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검은머리 기사왕 137화
눈투성이는 엘프 선봉군이 침입할 때 사용했던 해안 절벽을 역이용했다. 놈들이 총공격할 때와 맞춰 검은 화살과 부랑자 부대를 무방비한 후방으로 침투시킨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대성공. 시뻘건 화마는 원정군 선박을 집어삼켰고, 검은색 연기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요새 앞 엘프군은 당연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화르르!
하지만 계획된 혼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름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밀봉한 항아리가 여지없이 불을 일으키자, 요새로 진입했던 엘프군은 안팎으로 단절되었다.
“전군! 돌격하라!”
스르릉!
기회는 지금뿐이다. 모든 작전이 성공한 것을 확인한 눈투성이는 직접 검을 뽑아 들었다. 내성으로 후퇴하던 북방군을 그대로 뒤로 반전해 엘프군을 향해 진격했다.
챙! 채앵! 서걱!
끄아아아악!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최후의 결전이다. 지금만큼은 자랑스러웠던 명예도, 터전을 지키는 숭고함도 희미해졌다. 남은 것은 악뿐이다. 다 쉬어 버린 목소리 뒤로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서걱! 콰직!
그리고 그 진창 한가운데에는 눈투성이가 있었다. 적을 베는 것도 모자라 얼굴을 손잡이로 찍고 투구 사이로 단검을 찔러넣는 육박전은 너무나 능숙해 보였다.
“후욱, 훅!”
고고한 장미가 아닌 진흙 속 피어난 연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다 스승의 가르침이다. 기사왕은 북방군과 함께 진창을 뒹굴며 적군을 성문 앞쪽으로 밀어붙였다.
“북방 기병대! 용맹을 증명하라!”
때마침 요새 우측 병영에서 출발한 북방 기병대가 도착했다. 신호를 받은 기병대는 요새 안뜰을 가로질러 달려와 적이 도망치려는 측면을 그대로 들이박았다.
콰직! 쿵!
아비규환이었다. 마침 불어온 건조한 바람은 화마를 더욱더 키웠고 탈것을 옮겨둔 요새 외곽은 아예 통째로 타올랐다. 안쪽에 고립된 엘프군의 운명은 불 보듯 뻔했다.
“폐하!”
“저는 괜찮아요! 다른 이들을 돌보세요!”
치열한 육박전에서 몸이 성할 리가 없다. 눈투성이는 생채기가 난 얼굴을 대충 닦으며 다가오는 기사를 뿌리쳤다. 그리고 재빨리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전장을 살폈다.
와아아아아아 - - - -!!
챙! 채앵! 끄아악!
일단 계획대로 진행되었던 화공 덕분에 전세는 북방군이 유리했다. 하지만 그동안 중첩된 사상자와 전쟁 피로는 아군 측에도 큰 손실을 끼치고 있는 상태였다.
반나절 이상 버티지 못한다. 여기서 최대한 큰 피해를 주고 내성 안으로 퇴각해야 한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수도를 구원하기 위해 떠난 스승님이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나는 기사왕이다.’
어깨가 무겁다. 심장이 뜨겁다. 익숙해지지 않는 두려움이 아직 잔재하고 있다. 하지만 왕으로서 모든 것을 털어낸 기사왕 눈투성이는 적을 향해 맹렬히 돌격했다.
“폐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와아아아아아아 - - - -!!
패배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왕이 함께하는데 북방군이 어떻게 패배하는가? 개인이 죽을지언정 우리는 산다. 북방군은 처절한 고함을 내지르며 적을 밀어붙였다.
챙! 채앵!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어내면 후퇴할 수 있다. 1시간 같은 1분이 초를 다한다. 시시각각 삶과 죽임 교차하는 전장 한가운데 들리는 것은 오직 조용한 이명뿐이었다.
서걱!
“- - - - - - -?”
하지만 그 순간 균열이 생겼다.
쾅! 서걱! 서걱!
끄아아아아악
순식간이었다. 병사 수십 명의 목이 잘리며 한 돌풍이 북방군 사이에 난입했다. 일렁이는 오러와 엄청난 존재감.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한 놈들은 오만하게 웃었다.
“아, 아아······!”
쾅! 서걱!
엘프 영웅들이 왔다. 화마를 뚫고 넘어온 놈들은 사방으로 오러를 뿌리며 북방군을 학살했다. 그 막강한 위용 앞에 깜짝 놀란 기사 중 하나가 반격을 명령했다.
“기사단! 적을 저지하라!”
엘프 영웅이 무려 다섯이나 왔다. 하지만 아군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나선 북방 기사들은 왕국에서 배운 오러와 검술을 이용해 엘프 영웅들을 저지하려 했다.
챙! 채앵!
이제 겨우 6년밖에 수련하지 못한 북방 기사들이 상대될 리가 없었다. 10수를 나누기 전 기사 한 명이 목이 잘렸고 나머지 기사도 같은 꼴이 되기 직전이었다.
파스스스!
애써 지켜오던 균형이 무너졌다. 엘프 본대가 가진 진정한 위력 앞에 북방군은 다시 한번 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꽃이 있었다.
탁, 채앵!
“- - - - - - - -!!”
바람처럼 나타난 기사왕 눈투성이가 엘프 영웅들을 막아섰다. 마치 곡예를 펼치듯 모든 공격을 튕겨낸 왕의 검에선 놈들에게 밀리지 않는 백색 오러가 솟아올랐다.
치지직, 칙!
오러가 피를 태운다. 잔상처럼 넘실거리는 아우라는 고고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북방의 기사왕인가. 엘프 영웅들은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찌르르르르.
감히 입을 열 수가 없다. 여기서 기사왕을 죽여야 원정군이 산다. 엘프 영웅들은 살의를 사방으로 내뿜으며 검을 겨눴다. 다섯이 동시에 달려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치지지지지직, 탁!
“폐, 폐하를 보호하라!”
죽음을 각오한 북방 기사들이 둘을 묶었다. 하지만 저지선을 가볍게 뿌리친 나머지 세 놈은 눈투성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으로 만들어낸 오러가 가냘픈 목을 노렸다.
챙! 챙! 서걱!
파스슥, 칙!
하지만 가볍게 고개를 돌리자 목 바로 옆으로 오러가 스쳐 지나간다. 오직 본능으로 공격을 피해낸 눈투성이는 손바닥 위로 검을 돌려 북방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챙, 채앵!
검은 머리가 휘날린다. 북방 검술이 선보이는 실체와 잔상은 마치 검무를 추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움직임이 공격과 방어라는 것이다.
“이, 이익!”
“혼자 달려들지 마!”
무려 3:1이다. 서부를 주름잡던 엘프 영웅이 겨우 인간 하나를 처리하지 못해 밀리고 있었다. 검술이면 검술, 오러면 오러, 모든 것에서 눈투성이가 압도하고 있었다.
“······사각을 노려라!”
결국, 남은 것은 비겁한 합(合)격뿐이다. 방해하는 북방 기사를 죽여 버린 나머지 두 놈이 합류하자, 엘프 영웅들은 서서히 포위망을 넓히며 보이지 않는 사각을 놀렸다.
챙! 챙!
짧은 찰나 수십 번 공격이 가해진다. 평범한 이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빠른 검을 눈투성이는 막고 또 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슬슬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서걱!
오러 다발이 하필 눈 밑에 생채기를 냈다. 시야가 한순간 흐려진 눈투성이는 결국 등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입 밖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쿨럭!”
붉은 강철이 만들어 준 갑옷이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 눈투성이는 빠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주변은 어느덧 아군의 시체로 가득했다.
끄아아악!
후퇴하지 마라!
기사는 죽었고 왕은 홀로 남았다. 전력과 사기가 뒤집힌 북방군은 뒤로 밀리고 또 밀려 내성 앞에 포위되었다.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단어는 단 한 가지였다.
‘전멸.’
검을 쥔 눈투성이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동요를 눈치챈 엘프 영웅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포위망을 좁혔다. 날카로운 오러가 눈투성이를 향해 휘둘러졌다.
다섯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피할 곳도 막아낼 여지도 마땅치 않다. 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눈투성이는 끝까지 분전했지만, 마지막 사각은 결국 막아내지 못했다.
“······이제 죽어라, 기사왕.”
푸욱!
왼쪽 어깨가 그대로 꿰뚫렸다. 오러는 사방으로 뿜어져 내부를 찢어 버렸다. 갑옷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붉은색 피, 그 마지막 광경은 죽어가는 북방군과 교차했다.
“쿨럭!”
시야가 흐릿해진다. 꿰뚫린 어깨는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보다 아픈 것은 절망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검과 병사들의 슬픔이었다.
‘어머니 북방.’
북방은 여기서 끝이다. 우리는 거스르지 못한 운명을 마주하고 있었다. 엘프 손에 죽었던 선왕처럼 새로운 기사왕 또한······. 눈투성이는 떨려오는 눈동자를 감았다.
‘스승님.’
아무도 없다. 오로지 혼자다. 끝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 스스로 펼쳐야 하는 날개인가? 서서히 어두워지는 심연 속, 피투성이 눈투성이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웅크렸다.
“포기했는가.”
기사왕이 스스로 눈을 감았다. 그것이 포기라고 생각한 엘프 영웅은 끝을 직감했다.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 주마, 오러가 실린 검이 무방비한 목을 향해 쇄도했다.
쿵!
“······페아노르?”
그 순간 날아가던 검이 목 바로 앞에서 멈췄다. 의문을 느낀 엘프 영웅이 동료를 불러보지만, 검을 든 페아노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뿐 움직이지 못했다.
뚝.
바람이 그쳤다. 하늘 또한 멈췄다. 전쟁을 어지럽히던 소리, 비명, 상황, 모든 것이 메두사를 맞이한 듯 멈춰 버렸다. 그리고 엘프 영웅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치지직, 또르륵.
눈투성이는 어느새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엘프들이 마주한 눈동자에선 눈물 같은 오러가 뚝뚝 흘러내렸다. 오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주체할 필요가 없었다.
서걱!
순식간이었다. 가장 처음 변화를 눈치챈 엘프 영웅 하나가 검과 함께 목이 잘렸다. 오러는 먼지처럼 흩어지고 눈투성이가 잘라 버린 목은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오러 마스터!”
왕의 길을 걷던 아이에게는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 검술을 가르쳐준 검성, 그리고 오러를 가르쳐준 회색 늑대. 잿빛 숲에서 죽은 오러가 기사왕을 통해 숨 쉬고 있었다.
쾅! 쨍그랑!
오러 검을 휘둘렀다. 엘프 영웅 둘이 검을 맞대며 막았지만, 완성 단계로 접어든 오러 앞에 속수무책 밀려나고 말았다.
츠즈즈즉!
오러가 오른쪽 손과 검을 넘어 온몸을 하얗게 물들인다. 타오르는 그 모습은 마치 날개를 펼친 흰색 나비와도 같았다.
“도, 도망쳐!”
서걱! 두둥실!
상대할 수 없다. 검성과는 또 다른 괴물이다. 변화를 눈치챈 엘프 영웅들은 서둘러 도망쳤지만, 순식간에 따라붙은 눈투성이는 또 다른 한 놈을 베어 죽였다.
많은 병사가 북방을 지키기 위해 죽었다. 저 아래 쌓여 있는 시체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오러가 흘러내리는 눈동자에는 푸른색 귀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우웅 - - - - !!!
그리고 때마침 들려온 뿔피리 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이끌었다. 요새 밖 언덕, 그 위에 펄럭이는 깃발 하나. 겁에 질린 한 엘프군 병사들이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검성이 돌아왔다!”
수도를 돕기 위해 떠난 검성이 지원군과 함께 돌아왔다. 보란 듯이 깃발을 들어 올린 검성과 시민기병대는 해안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 - - -!!
검성, 엘프들에게 있어 악몽이나 다름없는 이름이다. 겁에 질린 원정군은 통제에서 벗어나 도망쳤고 그 모습을 본 요새 북방군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큰 공훈을 세운 눈투성이는 기쁘지 않았다. 도리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오러가 자신을 슬프게 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분명 경지를 성취해 이겼음에도 지독한 슬픔이 눈물을 흐르게 했다. 가슴 통증을 참지 못한 눈투성이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뒤를 부탁한다.’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투성이는 황급히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눈이 내리는 북방과 함께 오러가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