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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34화 (134/181)

134화

검은머리 기사왕 134화

시간이 흐름이라면 회색 늑대는 물이었다. 역사가 이끄는 방향으로, 상황이 원하는 속도로, 그렇게 한 남자는 단순히 흐르고 흘러 운명이라는 거대한 호수를 이루었다.

무엇하나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타고난 오러는 백 마디 말보다 무거웠고 이 세상은 검으로 해결 못 할 일이 없었다.

북방은 영웅을 원했기에 영웅이 되었다. 왕이 허스칼을 원했기에 허스칼이 되었다. 회색 늑대는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것이 공허해졌다. 늑대 운명을 따라 흘렀을 뿐이지, 무엇하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 옳은 일이었지만, 진심이 없었고 능동적으로 따랐지만, 수동적으로 이끌 뿐이었다. 그의 운명은 흐르지 않는 호수였다.

‘기사왕.’

그렇게 왕이 죽었다. 참담함은 느꼈어도 분노는 느끼지 못했다. 늑대는 그렇게 무리를 빠져나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나는 누구인가. 어머니 북방께서는 왜 회색 늑대라는 남자를 낳아 주셨는가. 긴 세월을 숨어 살며 오직 하늘만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그것이 정답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랬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개구리의 최후는 우물 속 고립이었다.

꼬르륵.

물이라는 운명에서 태어나 물이라는 운명에서 끝을 맺는다니, 이 얼마나 기구한가. 늑대는 흐려지는 자아를 느끼며 이제는 세상이라는 무리에서 빠져나오고자 했다.

‘너에게 왕이란 무엇이냐?’

‘아우르는 자다.’

하지만 그날 남자가 자신을 찾아왔다. 그는 작고 허름한 소녀를 데리고 와 기사왕과 왕국을 다시 세우자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타고나지 않은 신체를 극복하고 항상 불의에 맞서 빛나는 정의를 세우고자 했으니까.

포기하지 않는 근성, 부러지지 않는 강인함, 무리를 이끄는 진심. 모든 것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횃불 그 자체였다.

‘눈투성이는 왕의 재목이 확실한가?’

‘······그래,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들었다. 부러지는 검이 그리 약속했다.’

그리고 늑대는 남자를 통해 답을 들었다. 어머니가 주신 이 힘, 이 오러, 모두 이날을 위해 존재해 왔던 ‘회색 늑대’였다.

‘그렇다면 내 검을 받아다오.’

“대장.”

눈을 뜨자 겨울이었다. 잠시 쪽잠을 청했던 회색 늑대는 한 부대원이 내미는 건량을 받아 입에 넣었다. 마지막 식량이다. 눅눅하고 차가운 밀가루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얼마나 남았지?”

“저를 포함해서 40명입니다.”

한 부대가 출발해 이제 40명이 남았다. 전멸을 넘어 궤멸을 기다리는 허스칼 부대는 멀지 않은 곳에 흩어져 눈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저 부대원들이 전부였다.

“······고생했다, 전부.”

매복과 후퇴를 반복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함정, 무기, 계략, 기만책을 전부 총동원했고 불멸왕과 그 부대가 숲길을 진격하거나 쉴 수 없도록 수시로 괴롭혔다.

거기다 설상가상 잿빛 숲을 강타한 눈보라와 한파는 적군의 발을 제대로 묶었다. 따뜻한 서부 출신인 엘프 놈들이 추위와 환경을 이기지 못해 발이 묶이고 만 것이다.

덕분에 무려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버텨냈다. 물론 부대원들의 목숨을 대가로 얻어낸 결실이지만, 수만 명을 살릴 수 있는 선택이기에 허스칼은 모두 웃으면서도 죽었다.

재상이라면 지금쯤 모든 피난민을 수용하고 성문은 걸어 잠갔을 것이다. 그리고 검성 또한 멀지 않은 곳에서 오고 있을 테니, 우리의 임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바스락.

“다들 나눠 먹자고.”

“······흐흐, 감사합니다.”

마지막 식량이라고 자신에게 양보했을 것이 분명하다. 희미하게 웃은 회색 늑대는 얼마 남지 않은 건량을 잘게 쪼개 대기 중인 부하들과 함께 한입씩 나눠 먹었다.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면 목이 턱 막히면서도 음식을 녹이려는 침이 참으로 야속하다. 복잡한 감정이 감도는 잿빛 숲 사이에서 허스칼 부대는 쓴 내를 우물우물 씹었다.

후우우우우 - - - -.

하지만 그 순간 맹렬하게 불어오던 바람의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직 변덕스러운 겨울 날씨가 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회색 늑대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 - - - - - -.”

눈발이 약해졌다. 바람과 함께 거세게 불어오던 눈보라가 다른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챈 회색 늑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변했다.

“대장!”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전방에서 적군을 감시하고 있던 허스칼 부대원 한 명이 이쪽을 향해 다급히 뛰어왔다. 그는 창백하게 변한 얼굴로 적의 움직임을 알려 왔다.

“놈들이 움직입니다!”

잿빛 숲을 집어삼킨 눈보라 덕을 톡톡히 보았다. 적의 발을 묶는 것은 물론이고 길을 헤매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눈보라가 사라진 순간 그 족쇄는 풀리고 만다.

“방향은!”

“서쪽입니다!”

젠장, 우리가 지키고 있는 길과 완전히 반대쪽이다. 눈보라가 그친 것을 확인한 불멸왕이 기어코 빠져나갈 길을 찾은 것이다. 이대로 두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로 변한다.

막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눈보라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이를 악문 회색 늑대는 남은 부대원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결연한 눈으로 투구를 쓰고 있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 전투다. 명령 상관없이 눈보라가 몰려오면 곧바로 도망쳐라.”

대답은 없었다. 피투성이 몸으로 무기를 챙긴 마지막 허스칼 부대는 저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뒤돌아 달렸다. 목표는 숲을 빠져나가려는 불멸왕과 그 부대였다.

* * *

“······이 무슨 추태인가?”

헛웃음이 나왔다. 불멸왕이 그토록 자신했던 영광스러운 상륙도 명예로운 진격도 모두 허상이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빛을 잃은 갑옷과 더러운 행색뿐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뒤를 돌아보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엘븐 가드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고결하던 모습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이 끔찍한 북방의 겨울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럴 리가 없다.”

불멸은 신이다. 그중 자신은 왕이다. 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하고 존경받아야 할 존재가 한 줌 먼지보다 못한 숲과 인간 놈들에게 묶여 오도 가지도 못하고 있다.

“이럴 리가 없단 말이다.”

아니,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눈보라가 멎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자신이었다. 인간 놈이 외쳤던 동토란 이것이란 말인가. 불멸왕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 북방.’

이제 보인다. 하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반신과 신의 차이, 그 차이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멸왕은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것이 끝이더냐!”

불멸왕은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눈보라는 그쳤고 수도는 코앞이다. 네놈이 그토록 아끼던 자식들도 모두 도망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살육과 화마뿐이었다.

쿠르르르릉, 쾅!

분노와 함께 사방으로 오러를 발산한다. 마치 천둥과도 같은 힘이 잿빛 숲을 불태운다. 그리고 그것을 권능이라 생각한 불멸왕은 드디어 숲의 끝에 당도할 수 있었다.

화르르륵! 타탁, 탁!

모든 게 흐릿했다. 시야가 흐릿한 것인지 아니면 겨울이 만들어 낸 날씨 탓인지 세상은 백색으로 흐릿했다. 그 끝에는 이쪽을 향해 돌격하는 한 늑대 무리가 있었다.

끄그그극!

열이 오른다. 오러가 마치 전류처럼 빗발치고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정신없이 넘실거렸다. 불멸왕은 분노했다. 입을 열자 주체하지 못한 검은색 증오가 흘러내렸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늑대 무리가 불타오르는 숲으로 돌격해 온다. 그러자 흐릿한 시야가 환해졌다. 늑대 무리는 허상을 벗고 최후의 허스칼이 되어 있었다. 불멸왕은 꼭 묻고 싶었다.

“북방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쾅 - - - - -!!

검으로 오러를 발산했다. 불멸왕은 허공을 박차고 뛰쳐나온 회색 늑대와 검을 맞부딪혔다. 세상을 구성하는 한낱 필멸자라고 하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 * *

쾅! 콰아앙!

검풍이 몰아친다. 오러 파편이 튄다. 폐부에서는 연신 숨을 요구했지만, 그마저도 무시한 회색 늑대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순간 입 밖으로 거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쾅! 치지지직!

모든 힘을 내실은 일격을 가했다. 그것을 막아낸 불멸왕은 방어 자세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검은색 피를 내뱉은 쪽은 도리어 내상을 입은 회색 늑대였다.

쿨럭!

뚫리지 않는다. 놈은 여전히 강했고 오러는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과 다리,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피가 들끓는 목구멍은 그것마저 방해했다.

채앵, 챙! 쾅!

서걱! 컥!

주변을 살피자 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자신이 불멸왕을 막는 사이 허스칼 부대는 온몸을 던져 엘븐 가드를 저지하고 있었다. 물론 궤멸은 이미 정해진 결과였다.

후웅, 후웅.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피를 뱉어낸 회색 늑대는 대검을 양옆으로 한번 휘둘렀다. 그리고 굳건한 자세를 잡으며 날카로운 검 끝과 눈으로 불멸왕을 노려보았다.

후욱, 훅.

이제 슬슬 한계다. 이제 한 번 정도 싸울 오러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 놈을 저지하려면 살을 주고 뼈를 깎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 회색 늑대는 뛰쳐나갔다.

탁!

쾅!

또 한 번 일격이다. 이번은 단순한 공격이 아닌 적을 재는 허수다. 떠올려라, 검성이 어찌했는지. 머릿속에는 검성이 펼쳤던 북방 검술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후웅, 서걱!

“건방진······!”

오러를 흘리고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 과정에서 휘둘러진 대검은 불멸왕의 머리카락 가닥을 잘랐다. 놈이 분노한다. 사방에서 번개 같은 오러가 치고 검이 날아왔다.

‘오른쪽 가슴.’

치명적인 공격이다. 피하거나 막아야 한다. 회색 늑대는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최적의 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한 치 망설임 없이 불멸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걱!

피가 솟구친다. 빗나간 검은 가슴이 아닌 어깨를 베었다. 하지만 어깨 한쪽을 내어준 대가로 거리를 좁힌 회색 늑대는 놈의 갑옷을 한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었다.

치지지지직!

접촉한 오러가 맹렬히 반발한다. 내상을 넘은 오장육부가 뒤틀린다. 대신 놈이 검을 휘두를 기회를 뺏은 회색 늑대는 그대로 대검을 놓고 놈을 밀어붙였다.

“으아아아아아 - - - - -!!!”

쿵!

한 마리 짐승처럼 달려든다. 놈을 거대한 나무까지 밀어붙인 회색 늑대는 투구가 벗겨졌다. 사방으로 빗발치는 오러 탓인지 시야가 흐려지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치지지직, 칙!

까드드드득!

“······네놈이 졌다.”

이것이 최선이었다. 모든 힘을 쏟아부은 회색 늑대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상처조차 입지 않은 불멸왕은 사방으로 불길한 오러를 내뿜었다.

콰지지직!

쿨럭!

늑대가 가지고 있던 오러가 전부 소진되었다. 동시에 불멸왕이 내뿜은 막강한 오러가 회색 늑대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입에서 흐른 핏물이 천천히 온몸을 적셨다.

“놔라.”

불멸왕은 불쾌했다. 이 손을 떼어놓기는 너무나 쉽지만, 늑대를 굴복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놓아라, 스스로 의지를 꺾고 패배를 인정하라. 불멸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타닥, 탁.

잿빛 숲이 불타오른다. 피보다 붉은 화마가 모든 것을 태우고 있었다. 형제들이 전부 쓰러지고, 저 멀리 어머니가 보이기 시작할 때 회색 늑대는 핏발 선 눈을 감았다.

“도대체 왜지?”

손을 놓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탈해진 불멸왕은 끝내 물었다. 오크도 엘프도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이들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불멸자인 자신마저 모르는 것이었다.

충성인가? 명예인가? 아니면 긍지인가. 그런 허상을 좇아왔다니 참으로 바보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북방을 멸망시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이 가진 허상이었다.

치지지직, 푹!

불멸왕은 검을 들었다. 그리고 손을 놓지 않는 회색 늑대를 향해 찔러 넣었다.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관통당한다. 인간을 이루는 모든 것이 흩어졌다.

털썩.

힘이 빠진다. 무릎을 꿇는다. 회색 늑대는 저항 끝에 결국 손을 놓았다. 피투성이, 꺼져 가는 불, 회색 늑대는 서서히 빠져나가는 영혼 앞에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

“- - - - - -.”

“뭐?”

무언가를 읊조렸다. 무심하게 시체를 짓밟으려던 불멸왕은 그 읊조림에 귀를 기울였다. 긍지가 짓밟힌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최후의 유언을 듣고 싶었다.

푹!

회색 늑대가 무언가를 쥐었다. 그리고 불멸왕이 막을 수 없는 속도로 뻗어 복부를 관통시킨다. 그것은 형태를 이룬 날, 오러로만 이루어진 날카로운 검이었다.

“이, 이 무슨······!”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 늑대는 죽음을 앞두고 경지를 넘었다. 불멸왕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관통당한 복부를 바라보았고 이내 입 밖으로 피를 쏟아냈다.

쿨럭!

힘이 빠진다. 최후의 일격을 성공한 회색 늑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저 멀리 손짓하는 어머니 북방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간다. 마지막 숨이 조용히 끊겼다.

털썩!

행복한 꿈을 꾸었다. 고독했던 늑대가 무리를 이루는 꿈을 말이다. 그들은 저 드넓은 북방을 달리며 언제나 함께였다. 마치 눈투성이를 믿었던 우리처럼 말이다.

아우우. 새벽 하울링이 들리는가. 여명이 오면 보리는 흔들리고 나무는 손짓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다름이 아닌 다음 늑대가 뛰어놀 북방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춥고 아픈 겨울이 지나 눈을 녹이는 봄이 올뿐이다. 그토록 그리던 평온이 저 앞에 있다. 선조의 땅, 영광의 시대로, 늑대는 어머니 곁으로 간다.

내 뒤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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