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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32화 (132/181)

132화

검은머리 기사왕 132화

시간이 초를 다툰다. 상황은 정교하게 짜인 톱니바퀴처럼 모든 것을 동시에 간섭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가장 빠른 초침은 북방을 질주하는 한 무리 늑대였다.

두두두두두두두두 - - - - -!!

백색 관문을 출발해 정말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길을 달려왔다. 그 때문인지 허스칼을 태운 흰 뿔 사슴들은 금방이라도 낙오할 듯 하얀색 거품을 입에 물었다.

하지만 회색 늑대는 휴식을 명령할 수가 없었다. 숨을 돌리는 사이 몰려오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은 심장을 꽉 움켜잡은 채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쯤 도착했을까. 혹시 너무 늦어 버린 건 아닐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현실 앞에 회색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뒤따라오던 허스칼 부장이 다급히 외쳤다.

“잠시 숨 좀 돌립시다, 대장!”

단순한 투정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를 태운 사슴이 한계까지 왔다. 적어도 물을 먹이고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을 주어야 했다. 늑대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을 들었다.

“허스칼! 정지하라!”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회색 늑대가 고삐를 당기자 뒤따라오던 허스칼 부대가 기다렸다는 듯 멈췄다. 그리고 투레질하는 사슴들을 달래며 싸라기눈이 내려 어두컴컴해진 주변을 경계했다.

꿀꺽.

평소답지 않게 숨이 차다. 사슴과 수통에 담긴 물을 나눠 먹은 회색 늑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잠시 무리에서 벗어나 현재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 - - - - - - - -.”

어딘가 익숙한 지형과 길이다. 시간상 이쯤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게 맞을 텐데, 하필 시야가 흐리다. 인상을 찡그린 회색 늑대는 무심결에 코를 벌름거렸다.

킁킁

“·········!!”

그 순간 탄 냄새를 맡았다. 나무를 포함해 복합적인 무언가가 불태워진 냄새는 이 부근과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회색 늑대는 그 즉각 부대로 돌아갔다.

“대장!”

“바로 근처다!”

그리고 허스칼 부대원들 또한 바람을 타고 온 냄새를 맡았는지 이미 안장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근처 마을이다. 부대는 빠르게 냄새를 쫓아 샛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웅 - - - -!!

먹구름이 불길하게 일렁인다. 내리기 시작한 싸라기눈은 더욱 강해졌다. 저 흐릿한 하늘을 맴돌고 있는 검은색 조각들은 시체를 찾아온 북방 까마귀들이 분명했다.

까악! 까악! 까악!

“······.”

수백 명이 사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단순히 화마만 덮쳐 온 것이 아닌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전부 학살당했다.

마치 벌레를 짓밟듯 장정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저항조차 못 하는 민간인들을 한 구덩이에 몰아 불태워 죽여 버렸구나.

북방 까마귀조차 연민을 느끼는 그 끔찍한 광경 앞에 고개를 숙인 회색 늑대와 허스칼은 속이 썩어들어감을 느꼈다.

“······계속 추격한다.”

척!

투구 사이로 눈동자가 불꽃처럼 타오른다. 도끼를 드는 것으로 대답을 끝낸 허스칼 부대는 앞서 달려가는 회색 늑대를 따라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진 현장을 뒤로했다.

다각, 다각, 다각!

남겨진 흔적을 보아하니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았다. 불멸왕과 엘프 놈들은 분명 하루 정도 차이 나는 거리에서 스노우가든을 향해 천천히 진격하고 있을 것이다.

까드득.

놈의 악의가 여실히 느껴진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였기에 더욱 혼탁하고 더러운 악의가 말이다. 이를 간 회색 늑대는 그 악의 꼬리를 쫓아 미친 듯이 달려갔다.

“기수다!”

“전원 전투태세!”

하지만 마을을 빠져나간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예민한 감각 사이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허스칼 부대를 발견하자마자 다가오는 소규모 기수 무리였다.

“잠깐! 아군이다!”

엘븐 가드가 아니다. 스노우가든 펄럭이며 다가오는 그들은 흰 뿔 사슴 위에 올라탄 수도 시민군이었다. 부대 바로 앞까지 다가온 한 한 병사가 다급히 물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회색 늑대와 허스칼 부대다!”

“아아······!”

회색 늑대와 허스칼이 수도를 구하기 위해 왔다. 그 외침을 들은 선두 병사는 외마디 탄성을 터트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안도가 아닌 사무치는 설움이었다.

“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수도 스노우가든에 홀로 남은 재상은 인근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급히 편제한 일부 시민군으로 유격전을 펼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상대는 반신이라 불리는 불멸왕과 엘프군 최정예인 왕궁 엘븐 가드들이었다. 급히 편제되어 파견된 시민군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난무했다.

“······남은 건 저희뿐입니다.”

마땅한 지휘관도 없는 마당에 무력한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목숨으로 놈들을 저지하고 조금이라도 진격을 늦추기 위해 길을 막는 것뿐이었다.

“이제 우리가 막으마.”

그들은 북방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다했다. 회색 늑대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병사의 어깨를 꽉 움켜잡아 주며 그동안 버텨오던 막중한 책임을 대신 짊어졌다.

“놈들은 어디 있지?”

“여, 여기서 반나절 거리에 있습니다. 다행히 저희 유인책이 통해 아마 다른 길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경유지는·········.”

병사는 황급히 피 묻은 지도를 꺼냈다. 그리고 온갖 기록과 경로가 그려진 선을 따라 황급히 한 가지 장소를 도출해냈다.

“잿빛 숲입니다.”

수도 스노우가든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잿빛 숲이다. 이곳이 바로 수도를 향해 진격하고 있는 불멸왕과 엘븐 가드 부대가 지나가게 될 유일한 경유지였다.

“······마지막이겠군.”

더 이상 후방은 없다. 여기가 바로 최후의 보루다. 병사가 건네는 지도를 받아든 회색 늑대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출발 준비를 끝낸 부대를 향해 외쳤다.

“허스칼! 숲으로 향한다!”

척!

사슴을 탄 허스칼 부대는 순식간에 대열을 이뤄 잿빛 숲을 향해 뛰어갔다. 눈발이 거세진다. 기온은 더욱 떨어졌다. 눈보라가 찾아온 북방은 회색 그 자체였다.

* * *

재상과 검성이 지원군을 보낼 시간을 끌어야 한다. 허스칼 부대와 잿빛 숲으로 진입한 회색 늑대는 적을 섬멸하는 전면전이 아닌 철저한 지연전을 계획했다.

어차피 전장이 숲이라 주변에 널린 것이 나무다. 가장 먼저 벌목을 시작한 허스칼 부대는 길을 막을 장애물과 말뚝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투창을 만들었다.

이곳은 서부 숲이 아닌 혹독한 북방 숲이다. 놈들이 아무리 숲의 종족이라고 한들 겨울이 찾아온 잿빛 전장에서는 늑대와 허스칼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사각, 사각.

최대한 뾰족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도끼날로 투창을 깎는 허스칼 부대원들은 떨어지는 톱밥과 함께 두려움을 버렸다. 그렇게 방어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장.”

“사슴들은?”

“하하, 안가겠다고 강제로 버티는 거 겨우 돌려보냈습니다. 정말 영물입니다.”

혹여나 패배한다면 불멸왕 부대가 기동력을 확보하게 된다. 그것을 우려한 회색 늑대는 사슴을 먼저 돌려보낸 뒤 후방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길을 봉쇄했다

이제 잿빛 숲에는 곧 도착할 불멸왕 부대와 자신들뿐이다. 커다란 전장을 함정으로 만든 회색 늑대는 부하가 내미는 건량을 입으로 가져가 우득우득 씹어 삼켰다.

후우우우웅 - - - !!

“눈보라가 거셉니다, 대장.”

“······어머니 북방이 우리를 도우신다.”

가만히만 서 있어도 온몸이 얼어붙는 북방의 혹독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침략자를 섬멸하라 외치는 어머니 북방의 간절한 외침이 분명했다.

동토가 너희를 찌르는 창이 될 것이다. 회색 늑대와 허스칼은 불어오는 눈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기를 들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작은 새소리가 들려왔다.

삑! 삐익!

이런 겨울에 숲새가 있을 리가 없다. 숲 선두에서 주변을 정찰하던 부대원이 적의 접근을 발견한 것이다. 허스칼은 그대로 도끼를 들어 올려 수신호를 보냈다.

사사사사사사삭.

북방, 겨울, 숲. 모두 허스칼을 위한 무대다. 투창 더미를 챙긴 그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풀숲을 빠져나와 불멸왕 부대가 진격해 올 길옆으로 넓게 포진했다.

척, 척, 척, 척.

쉿.

일정한 발소리와 함께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드디어 시야에 한 무리가 보인다. 저 풀숲 너머 불멸왕과 그의 부대 왕국 엘븐 가드가 잿빛 숲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 - - - - - - -.”

머나먼 북방에서 원정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흠집 하나 보이지 않는 갑옷과 찰랑이는 금발 머리, 선두에서 걸어오는 놈은 과거 기억 속 남아있는 불멸왕이 분명했다.

찌르르르.

피부가 찌르르 울린다. 본능이 위험을 경고한다. 겨우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온몸이 긴장했다. 반신, 불멸, 감히 신이라 칭하는 자. 놈은 엄청난 존재였다.

꾹.

그리고 함께 대동한 엘븐 가드 또한 하나하나가 상급 기사와 맞먹는 기운을 뿜고 있었다. 저런 놈들이 무방비한 수도로 진격할 거란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두려움을 떨쳐낸 회색 늑대와 허스칼 부대원들은 살며시 투창을 쥐었다. 그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북방의 겨울을 느꼈다.

때는 지금이다.

삐이이익!

딱!

도끼를 든 허스칼이 일어난다. 그리고 장애물이 연결되어 있는 밧줄을 끊어내며 매복의 시작을 알렸다. 숲을 구성하던 거대하고 육중한 나무가 불멸왕 부대를 덮쳤다.

파스스스스, 쾅!

매복이다!

차마 대비하지 못한 대열이 흐트러졌다. 깜짝 놀란 엘븐 가드는 오러를 뽑으며 사방을 경계했다. 사냥감이 목을 드러낸 최적의 순간, 회색 늑대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작은 목소리는 큰 복창으로 번져 나갔다. 한목소리로 복창한 허스칼 부대는 회색 늑대를 향한 하울링을 내지르며 수백 개 투창을 집어 던졌다.

콰직! 푹!

서걱! 후우우웅, 푹!

전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다. 솟아오른 흙과 눈 위로 투창이 난무했고 풀숲 곳곳에선 장애물과 함께 날카로운 말뚝이 튀어나왔다. 말 그대로 완벽한 매복이었다.

응수하라!

끼기기긱, 퓽!

놈들이 응사한 화살에 맞고 쓰러지는 허스칼, 도끼에 머리가 찍혀 그 위에 쓰러지는 엘븐 가드. 좁은 길목과 장애물이 뒤엉킨 공간은 피와 회색이 전부였다.

쿵!

그리고 전장 한가운데 막강한 오러 줄기를 내뿜은 회색 늑대가 난입했다. 그가 물어뜯을 목표는 단 하나, 무심한 얼굴로 허스칼을 학살하고 있는 불멸왕이었다.

콰앙- - -!!

육중한 대검을 크게 휘두른다. 고함을 내지르며 불멸왕을 향해 내려찍었다. 하지만 대검과 오러는 불멸왕이 뿜어낸 무한한 오러 앞에 너무나 쉽게 막혀 버렸다.

“그래, 기억이 난다. 네놈이 회색 늑대군.”

쾅! 쾅! 콰직!

회색 늑대는 모든 힘을 끌어냈다. 휘두른다, 휘두른다. 또 휘두른다. 북방을 침공한 대가를 받아내듯 자신에게 말을 거는 불멸왕을 향해 오직 검으로 대답했다.

“······죽기에는 아까운 재능이 아닌가?”

불멸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만큼 허스칼 회색 늑대가 내뿜는 오러는 인간이 지닐 수 없는 양이었다. 늑대는 어느덧 검을 넘어 온몸을 오러로 물들이고 있었다.

치지지지지직.

한 남자가 본 오러의 끝, 회색 늑대가 보일 극의. 주체하지 못한 오러가 쇳물처럼 떨어진다. 세상과 운명을 향해 검을 겨눈 회색 늑대는 불멸왕을 향해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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