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검은머리 기사왕 133화
후웅, 쾅!
오러와 오러가 부딪힌다. 그러자 유리 조각을 닮은 오러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피부가 찌르르 울리고 폐부가 눌린다. 하지만 단 한 시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아아아아 - - - -!!
검술, 기교, 속임수 없이 오로지 오러로만 가해지는 파괴적인 공격이다. 이미 한 마리 맹수가 된 회색 늑대는 불멸왕을 향해 미친 듯이 오러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츠즈즈즉, 쾅!
웃음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마치 가속을 받은 물체처럼 회색 늑대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불멸왕은 결국 검으로 향하는 오러 출력을 늘렸다.
서걱! 콰아앙!
자잘한 생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든 움직임이 적만을 향한다. 오러가 가장 늦게 깃든다는 회색 늑대의 눈동자는 마치 눈물처럼 푸른색 오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쾅!
치지지지직!
강한 일격이 작렬한다. 서로가 묵직한 한방을 가한 둘은 마치 정면으로 맞부딪친 조류처럼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후욱, 그동안 참고 있던 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 - - - - - - -.”
불멸왕은 두 눈을 의심했다. 비록 한순간이긴 하지만, 오러가 동급이었다. 채 100년도 살지 못한 한낱 인간이 반신이라 칭송하는 오러의 극을 발끝이나마 따라온 것이다.
이것을 과연 순수한 재능이라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현실을 초월한 의지라 보아야 하는가. 적을 우롱하던 불멸왕의 입은 어느새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치지직!
매번 확신이 든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항상 자신을 놀라게 한다. 그것은 좋은 방향이 아닌 원초적인 무언가를 건드는 부정적인 방향이다. 그러니 공존할 수 없었다.
“······죽을 자리임은 알고 왔느냐?”
참으로 어리석다. 자신이 지닌 능력을 알았다면 희생이 있더라도 결전을 위해 아껴두어야 했다. 하지만 미련한 북방 인간 놈들은 제 발로 사지까지 걸어 들어왔다.
쾅!
이제 봐주는 것은 없다. 적이 위험한 요소임을 확인한 이상 여기서 죽이고 간다. 모든 힘을 끌어올린 불멸왕은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힘껏 검을 내려찍었다.
쨍그랑!
단 한 수였다. 회색 늑대의 오러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오랜 기간 힘을 정제한 반신 앞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맞부딪힌 회색 늑대 오러가 마치 유리장처럼 깨져 버렸다.
“아무리 발악한다고 한들.”
챙! 챙! 쾅!
공격이 난무했다. 오러는 뽑는 족족 깨져나갔고 검은 그 잔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회색 늑대는 꾹 다물고 있는 입술 틈으로 검은색 피를 주룩주룩 흘려냈다.
“운명은 피할 길이 없구나.”
쿨럭!
결국, 내상을 입고 말았다. 오러 사용자에게 있어 내상은 곧 치명상, 그 피를 확인한 불멸왕은 비열한 눈동자를 빛낸다. 그리고 검풍을 일으키며 오만하게 발을 디딘다.
동족을 위해 길을 막은 용기는 가상하다. 하지만 그 가상함이 겨우 1시간을 벌어 주었으니 비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불멸왕은 검을 겨누며 빠르게 찌르고 들어갔다.
타닥, 쿵!
“대장! 지금이오!”
하지만 그 순간 시체 사이에 숨어 있던 피투성이 허스칼 부대원이 불멸왕을 덮쳤다. 죽음을 등한시한 그 발악은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불멸왕의 발목을 붙잡았다.
삐이이이익!
매복, 급습, 후퇴,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던 행동이었다. 누군가 찢어지는 피리를 힘껏 불자, 반쯤 잘려있던 거대한 나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쓰러졌다.
끼이이이이익! 쿠우웅!
파스스스스스!
“허스칼! 산개하라!”
혼란 위에 혼란을 끼얹었다. 이때만을 노린 허스칼 부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두 눈을 질끈 감은 회색 늑대 또한 짙은 눈보라 속으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몸이 멀쩡한 허스칼은 도망치고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허스칼은 적의 발목을 붙잡는다. 마치 한 무리 늑대를 보는 것 같은 철혈 앞에 엘븐 가드들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 - -!!!”
바로 눈앞에서 회색 늑대를 놓친 불멸왕은 분노 어린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분노를 다른 곳에 풀 듯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허스칼의 머리통을 무참하게 깨부쉈다.
서걱! 콰직!
발악은 발악이다. 남은 적들을 향한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화풀이하듯 사지가 찢기고 목이 날아가는 시체는 칙칙한 잿빛이었던 숲은 어느새 붉은 피로 물들였다.
터벅, 터벅.
“쿨럭, 컥!”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 얼굴을 악귀처럼 찡그린 불멸왕은 마지막 남은 허스칼 머리를 거칠게 짓밟았다. 그리고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고자 발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끄르륵, 큭, 큭!”
“······웃어?”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허스칼은 비명과 눈물이 아닌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그것은 방향성을 잃은 광기가 아니다. 뚜렷한 눈동자는 맹렬한 눈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북방의 겨울이 온다.”
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짙다. 날카로운 블리자드, 어머니 북방의 차가운 분노!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눈동자 사이로 침략자들을 향한 마지막 경고가 내려졌다.
“동토가 네놈을 삼키리라.”
아우우우우우우 - - - - -!!
잿빛 숲 회색 늑대가 울었다.
* * *
“걸음을 서두르시오!”
“마차는 버리셔야 합니다!”
북방 왕국의 수도는 하루가 멀다고 몰려드는 피난민들로 인해 북새통이었다. 불멸왕과 그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가뜩이나 불안하던 민심이 동요한 것이다.
하지만 재상, 기억하는 새는 최선을 다해 혼란을 수습하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도가 전복될 수 있는 위기 앞에 최후의 보루는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피난은 얼마나 진행되었죠?”
“반절쯤 되어갑니다!”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수도 인근이다. 피난민을 빠르게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거주할 지역, 먹을 식량, 심지어 식수 하나까지 전부 신경을 써주어야 했다.
“하아······.”
이제 겨우 반절이다. 불멸왕이 지척까지 와있음에도 현장은 여전히 더뎠다. 수척한 얼굴을 쓸어내린 재상은 창밖으로 보이는 수도 스노우가든을 내려다보았다.
“- - - - - - -.”
적이 오기 전 성문을 닫아야만 수도 스노우가든과 왕궁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성문을 닫으면 아직 도착하지 못한 피난민들이 놈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양자택일. 희생인가, 공멸인가. 재상은 몰려오는 이성과 이상 사이에서 고통 받았다. 모든 것이 자신이 짊어져야 무거운 책임이자 숙명이었기 때문이다.
탁, 탁, 탁, 탁, 탁!
덜컹!
“재상 각하!”
하지만 그 순간 서류와 고성이 오가는 행정실로 근위병이 찾아왔다.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그는 바로 왕궁 밖에서 전해진 서신을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재상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무슨 일이죠? 설마 적이······!”
“적이 아닙니다, 각하! 지원이 도착했습니다! 회색 늑대 경이 직접 오셨답니다!”
회색 늑대, 북방군 사령관이자 왕국을 지탱하는 또 다른 기둥. 잠시 정적이 행정실을 감돌더니 이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반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곧바로 잿빛 숲으로 떠나셨습니다. 아마 그곳에서 진군하는 적을 막으실 겁니다.”
그 누구도 아닌 무려 회색 늑대다. 용맹한 허스칼이라면 분명 불멸왕을 저지하고 수도를 구원할 것이다. 희소식에 얼굴이 환해진 관료들은 서둘러 재상을 바라보았다.
“지, 지원군 규모는요?”
하지만 재상은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얼굴이 창백해진 채 근위병을 향해 비틀비틀 다가갔다. 서신에는 그들이 차마 읽지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시간을 끌겠다.’
“안 돼······.”
병사를 차출해 오지 않았다. 회색 늑대는 허스칼 부대만을 이끌고 급히 지원을 온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 재상은 결국 의자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부탁한다, 기억하는 새.’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떨고 있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 수많은 선조와 영웅이 결심했듯 우리도 같은 길을 걸어갈 뿐이다. 재상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라도 피난을 끝내세요. 단 한 사람도 남겨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의자에서 일어난 재상은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는 관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향했다.
“편제한 시민군을 집결시키세요. 이틀 내로 성문을 닫고 침공을 저지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재상 각하!”
* * *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검은 코! 조금만 더!”
검은 코는 비틀거렸다. 밤낮을 가리지 않은 이동에 이미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하지만 내 의지를 읽은 녀석은 입에 거품을 무는 그 순간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시간이 초를 다툰다. 서신이 도착했을 때 이미 침공이 시작되었으니 지금쯤 수도 인근까지 진격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마른 입술을 깨물며 안일함을 자책했다.
‘후방 침공.’
왜 북극 해안을 고려하지 못했을까? 왜 먼저 적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판단이 든 순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위험을 경고하고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결국 후방을 적에게 허락하고 말았다. 수도 함락, 세계수 탈취, 머리를 감돌기 시작하는 불안한 예상이 찬바람으로도 지워지지 않았다.
푸르륵!
털썩!
그리고 끝내 검은 코가 주저앉았다. 모든 체력이 고갈되어 다리 힘이 풀린 것이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인데 녀석을 더 탓하거나 재촉할 수는 없었다.
푸르륵!
“미안하다.”
더 이상은 무리다. 여기서 잠시나마 숨을 돌리고 다시 가야 한다. 가방에서 수통을 꺼낸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나머지를 검은 코의 입으로 쪼르르 흘려주었다.
푸륵!
녀석이 숨을 헐떡이며 물을 마셨다.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눈빛을 내게 보낸 뒤 바닥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마침 동쪽에선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바스락.
검은 코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 나는 구겨진 지도를 꺼내 주변을 살폈다. 지형을 보아하니 반쯤 도착한 게 분명하다. 이대로 간다면 이틀하고도 반나절이 걸릴 것이다.
그사이 수도가 버텨 줄 수 있을까. 전투 경험이 미흡한 재상과 시민군을 떠올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불안한 상념을 지우고자 서둘러 지도를 집어넣었다.
다각, 다각!
푸르륵!
그렇게 10분가량이 지났다. 맑은 눈으로 숨을 몰아쉬던 검은 코는 거센 투레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서둘러 안장 위에 올라탄 뒤 땀으로 절은 고삐를 쥐었다.
“가자!”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성큼 찾아온 겨울이 눈보라를 데리고 왔다. 나와 검은 코는 백색 물감이 떨어진 세상을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아우우우우 - - - - -!!
불현듯 찾아온 백시(白視)와 메아리를 닮은 하울링. 동쪽으로 질주하는 기수와 함께 모든 것은 잔상처럼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