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검은머리 기사왕 136화
‘동토가 온다.’
고산을 타고 내려온 차가운 동(冬)장군은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인 해안 요새에 들이닥쳤다. 그 덕인지 맹렬하던 엘프군의 공격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콜록, 콜록!’
혹독하기로 유명한 북방이다. 거기에 지독한 겨울 날씨까지 겹쳐지자 따뜻한 서부에서 나고 자란 엘프군은 속절없이 동상에 걸리거나 지독한 질병에 앓아누웠다.
하지만 불멸왕이 우회에 성공했다고 철떡 같이 믿은 엘프 여왕은 찾아오는 겨울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퇴각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 게 끝이었다.
‘결착을 내야 한다.’
검성이 없는 해안 요새! 저기만 점령하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양측 군대는 서서히 짙어지는 겨울 날씨 속 마지막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타닥, 탁!
잠 못 이루는 밤이다. 오늘도 기사들과 함께 지휘탑 위로 올라온 눈투성이는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손을 녹이며 엘프 선박이 가득 한 북방 해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거처로 돌아가도 될 텐데 꼭 병사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눈투성이.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은 화살은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지휘탑으로 올라왔다.
“폐하, 몸 좀 녹이세요.”
“앗! 고마워요, 경!”
수줍게 웃으며 찻잔을 받아드는 모습은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다. 하지만 그 속에는 10번 전투에서 10번 모두 승리한 위대한 기사왕이 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검은 화살은 알고 있다. 모든 병사가 치열한 전쟁으로 지친 지금, 해안 요새를 지탱하는 것은 검성이 아닌 바로 이 작은 기사왕 눈투성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일이겠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폐하.”
겨울은 북방의 편이다. 이 추위가 길어지면 전쟁은 더 이상 치를 수 없다. 엘프군 사이에 부는 기류를 읽은 눈투성이는 당장 다가오는 내일이 결전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성문이 먼저 무너질 거에요.”
하지만 그동안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로 인해 요새 상황은 좋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성문이 그동안 받아 온 공격으로 인해 무너지기 직전까지 가 버렸기 때문이다.
성문이 무너지면 성벽, 성벽이 무너지면 다음은 내성, 그리고 내성마저 무너지면 어찌할 것인가. 모든 것이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해안 요새는 함락될 것이다.
그러니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쓰러지는 연쇄를 끊고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때를 말이다. 눈투성이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검은 화살과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요새에 기름이 얼마나 있죠?”
“기름 말씀이십니까, 폐하?”
“네, 모든 기름이요.”
신중하되 망설이지 마라. 이 자리에 검성은 없지만, 스승이 내렸던 가르침은 여전히 머릿속에 머물고 있다. 단호히 외친 눈투성이는 별 같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 * *
혹독한 북방 겨울, 시간이 지날수록 지체되는 보급선, 점점 병들어가는 병사들, 원정군을 이끄는 엘프 여왕은 전쟁은 더 이상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멸왕이 동쪽 바다로 우회한 이상 퇴각은 불가능했다. 원정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해안 요새를 점거하고 다음 봄이 올 때까지 버티고 있어야 했다.
선택권은 없었다. 마지막 남은 보급선까지 쥐어짠 엘프 여왕은 모든 본대를 해안에 상륙시켰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 전쟁을 끝내고자 마지막 공성전을 준비했다.
“신호를 보내라.”
펄럭!
일각수 위에 올라탄 엘프 여왕이 해안 요새를 차갑게 노려보며 외쳤다. 그러자 공격을 알리는 붉은색 깃발과 함께 신호수들이 일제히 전쟁 북과 진군 피리를 울렸다.
삐이이이이이이 - - - - !!
두둥! 두둥! 두둥! 두둥!
드디어 신호가 떨어졌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엘프 병사들은 들려오는 북소리에 맞춰 발을 뻗었다. 거대한 엘프 대군이 마치 한 몸처럼 나아가기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엄청난 위용이다. 북방 해안가를 가득 채운 대군이 밀물처럼 서서히 몰려왔다. 이 대군을 상대로 한낱 요새가 버틸 수 있을까. 엘프 여왕은 오만한 턱을 추켜들었다.
“적군 화살이다!”
“방패 방진! 아군을 보호하라!”
엘프 본대가 보여주는 위용 앞에 잔뜩 겁먹은 북방군은 산발적으로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튼튼한 방패 방진 앞에 막혀 무용지물이 되었다.
“궁병대!”
아무리 막으려 해도 태양 앞의 촛불이다. 요새가 일정 거리 안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엘프 여왕이 검을 추켜들었다. 그러자 방진이 열리며 엘프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사!”
끼이이이익, 퓽!
퓨퓨퓨퓨퓨퓽!
북방군과는 규모부터 다른 엘프 궁병대다.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수많이 화살이 시위를 떠나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 위에 내리꽂혔다.
끄아아아악!
방, 방진! 방진!
북방군은 서둘러 방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미친 듯이 떨어지는 화살 앞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성벽 위를 지켜야 할 병사들이 속수무책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전군!”
지금이 기회다. 잔뜩 웅크린 조류처럼 쏟아져 파도처럼 들이쳐야 한다. 목소리에 묵직한 오러를 실은 엘프 여왕은 서서히 나아가는 병사들을 향해 돌격을 명령했다.
“돌격하라!”
와아아아아아아 - - - - -!!!!!
성벽을 못 넘으면 끝이다. 이제는 악밖에 남지 않은 엘프군은 거센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을 감행했다. 그 모습은 마치 금색 파도가 요새에 들이닥치는 것 같았다.
덜컥, 덜컥, 덜컥!
공성 사다리가 걸린다. 기어오르는 엘프군을 저지하기 위해 북방군이 사력을 다한다. 하지만 잘 버티고 있는 성벽과 다르게 공성추가 향하는 성문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끼리리릭, 쿵! 쿵! 쿵!
뾰족하고 육중한 공성추가 연신 성문을 때린다. 또한, 별동대로 투입된 엘븐 가드들은 공성추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며 균열이 일어난 성벽에 오러를 꽂아 넣었다.
끼기기기긱! 쿵!
일촉즉발 상황이다. 눈투성이가 예상했던 대로 성문이 위험했다. 급히 달려온 북방군이 부러진 지지대를 세우려 했지만, 이미 시작된 균열과 붕괴는 막을 수가 없었다.
쿵! 콰직!
퓽! 퓨웅!
결국, 육중한 공성추가 성문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엘프군은 기다렸다는 듯 그 틈으로 화살을 발사했고 지지대를 들고 오던 북방군 일부는 그대로 쓰러졌다.
아아아악 - - -!!
지금이 기회다. 구멍을 뚫은 공성추는 천천히 물러나더니 다시 한번 앞으로 돌진했다. 그 순간 지지대가 무너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해안 요새 성문이 붕괴하고 말았다.
콰직, 쿵!
와아아아아아 - - - - - -!!
“성문이 무너졌다!”
겨우 저 성문 하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사와 물자를 소모했던가. 얼굴이 환희로 물든 엘프 여왕은 몸소 선두로 달려가며 연신 병사들을 독려했다.
챙! 채앵! 서걱!
끄아아아악!
“막아라!”
엘프군 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북방군이 서둘러 투입되었다. 방패를 앞세운 양측 방진은 겨우 반 발자국 움직일 수 있는 육박전을 펼치며 서로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 - - - -!!
하지만 한참 기세가 오른 엘프군은 지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간다. 전장을 맴돌던 기류가 맹렬한 기세로 바뀌기 시작했다.
서걱! 콰직!
죽어! 아아악!
이길 수 있다. 요새를 함락할 수 있다. 광기로 물든 엘프 병사들은 북방군을 연신 밀어붙였다. 그러자 무너진 성문 앞은 어느새 몰려온 엘프 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후퇴하라!”
성문이 완전히 빼앗겼다. 이제 성벽이 밀리는 건 한순간이다. 현장을 지휘하던 부장들과 북방 기사들은 적을 막고 있는 모든 북방군을 향해 퇴각을 명령했다.
이제 남은 것은 내성뿐이다. 북방군이 일제 후퇴를 시작하자 굳게 닫혀있던 내성 문이 열렸다. 그 앞에는 아무런 호위를 받지 않는 기사왕 눈투성이가 서 있었다.
“- - - - - - - -.”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무너진 성문 사이로 엘프 여왕과 눈투성이는 눈이 마주쳤다. 도망치는 너의 군대가 보이는가? 여왕은 마치 보란 듯이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졌다, 기사왕.”
요새는 무너지고 왕국은 멸망할 것이다. 네가 그토록 꿈꿔 왔던 북방은 흔적조차 없이 멸망하리라. 엘프 여왕은 마치 선고를 내리듯 엘븐 가드를 향해 명령하려 했다.
픽.
“·········웃어?”
하지만 최후를 앞둔 기사왕은 울지 않았다. 도리어 검성을 그대로 빼다 닮은 웃음을 지으며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려 두었다. 순간 불길한 전율이 온몸을 강타했다.
“- - - - - - - - -!!!!!”
엘프 여왕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해안 바다에는 검은색 연기와 함께 시뻘건 화마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원정군이 타고 온 엘프 선박이 불타오른 것이다.
“후, 후방에 불이다!”
후방에 불이라니? 도대체 누가? 언제? 묵직한 충격이 강타했다. 누군가 내뱉은 처절한 외침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한참 승리를 만끽하던 엘프군을 흔들리게 했다.
“아아······!!”
원정군이 타고 온 선박이 타오른다. 후방 기지임과 동시에 서부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말이다. 검은 연기를 확인한 엘프군은 순간 공황 상태에 빠졌다.
“대열을 지켜라! 후퇴하지 마!”
“후방은 안전하다!”
가뜩이나 북방 환경에 지쳐 있던 엘프들이다. 종족 특유의 귀소본능과 짧은 혼란이 겹쳐 한순간 대열을 흐트러지게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쨍그랑! 쨍그랑!
기기긱, 퓽! 화르르륵!
냄새를 감추기 위해 담아 두었던 기름 항아리가 깨졌다. 동시에 불화살이 발사되어 외성 전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마로 인해 요새 안팎 엘프군이 단절된 것이다.
펑! 화르르륵!
끄아아아악!
스르릉!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는 것, 무려 외성을 대가로 적을 유인한 눈투성이는 드디어 검을 뽑았다. 그러자 퇴각하던 북방군은 일제히 뒤돌아 창과 방패를 앞으로 겨눴다.
척, 척, 척, 척!
선박을 지키기 위해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불타오르는 토끼 굴에서 함께 죽을 것인가? 이제는 너희가 하나를 선택해라. 양자택일을 던진 눈투성이는 외쳤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함께 복창한 북방군은 언제 겁을 먹었냐는 듯 돌격했다. 거기다 저 멀리 내성 안뜰에서 달려오는 북방기병대는 적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폐하! 후퇴하셔야 합니다!”
“시끄럽다!”
후방이 습격당했다. 전방은 단절되었다. 최악의 상황 앞에 엘븐 가드들은 퇴각 신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엘프 여왕은 눈동자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후방은 신경 쓰지 마라! 여기서 기사왕을 죽이면 우리의 승리다. 계속 돌격하라!”
두두두두두두두 - -!!
아직 엘븐 가드와 엘프 영웅들이 남아 있다. 이들을 선두로 길을 뚫는다면 기사왕을 죽여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여왕은 결국 직접 일각수를 몰아 요새로 돌격했다.
“- - - - - - - -.”
시선과 사선이 교차했다. 하얀 바람 위에 올라탄 눈투성이는 고고한 시선으로 모든 것을 내려다보았다. 엘프 여왕은 그 모습에서 기사왕과 검성을 동시에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