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검은머리 138화
허스칼 회색 늑대는 오러의 사랑을 받는 남자였다. 그것은 감히 재능이라 불리는 영역을 아득하니 넘었기에 북방 왕국 모든 무인은 늑대에게 시사를 받고자 했다.
‘이건 불가능하오.’
그러나 성취하는 이는 많아도 인내하는 이는 드물었다. 북방 기사와는 수련법이 다른 회색 늑대는 안개처럼 피상적이며 그림처럼 추상적인 가르침을 내렸기 때문이다.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는 것. 오러로 가득한 세상을 오직 나만이 볼 수가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회색 늑대가 스스로를 ‘최후의 허스칼’이라 부르는 이유였다.
‘오러가 보여요!’
하지만 눈투성이는 달랐다. 아이는 회색 늑대의 가르침을 인지하고 적용할 줄 알았다. 그 뜻을 말해 줄 수 없는 추상적인 느낌조차 스스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통제하지 않았다.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아이가 오러를 보고, 오러를 쥐고, 오러를 느끼는 것에서 회색 늑대는 확신했다. 눈투성이는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또 다른 늑대.’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오러를 극으로 이끄는 비결은 막강한 통제도, 오랜 세월이 걸리는 축척도 아닌 모든 것을 담을 줄 아는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어디 하나 어머니 북방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니 너 또한 오러가 이룬 세상을 사랑하라. 회색 늑대는 자애를 가르치고 느끼게 해 주었다.
그렇게 눈투성이는 왕으로 성장했다. 기사로 성장했다. 또한, 허스칼로 성장했다. 그렇기에 회색 늑대는 죽음이 다가온 그 순간 웃으면서 어머니 곁으로 떠날 수 있었다.
“······오러가 느껴져요.”
순백 밀로 감싼 관을 눈투성이가 쓰다듬는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회색 늑대의 오러를 느끼며 웃음을 짓자, 또르르 떨어진 눈물이 서글픔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제 익숙해져야 하는데.”
수많은 이가 죽었다. 회색 늑대도 그 많은 죽음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아이에게 있어 늑대의 죽음은 심장 한쪽을 뜯어내는 고통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네요.”
익숙해진다는 말만큼 두려운 것이 있던가. 이 슬픔은 영원히 가져가야 한다. 비통함으로 새긴 무덤 위 늑대 문양처럼 심장 속 지워지지 않은 각인을 하나 새긴다.
우리는 기억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세월 속 파편도, 기록되지 못할 역사도, 우리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 가장 용맹했던 허스칼이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말이다.
“······제 경의를 받으세요.”
눈투성이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왕의 망토를 손수 벗어 관을 소중히 감싸 안았다. 그곳에는 병사들이 놓고 간 수많은 밀과 함께 상처투성이 대검이 놓여 있었다.
사르륵.
눈투성이 손 위로 오러가 피어오른다. 오로지 파괴만을 위해 사용되었던 오러가 살아 숨 쉬었다. 꽃잎처럼 휘날렸다. 첫눈처럼 내렸다. 어머니 북방이 찾아오셨다.
파르르륵.
나비를 닮은 오러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우리를 포함한 북방군 전원은 그 광경을 올려다보며 꿈에 젖었다. 긍지, 명예, 그리고 허스칼. 회색 늑대가 남긴 유산이었다.
* * *
엘프 여왕은 대패했다. 그나마 멀쩡한 선박을 추려 북방 바다로 후퇴하기는 했지만, 병력을 채 반절도 실지 못해 대다수 패잔병을 해안가에서 놓고 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바보가 침략자 놈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협상하기 위해 온 사신을 단칼에 죽인 눈투성이는 그대로 병력을 이끌어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다.
‘모조리 죽여라!’
회색 늑대는 존경받는 지휘관이었다.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분노한 북방군은 악귀가 되어 달려들었다. 결과는 당연한 승리, 해안에는 참혹한 복수극이 벌어졌다.
포로는 없었다. 모조리 목이 잘려 궤짝에 실어 보냈다. 그 궤짝을 전달받은 엘프 여왕은 당연히 분노했지만, 차마 재상륙하지는 못하고 바다를 맴돌 뿐이었다.
곧 불멸왕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원정군 후퇴를 앞둔 서부 전선은 재건과 동시에 관문으로 향할 지원군을 편성하며 때 이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북방과 관문을 넘어 동부까지 전해졌다. 오랜만에 서신을 받게 된 리처드 왕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작게 고여 있었다.
북방이 승리했다는 것은 분명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승리는 회색 늑대의 희생으로 이룬 결과였기에 침통한 얼굴을 한 로날드는 리처드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위대한 전사였습니다, 폐하.”
“동감하오.”
그가 살린 백성만 해도 수만 명이다. 아니, 넓게 보아 왕국 전체를 구한 것이니 그 공적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리처드와 로날드는 마음을 다해 명복을 빌어 주었다.
후우.
이제 그 의지를 동부도 받들 차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리처드는 로날드와 주변 지휘관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왕좌 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문 상황은 어떠한가?”
“무척 순조롭습니다.”
“다들 잘 버텨 주고 있는 덕이죠, 하하.”
협곡 관문을 방어하는 동부군 병사들은 서서히 실전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받아온 혹독한 훈련과 의지가 시너지를 일으켜 전체적인 탄력을 받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오크 군단 전력 대부분이 집중되고 있는 협곡 관문은 위태롭기는커녕 성공적으로 농성을 펼치고 있는 상태였다.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늦겨울까지만 버텨 주시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처음부터 목적은 전투의 승리가 아닌 전쟁의 승리였다. 북방보다는 덜하지만, 겨울은 겨울. 기온이 낮아진 협곡은 공성전을 치를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머릿수가 엄청난 오크 군단이 아닌가. 저 많은 입을 먹여 살리려면 보급품이 바닥을 드러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모든 상황이 청신호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모두 이만 전장으로······.”
쿵!
쿠르르르릉 - - -.
“음?”
짧은 회의가 끝났다. 하지만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전장으로 향하려던 그 순간 갑작스러운 진동이 발아래서 느꼈다. 지진? 아니다. 지진이라고 하기에는 단발적이었다.
탁, 탁, 탁, 탁!
쾅!
“폐하!”
순간 복도를 뛰어온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리처드는 본능적으로 검을 챙겨 일어났다. 그리고 성벽이 내려다보이는 창밖을 바라봤다.
“불?”
검은 연기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화공이라고 하기에는 불이 너무나 옅다. 검은색 그을림이 남은 성벽 앞에는 사지가 절단된 병사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탁, 탁, 탁!
커다란 굉음과 진동!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다. 이를 악문 리처드는 서둘러 성벽을 향해 달렸다. 그러자 급히 뒤따라온 호위 기사들이 외쳤다.
“폐하! 위험합니다!”
“시끄럽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다. 분명 위험한 무언가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 호위 기사를 뿌리친 리처드는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간 리처드는 관문 성벽 위로 올라섰다.
끄아아악, 내 다리!
대, 대열을 유지하라!
탄내가 진동한다. 알 수 없는 공격을 받은 부상병들이 사방에 즐비했다. 도대체 무엇이 아군을 공격하였는가. 리처드는 성벽 밖을 향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콰아아아아앙 - - - -!!!!!!!
그 순간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휘말려 폭사했다. 그리고 그동안 굳건하게 버텨 주던 오른쪽 관문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 * *
“오크 제국이여! 영원하여라!”
“황제 폐하를 위하여 - - -!!”
나무통을 짊어진 수백 명 오크가 관문을 향해 돌격했다. 물론 관문 위에선 화살이 쏟아졌지만, 마약에 잔뜩 취한 놈들은 몸에 꽂히는 화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아!”
후퇴는 없다. 표적은 오직 성벽이다. 나무통을 짊어진 수백 명 오크는 성벽 아래 몸을 처박았고 이내 횃불을 들었다. 광기와 함께 나무통 속 내용물이 폭발했다.
쾅, 콰쾅! 쾅!
쿠릉- - - -!!! 콰르르르!
세상이 흔들렸다. 아군을 희생하는 자살 폭탄 공격에 오크, 인간 할 것 없이 폭사하고 말았다. 잔혹한 명령을 내린 오크 황제 티그막은 벌떡 일어나 쾌재를 불렀다.
“됐다!”
오크 연금술사들이 막대한 자금과 시간을 들여 완성한 검은 가루가 정말로 통했다.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린 황제 티그막은 서둘러 오크 장군들을 향해 명령했다.
“전 군단 일제 공격하라!”
뿌우우우우우우 - - - -!!
튼튼하게 지은 관문답게 무너진 지점은 굉장히 좁았다. 하지만 오크는 물보다 많으니 걱정은 없었다. 거대한 뿔피리 소리와 함께 오크 군단이 성벽을 향해 몰려들었다.
챙! 챙! 채앵!
끄아아아악!
여기가 뚫리면 전부 끝이다. 리처드 왕의 지휘를 받은 동부군은 서둘러 파이크 방진을 구성했다. 그리고 뚫린 성벽을 향해 달려가 몰려오는 오크군을 틀어막았다.
물러서지 마라!
대열을 끝까지 지켜!
휴식을 취하던 예비대까지 동원되었다. 리처드 왕 손수 지휘하는 것도 모자라 선두에서 싸우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렇게 잠시 오크군 진입을 틀어막는 듯했다.
뿌우우우우 - - - -!!!
하지만 용맹도, 분투도 숫자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가장 큰 이점이었던 관문 성벽이 무너진 순간 리처드 왕이 이끄는 동부군 패배는 결국 시간문제였다.
척, 척, 척, 척!
쿠쿵! 쿠쿵! 쿠쿵!
초록색 물결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물결은 서서히 관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오크를 막기 위해 분투하는 동부군을 보며 티그막은 소리 내서 웃었다.
“크하하!”
저 성벽을 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오크와 물자가 소모되었는가. 그동안 아껴 두었던 비장의 수가 통하자, 무너졌던 자신감과 의지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선왕을 그대로 빼닮으셨소!”
승리는 단합을 만드는 법이다. 그동안 묘한 불신으로 티그막을 바라보던 고관 대신과 오크 영웅들은 제국을 이끄는 황제를 향해 과도한 칭송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아 - - - !!
챙! 채앵! 서걱!
크륵!
기세가 솟구친다. 광기라는 고삐가 풀렸다. 그동안 패배주의로 병들어 있던 오크 전사들은 인간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울부짖었다. 그래, 우리는 오크! 바로 오크다!
내성으로 후퇴하라!
저돌적인 공격 앞에 파이크 방진이 우수수 무너진다. 지휘관들은 다른 성벽은 점거당하기 전 후퇴를 명령했고 동부 기사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선두로 달려갔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살아 있는 병사, 죽어간 병사, 아직 싸우려는 병사, 그 모두 녹색 물결에 휩쓸려 관문 내성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협곡 관문 반파.’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주변을 맴돈다. 하지만 그 사이로 날아오른 전서구는 총사령관을 잃은 백색 관문을 향해 애타게 날아갔다.
‘오크 군단 본토 침공.’
오크가 동부 협곡을 돌파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북방을 강타했다. 기사왕 눈투성이는 슬픔을 채 추스르기도 전 다시 검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추운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