 시민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 지원군은 그대로 백색 관문으로 남하했다.

척, 척, 척, 척.

조용한 행군이었다. 길을 걷는 병사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북방을 지나쳤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일지도 모르기에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척이나 소중해 보였다.

“스승님.”

“음?”

긴 전쟁으로 몸도 마음도 지쳤다. 누군가를 잃어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눈투성이는 매해 같은 웃음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겨울이네요.”

“그래, 또 겨울이구나.”

또 같은 겨울이 찾아와 또 같은 눈을 내린다. 변해가는 세상 속 유일하게 바뀌지 않는 건 이 겨울뿐이다. 눈투성이가 된 눈투성이는 손을 모아 조용히 기도했다.

“다음 겨울도 왔으면 좋겠어요.”

슬퍼 보이는 미소 안에 희망이 깃들어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이와 같은 기도였다.

“꼭 올 거다.”

우리가 다음 겨울에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어머니 북방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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