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검은머리 기사왕 130화
“히익!”
성벽 밖으로 내밀었던 머리 위로 화살이 스치고 지나간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이마가 꿰뚫렸을 거란 생각에 이제 막 성인이 된 애송이 ‘피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녀석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동부군으로 자원한 이후 처음 겪어 보는 전투이기도 했고 당최 겁 많고 심약한 성격은 이런 살벌한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앞에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오크 놈들과 양옆으로 즐비한 아군은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숨조차 자유롭게 쉴 수 없을 만큼 꽉 꽉 막혀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 - - -!!”
“방패 들어!”
놈들은 말 그대로 방파제를 휩쓰는 녹색 파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몰려왔는지 저 멀리 보이는 비명의 협곡 뒤로 감히 대열과 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창을 찌르고 화살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드는 과정. 이 모든 것이 훈련받은 대로 이행이 되었지만, 넋이 나간 피터는 이 몸이 자신의 몸 같지가 않았다.
허억, 헉!
친했던 삼촌 잭슨이 화살을 맞고 죽어있다. 친형처럼 따랐던 마이클이 머리가 깨졌다.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인가, 전쟁은 이토록 참혹하고 두렵다는 것을 말이다.
모든 것이 생 날것 그대로였다.
“사다리다!”
그 순간 한 선임 병사가 외쳤다. 피터는 본능적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화살 비를 뚫은 오크 무리와 함께 수많은 공성 사다리가 들어 올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덜컹!
눈 깜짝할 사이였다. 전쟁 고함을 내지른 오크들은 성벽 위로 사다리를 걸었다. 피터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전우가 다 죽어 나간 이 구역에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도와줘, 아무나 도와줘. 오크가 성벽을 넘어온다. 자신이 쥐고 있는 건 창과 방패뿐이며 다리조차 떨려 왔다. 피터는 눈물과 콧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주저앉았다.
“흐으, 흐······.”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년 애송이라 불리는 피터는 어느새 동부를 지키는 자랑스러운 병사이자, 부대원과 함께한 전우 중 하나였다.
창을 들어라, 아이야. 인간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수많은 오크 무리 앞에 피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욱.
창을 움켜잡았다. 다리에 힘을 주었다. 용기를 낸 피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 도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을 내질렀다.
서걱!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창끝에 찔려 화가 난 저 오크가 이 형편없는 몸을 자른 것이 분명했다. 피터는 생각보다 고통 없는 죽음 앞에 평온을 맞이하려 했다.
“잘했다, 병사.”
하지만 뒤이어 느껴진 것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끝없는 공허가 아니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한 남성의 중후한 목소리가 흐릿한 정신을 일깨웠다.
“아······.”
눈을 뜨자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동부 기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벽 앞 오크들은 어느새 용맹한 기사들이 휘두른 오러 검 앞에 하나같이 도륙이 나 있었다.
갑옷이 참으로 멋지다. 태양이라는 광휘를 등진 기사가 투구 바이저를 올렸다. 익숙한 왕국 문양과 익숙한 얼굴, 피터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한 인물을 생각해 냈다.
“리처드 폐하······?”
안전한 후방에 있어야 할 국왕이 가장 위험한 전장 최전선에 있다. 하지만 리처드는 이 모든 것이 비밀이라는 듯 입술 위로 검지를 올리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끄덕.
피터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처드는 다시 투구 바이저를 내리며 검을 들었다. 전장을 호령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성벽 위 동부 기사단을 지휘했다.
“기사단! 적을 몰아내라!”
위태롭던 전장 상황은 단숨에 동부군 쪽으로 역전되었다. 드디어 기세가 오른 병사들이 동부 기사들과 힘을 합쳐 오크 놈들을 밖으로 몰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부우우우우우우웅 - - - -!!
협곡 관문을 포위했던 수많은 오크 전사가 맹렬한 저항에 막혀 드디어 퇴각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피 묻은 무기를 추켜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리처드와 기사들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치열한 격전 중 어디 다치기라도 한 것일까, 조심스럽게 다가온 로날드가 리처드를 향해 속삭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피해가 생각보다 크군.”
무려 반나절 넘게 이어진 첫 번째 전투는 동부 왕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자축하기에는 관문을 방어하기 위해 동원된 아군 병사들 피해가 너무나 막심했다.
오죽하면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인 동부 기사단이 직접 내려왔겠는가. 성벽 위에는 누군가의 가족, 형제, 배우자인 동부군들이 수많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러길 빌고 있다.”
리처드는 슬픔을 삼켰다. 그리고 애통함 대신 숭고한 경의를 표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리처드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협곡을 노려보았다.
* * *
“젠장!”
오크 황제 티그막은 생각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동생인 2황자가 살아있을 때, 아니 기사왕이 백색 관문을 수복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만큼 회색 늑대와 북방군이 지키는 백색 관문은 뚫리지 않는 난공불락 그 자체였으며 동시에 수많은 오크 부대를 죽음으로 빠트리는 거대한 늪이었다.
“지원군이 필요합니다!”
연이은 패주 소식이 줄을 이었다. 공성 부대는 투입되는 족족 갈려 나갔고 제국이 자랑하는 오크 서전트와 장군들은 허스칼과 회색 늑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우습게 보았던 동부 왕국마저 예상치 못한 분전을 벌이니, 졸지에 가운데 놓인 황제 티그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물자와 전력만을 소비하고 있었다.
“폐하! 엘프군 선봉이 패주했답니다!”
“뭣이!”
설상가상 원치 않는 공동 전선을 펼치게 된 엘프군마저 해안요새에서 대패했다. 아무리 선봉군이라지만, 요새를 공격하는 부대가 패주했다는 것은 의미가 남달랐다.
도대체 불멸왕은 무엇을 하길래 무기력한 패배를 방관만 하고 있는가. 놈의 막강한 힘을 두 눈으로 보았던 티그막으로서는 이런 미적지근한 움직임이 이해되지 않았다.
“볼포로스!”
“명하십시오, 폐하!”
“네게 사절단 임무를 맡기겠다. 가서 엘프 놈들 본대를 살피고 와라.”
속이 시커먼 엘프 놈들이다. 공동 전선을 펼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어떤 음흉한 간계를 꾸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렇게 명령을 내린 황제 티그막은 결단을 내렸다.
“흑색 가루는 얼마나 모였지?”
“······아직 불안정합니다, 폐하.”
“아군 피해는 신경 쓰지 마라. 최대한 빨리 생산을 끝내 가지고 오도록.”
황제가 강한 의지를 품었다. 감히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측근과 신하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왕좌에서 일어난 티그막이 군단 전체를 향해 명령했다.
“공성 규모를 두 배로 늘려라. 만약 후퇴하는 전사가 있다면 내 친히 목을 베겠다.”
“명을 받듭니다, 폐하!”
* * *
“내 이름은 엘븐 가드 노툰이다! 세계수의 가호를 받은 리니아 가문의 장남이자, 여왕께서 직접 서임을 내려준······!”
끼기기기긱, 퓽!
“컥!”
내게 1:1 결투를 신청하는 12번째 엘븐 가드를 검은 화살이 쏘아죽였다. 그러자 요새 내부에서는 작은 환호와 함께 엘프 놈들을 향한 노골적인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것도 한두 번이어야 호응하지 오늘 하루만 3번째 결투 신청에 대다수 병사는 무척이나 지루해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눈투성이는 내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나도 모르겠다.”
선봉대 궤멸 이후 엘프 본대가 드디어 북방 해안에 도착했다. 당연히 대대적인 전면전을 각오하고 있었던 우리는 물자와 무기를 서둘러 보급하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공격! 공격하라!’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원정군 본대답게 역시나 공격은 맹렬했다. 연이은 공격에 왼쪽 방진이 전멸당하고 한순간 성벽이 점거당할 뻔했으니, 그 치열함은 충분히 상상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짧게 타오른 불처럼 전면전은 거기서 끝이었다. 맹렬했던 첫날 이후로 엘프군 본대는 소극적인 공격과 도발만을 해 오며 지루한 체류를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나는 저 멀리 선박에서 휘날리는 여왕과 불멸왕의 깃발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아무래도 가까운 거리에서 낌새라도 읽어 볼 필요가 있었다.
“스승님?”
“다녀오마.”
마침 또 다른 엘븐 가드가 1:1 결투를 신청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 나는 검은 화살과 눈투성이를 향해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검은 코를 타고 요새 밖으로 나갔다.
다각, 다각, 다각!
“검, 검성!? 나는 왕궁 엘븐 가드이자······!”
“그래, 상대해 주마.”
스르릉!
또 장황하게 자기를 소개하고 여왕과 불멸왕을 칭송하겠지. 참으로 지겨운 레퍼토리를 끊은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그러자 상대도 황급히 오러를 뿜어냈다.
“이 자리에서 너를 베고!”
푸르륵!
두두두두두두!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거칠게 투레질한 검은 코가 순식간에 뛰쳐나갔다. 애매했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나는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이 자리에서 너를 베고? 참으로 허무한 유언이다. 언제나 그랬듯 단 한 합으로 적을 죽인 나는 바닥에 떨어진 목을 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적 진영을 향해 돌격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어, 어?!”
“놈이 온다!”
돌발 행동이었다. 아군은 물론이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적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겁지겁 활시위를 당기는 엘프 궁수들. 검은 코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푸힝!
두두두두두, 쾅!
거대한 뿔로 장애물을 부숴 버린다. 순식간에 엘프 궁수 두 명을 날려 버린 검은 코는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뛰어 엘프 진형 한가운데를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막아라!”
졸지에 진입을 허용한 놈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정신을 차린 궁수들이 연신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검은 코와 호흡을 맞춘 나는 날아오는 모든 것을 쳐내며 외쳤다.
“불멸왕 - - - - - -!!!”
가지고 온 목을 허공에 던졌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선박을 향해 검을 높이 들고 놈들이 숭배하는 신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주변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네 파편을 벤 검성이 여기 왔다! 치욕을 안다면 여기로 나와 검을 받으라!”
놈은 오만하다. 놈은 증오한다. 불멸왕이라면 아무리 꿍꿍이가 있더라도 원수를 죽일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나는 몰려오는 엘프군을 내려다보며 반응을 기다렸다.
펄럭!
“- - - - - - - -.”
하지만 움직임은 없었다. 그저 불멸왕을 상징하는 깃발만이 허무하게 흔들릴 뿐이다. 순간 반쪽짜리 추측을 확신한 나는 그대로 기수를 돌려 달려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다각! 다각! 다각!
더 이상 있다가는 위험해진다. 그 짧은 사이 포위진이 생겼다. 호출을 받은 엘프 영웅들 또한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나는 혀를 차며 고삐를 당겼다.
푸르륵!
영리한 검은 코는 엘븐 가드와 영웅들이 오기 전 반대편으로 급히 달렸다. 그리고 포위가 약한 부분을 나와 함께 돌파해 난리가 난 엘프 진형을 유유자적 빠져나왔다.
“스승님! 정말······!”
“이, 이이! 미친놈아!”
해안요새로 복귀하자마자 온갖 질타와 걱정이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안장 위에서 내리기도 전, 각 지역과 연락을 담당하는 전령 부관을 향해 급히 명령했다.
“수도와 각 영지에 전서구를 보내라! 전령은 즉각 수신을 재확인해!”
“내,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경!”
한마디 외침이 운명을 폭풍으로 만들었다.
“불멸왕이 여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