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검은머리 기사왕 131화
어느 날 불멸왕은 지도를 보며 생각했다. 만약 이번 원정에서 주요 경로인 서쪽 해안이 아닌 북방을 우회할 수 있는 북극 해안을 건너간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만약 성공만 한다면 무주공산인 동쪽 해안에 접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북방 왕국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 상륙해 곧바로 수도를 공격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무리한 원정입니다, 폐하!’
‘시끄럽다!’
허를 찌르는 치명적인 수였다. 한시라도 빨리 세계수를 되찾고 싶었던 불멸왕은 엘프 여왕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도를 공격할 제2의 원정군을 꾸렸다.
‘내가 하는 것은 성전(聖戰)이다.’
최고의 엘프 항해사들과 최고의 엘븐 가드만을 모아 부대를 꾸렸다. 그리고 위풍당당 본대를 빠져나와 미지의 지역이라 일컫는 북극 해안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자신만만했다. 타고난 오만함은 순풍을 탄 돛만큼이나 순조로웠다. 이미 승리를 확신한 불멸왕은 엘프 최고 전력인 성전군과 함께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북극 해안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태초와 미지라는 별칭이 붙여진 것에는 다 이유가 있듯, 광활하게 펼쳐진 북방 환경은 너무나 혹독했다.
‘키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키는 수시로 얼어붙었다. 바람은 어찌나 강한지 돛은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거기다 북극 바다를 떠다니는 크고 작은 빙하는 움직이는 암초나 다름이 없었다.
‘배가 침몰한다!’
아무리 튼튼한 선박과 유능한 항해사라 할지라도 이런 혹독한 바다에선 제구실하지 못하는 법이다. 성전군은 맥없이 침몰하는 선박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한 척이 침몰했습니다, 폐하.”
“남은 선박을 보고하라.”
“저희를 포함해서 열 척이 전부입니다.”
처음 본대를 빠져나왔던 선박이 서른 척이다. 그런데 북극 해안을 빠져나온 선박이 겨우 열 척에 불과하다는 건 항해 중 무려 선박 스무 척이 침몰했다는 뜻이었다.
까드득!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 대부분 선박과 병력이 소실되었다는 게? 불멸왕은 이를 까드득 갈며 갑판 밖 출렁이는 바다를 노려보았다.
“폐하, 본대로 복귀하시는 게······.”
“시끄럽다!”
여기서 돌아간다고 한들 뚜렷한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어온 것이다. 불멸왕은 항해사의 충언을 가뿐히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 - - - - -.”
마침 선박 갑판에는 무장한 왕국 엘븐 가드들이 모여 있었다.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그들은 갑판을 향해 걸어오는 불멸왕을 향해 흐트러짐 없는 군례를 올렸다.
척!
그래, 비록 많은 선박이 침몰했지만, 일부 엘븐 가드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치열한 최전선이 아닌 무방비한 후방을 점령할 병력으로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스르릉!
불멸왕은 그대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군림과 통제를 상징하는 오러를 뿜어내며 두려움과 경외를 동시에 심었다. 불멸왕은 저 멀리 보이는 육지를 노려보며 외쳤다.
“수도로 진격한다. 스노우가든을 불태우고 빼앗겼던 세계수를 되찾는다.”
“······명을 받듭니다, 불멸왕 폐하!”
하늘에서 잘 지켜보고 있어라, 무능한 북방의 신아. 네년이 그토록 아끼는 기사왕의 목을 베고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버리마.
오만을 경고하는 혹독한 자연 앞에 불멸왕은 감히 멸종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어머니 북방은 끝이 보이지 않는 태산 아래 그저 모든 것을 지켜만 볼뿐이었다.
“그래, 그리 지켜만 보아라.”
그렇게 북극 바다를 빠져나온 성전군은 스노우가든과 채 나흘거리도 되지 않는 항구 마을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운명은 서서히 절정이라는 대척점을 그리기 시작했다.
* * *
검성은 불멸왕의 부재를 경고했다. 그 서신은 빠르게 수도로 전해졌고 위험을 감지한 재상 또한 북방 모든 전선과 지역을 향해 혹시 모를 침공을 대비하라 명령했다.
경고는 합당했고 대처는 훌륭했다. 치열한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 정도 전역 통제는 오직 재상 기억하는 새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모조리 죽여라.’
하지만 왕국에 들이닥친 위험은 예상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사라졌던 불멸왕은 그동안 전례가 없었던 북극 바다를 돌아 왕국 동쪽 해안가에 상륙하고야 만 것이다.
“꺄아아아아아악!”
“살, 살려 주세요! 아이만큼은 제발!”
평화롭던 항구 마을 ‘그린비어’는 화마에 휩싸였다. 쳐들어온 불멸왕과 엘븐 가드들은 얼마 없는 북방군을 무참히 살해한 뒤 무고한 주민들을 향해 칼끝을 돌렸다.
화르르륵!
쿠르르릉, 쾅!
불타오르는 항구와 건물, 엘븐 가드를 피해 도망치는 아이들, 사방에선 죽음을 부르는 비명이 들려왔고 산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은 지옥도가 여실히 펼쳐졌다.
“정신 차려.”
“행, 행정관님.”
하지만 그런 난리 통 속에서도 아직까지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이 항구 마을에 부임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젊은 행정관과 그의 어린 서기였다.
그 둘은 엘프군이 침공하자마자 중앙건물로 달려가 기밀 서류와 작전 지도를 파기했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마을을 가로질러 한 낡은 창고에 서둘러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들이 몸을 숨긴 이유는 알량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가 아닌 아직 끝내지 못한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행정관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수도가 위험해. 우리가 알려야 해.”
항구 마을에서 수도 스노우가든까지는 불과 나흘 거리다. 말 그대로 행정관인 자신이 침공 소식을 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대비 없이 공격을 받게 된다는 소리였다.
꿀꺽.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지금 눈앞에서 타오르는 화마만큼이나 앞으로 펼쳐질 대학살극이 너무나 두려웠다. 마른침을 삼킨 행정관은 자신의 어린 서기를 향해 말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마구간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마을을 빠져나가자.”
“마, 마구간까지 갈 수 있을까요?”
“내게 다 방법이 있어.”
역시 행정관님이다. 방법이 있다는 말에 안도한 어린 서기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용감하게 창고를 나서는 행정관을 따라 마구간을 향해 뛰어갔다.
덜컹, 타다다닥!
“더 빨리!”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뛰어간다고 한들 상대는 오러 사용자다. 무심한 얼굴로 시체를 불태우던 엘븐 가드들은 행정관과 서기를 발견하자마자 맹렬한 속도로 쫓아왔다.
퓨웅!
허억, 헉!
놈들이 시위를 당긴다. 날아온 화살이 어깨를 스쳐 지나간 어린 서기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울먹였다.
잡힌다, 이대로 가다가든 잡힐 것이다. 저 시체들처럼 죽는다는 생각에 서기는 바로 옆 행정관을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려 했다.
“어······?”
하지만 행정관은 옆에 없었다. 얼떨결에 뒤를 바라보자 놈들을 향해 뛰어가는 행정관의 뒷모습이 보였다. 방법이라는 것이 이것이었구나. 한 명은 살아갈 수 없었다.
“가! 도망쳐! 뒤돌아보지 마!”
행정관은 서기를 향해 날아가는 수많은 화살을 몸으로 막았다. 그리고 솟구치는 핏물과 함께 고함을 내지르며 주저하는 어린 서기를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커억!”
주어진 의무를 다했으니 여한이 없다. 행정관은 그대로 가슴팍이 꿰뚫려 쓰러졌다. 빛을 잃어가는 그의 눈동자는 마을을 빠져나가는 한 마리 사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그래. 달려라, 아이야. 놈들보다 먼저 수도로 소식을 전해라. 어머니 북방이시여, 기사왕 폐하를 보호하소서. 마지막 기도를 올린 행정관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 * *
불멸왕이 동쪽 해안을 침공했다는 소식이 북방 전역을 강타했다.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인 순간 후방이 공격을 당하다니, 하루라도 빨리 마땅한 대책을 세워야 했다.
‘요새를 점령하라!’
하지만 본대를 이끈 엘프 여왕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본격적인 공격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전선에서 영웅들을 포함한 북방군 정예들을 묶어 두기 위해서였다.
‘황제 폐하께 승리를 바치자!’
물론 백색 관문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황제 티그막 또한 혼란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 군단을 투입해 강철 동맹군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위기였다. 상대는 그 막강한 불멸왕과 엘븐 가드들인데, 전선 그 어디에도 수도를 지원할 군사가 없었다. 그 소식을 접한 북방군의 사기는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북방 인간들은 떠올렸다.
떠올려서는 안 될 것을 말이다.
‘패전.’
어머니 북방이시여, 진정으로 우리를 버리나이까. 마땅한 수가 없었던 수도 스노우가든은 결국 뒤늦게 출발한 검성만을 믿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려 했다.
“동요하지 마라.”
하지만 북방군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게 있었다. 왕국을 지키는 방패가 기사였다면 적을 찌르는 창 또한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최후의 허스칼 회색 늑대는 눈을 떴다.
“내가 가겠다.”
“경!”
해안 요새는 서쪽, 수도는 동쪽이다. 아무리 빨리 뛰어온다고 한들 검성은 불멸왕보다 먼저 도착할 수는 없다.
반대로 백색 관문은 어떠한가? 수도인 스노우가든과 비교적 가깝고 도로도 잘 정비되어있어 사슴을 몰기 제격이었다.
“허스칼 부대면 충분하다.”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기에 많은 병사를 차출할 수 없다. 기사들 대신 허스칼 부대를 선택한 회색 늑대는 드디어 결단했다.
“뿔피리를 불어 다오.”
“······알겠습니다, 경.”
부우우우우우우웅 - - - -!!
말을 타고 간다면 수도까지는 이틀거리다. 아마 예상이 옳다면 진격하는 불멸왕 앞을 아슬아슬하게 가로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마치 늑대처럼 놈의 발목을 물어뜯어 시간을 버는 게 내 전문 아닌가. 검성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회색 늑대는 자신의 애병인 대검을 챙겨 관문을 나섰다.
“- - - - - - -.”
관문 뒤쪽에는 어느새 집결 나팔을 들은 허스칼이 모여 있었다. 그동안 마땅한 충원이 없어서 그런지 얼마 없는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회색 늑대가 입을 열었다.
“다들 늙었구나.”
허스칼 부대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늙은이들은 은퇴하실 때 아닙니까!”
“캬! 말하는 거 봐! 죽일까요, 대장?”
맞다, 자신도, 저들도 모두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다. 하지만 허스칼 부대는 언제나 선두에서 왕국을 지켜온 자들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뿔피리를 불어라.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북방 허스칼 정신은 바로 이들이 이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디로 갑니까!”
한바탕 웃음이 잦아들었다. 그러자 이 중 나이가 제일 많은 한 한 허스칼이 유쾌한 웃음과 함께 물었다. 이번에는 어디서 싸워야 하냐는 천연덕스러운 질문이었다.
“······.”
하지만 회색 늑대는 평소처럼 목적지를 말해줄 수 없다.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으로 함께 가자는 말······. 내 형제와도 같은 이들에게 웃으면서 말해 줄 수 없었다.
“대장 왜 저래?”
“몰라, 치매라도 왔나?”
아무것도 모르는 부대원들은 평소 같지 않은 회색 늑대를 놀렸다. 그리고 익숙한 몸짓으로 도끼를 챙겨 한 마리씩 준비된 흰 뿔 사슴 위에 하나둘 올라탔다.
푸르륵! 푸륵!
얌전히 있어, 임마!
금방이라도 출발할 분위기다. 깜짝 놀란 회색 늑대는 부대원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 불멸왕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말해 주려 했다.
“다들 잠깐, 가기 전에 할 말이······.”
“대장.”
하지만 그 순간 말문이 막혔다. 웃음기가 사라진 허스칼 부대 전원이 두꺼운 허스칼 투구를 쓰고 있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엄중한 눈동자가 투구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툭툭.
북방의 아들아, 내 투구를 받아라. 이 투구를 썼던 허스칼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라. 전우와 투구를 부딪친 허스칼 부대는 거센 하울링과 함께 북방을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