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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29화 (129/181)

129화

검은머리 기사왕 129화

“하하.”

엘프 여왕의 감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은 당연히 분노였고 뒤이어 부정, 후회까지 들고 말았다. 결국,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 여왕은 제독과 귀족들을 향해 물었다.

“변명해 보아라.”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출정했던 엘프 원정군 선봉대가 본대가 있는 바다로 퇴각했다. 아니, 궤멸적인 피해를 보고 후퇴를 한 것이니 사실상 패주라고 봐도 좋았다.

아무리 기사왕과 검성이 지키는 요새라지만, 공성하는 쪽이 궤멸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엘프 여왕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부 저자 탓입니다, 여왕님!”

변명해 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나선 이는 당연히 낯짝이 두꺼운 엘프 귀족이었다. 한 용기 있는 귀족은 여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제독을 향해 과감히 삿대질했다.

“감히 불멸왕 폐하의 명령을 어기고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위대하신 여왕 폐하! 저희 귀족과 영웅들은 그저 바로잡으려 했을 뿐입니다!”

참으로 뻔뻔스럽다. 지엄한 군율을 어기고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모든 잘못을 남에게 떠넘겼다. 하지만 제독은 수많은 비난 앞에 그저 고개를 숙였다.

“할 말 있는가?”

“······없습니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모든 잘못은 군사를 이끈 사령관에게 있다. 이끄는 자가 아닌 책임지는 자. 모든 울분과 눈물을 삼킨 제독은 양심 앞에 변명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군.”

엘프 여왕은 무심히 대답했다. 그리고 살벌한 기세로 자신을 호위하고 있던 왕궁 엘븐 가드를 향해 손짓했다. 순식간에 검이 뽑히자 날카로운 날이 허공에 번뜩였다.

“컥!”

“안, 안 돼!”

망설임 없는 즉결처분이다. 오러를 씌운 검날이 번뜩이자, 무릎을 꿇고 있던 엘프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선봉군을 이끌었던 제독만큼은 무사했다.

“폐하······?”

엘프 여왕은 오만할지언정 사려분별을 못 하는 바보가 아니다. 측근이 전해 준 정황 보고를 통해 귀족들 증언이 전부 거짓이고 변명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멍청한 것도 모자라 무능하기 짝이 없는 귀족 놈들은 딱 우려했던 수준이다. 이것으로 작은 확신을 얻은 엘프 여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직위를 박탈한다. 귀관은 본토로 돌아가 후방 보급에 힘을 쓰도록 하라.”

유능한 자는 많아도 주제를 아는 자는 적다. 아마 멍청한 귀족들이 아니었다면 제독은 충분히 해안가를 점거하고 바다를 건너올 본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그는 쓸 만한 인재였다. 자비로운 판결을 내린 엘프 여왕은 눈물을 흘리는 제독을 지나쳐 갑판으로 향했다. 그러자 광활한 바다가 그녀를 맞이했다.

꾸욱.

모두 손안에 쥐고 싶다. 이 넓은 바다도, 저 멀리 보이는 북방도, 세상 아래 서 있는 드넓은 대륙도 말이다. 여왕은 비어 있는 불멸왕 자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 *

덜컹, 덜컹, 덜컹!

푸르륵! 다각, 다각!

대규모 마차 행렬이 줄을 지어 백색 관문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한 회색 늑대는 서둘러 왕국 재상 기억하는 새를 불렀다.

“재상! 이쪽이다!”

1차로 투입되는 보급 물자 규모가 워낙 막대한 탓에 이번만큼은 후방 총책임자인 재상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시간이 많이 단축되어 대규모 전쟁을 앞둔 백색 관문은 그 누구보다 빨리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었다.

“제가 많이 늦었죠?”

“아니, 정말 제때 와 주었다.”

이 정도 많은 대규모 물자를 한 번에 보급할 수 있는 건 오직 재상뿐일 것이다. 회색 늑대는 겸양을 떠는 그녀를 향해 호탕하게 웃어 준 뒤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광활한 평원과 함께 북방을 지키는 대문, 난공불락의 요새 백색 관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연이은 증축과 보수를 끝낸 성벽은 장엄한 장관 그 자체였다.

“적군은 확인되었나요?”

“기병대가 수시로 확인하고 있다. 아마 오늘 내로 관문 앞까지 당도하겠지.”

엘프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오크 제국은 해안 침공과 때맞춰 대규모 군세를 일으켰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관문과 협곡이 있는 동쪽을 향해 서서히 진군을 시작했다.

총사령관은 당연히 황제가 된 1황자 티크막일터. 수많은 서전트와 오크 영웅들이 합류한 오크 제국군은 1차 침공 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엄청난 규모였다.

“빨리 와 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회색 늑대는 도리어 전의를 불태웠다. 자신이 수년간 공들인 백색 관문과 정예 병사들 그리고 다시 태어난 강철 동맹은 놈들과 당당히 마주하고 있었다.

궤멸은 불가능할지언정 단 한 마리 오크도 관문과 협곡을 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지난 뼈아픈 과거를 견뎌낸 회색 늑대는 진심으로 북방의 형제를 이끌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삐이이이이익 - - -!!

“전령이다! 길을 비켜라!”

“경! 회색 늑대 경은 어디 계십니까!”

하지만 그 순간 인적이 없던 서쪽 방면에서 한 사슴 기수가 바삐 신호를 보내왔다. 그는 자신이 전령임을 증명하는 깃발과 함께 서둘러 백색 관문 안으로 들어왔다.

“허억, 헉!”

푸르륵, 푸륵!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기수와 타고 온 사슴 둘 다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표정을 굳힌 회색 늑대는 전령이 다급히 내미는 서신을 받아들었다. 찍혀 있는 직인은······.

“······폐하?”

기사왕 눈투성이가 직접 서신을 보냈다. 깜짝 놀란 회색 늑대와 재상은 서둘러 봉인을 풀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자 귀여운 토끼 그림과 함께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엘프 선봉대 격퇴.]

해냈다. 해안 요새로 떠난 기사왕이 기어코 엘프 선봉대를 격퇴했다. 재상은 황급히 입을 가리며 기쁨을 만끽했고 회색 늑대 또한 세상이 떠나가라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하!!!

해낼 줄 알았다. 위대한 기사왕이 누구인데 감히 엘프 놈들 따위에게 당하겠는가. 그동안 남몰래 수심을 감추고 있던 회색 늑대는 드디어 모든 걱정을 떨쳐낼 수 있었다.

“폐하가 승리하셨다고?”

“모조리 죽이셨다잖아!”

의도치 않더라도 소문이라는 것은 항상 빠른 속도로 퍼지는 법이다. 우연히 이야기를 들은 병사들은 저 멀리 기사왕 폐하가 보낸 승전 소식에 서로를 얼싸안았다.

와아아아아아 - - - -!!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 운명을 거스르겠다고 했다. 그 약속을 승전으로써 증명한 기사왕은 백색 관문을 지키는 모든 북방군에게 뜨거운 용기와 의지를 남겼다.

그래, 할 수 있다. 터전을 위협하는 수많은 군대 앞에 이 손으로 고향을 지킬 것이다. 하늘이 떠나가라 울려오는 환호성 아래 북방 왕국의 깃발이 힘차게 흩날렸다.

뿌우우우우우우우 - - - - -!

쿵! 쿵! 쿵! 쿵!

“오크 놈들이 왔다!”

그리고 때마침 적의 출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관문으로 승전 소식이 전해진 오늘 북방을 위협하는 오크 군단이 평원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전원 전투태세!”

환호성은 빠른 속도로 잦아들었다. 회색 늑대가 내지르는 호령과 함께 북방군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각자가 배정받은 지역을 향해 뛰어가 미친 듯이 뛰어갔다.

“늦으면 다 뒤진다!”

“한 사람당 하나! 한 사람당 하나!”

수백 번, 수천 번 받은 훈련이다. 이제는 안방보다 익숙한 성벽 위에 줄줄이 선 북방군은 선임 병사들의 고함과 구수한 욕설을 받으며 하나둘 대열을 바르게 했다.

“재상, 이만 후방으로.”

“······무운을 빌게요, 경.”

순식간에 전투태세가 끝이 났다. 담담한 얼굴로 돌아가는 재상을 배웅한 회색늑대는 마지막으로 관문 위로 올랐다.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이 자신의 자리였다.

부우우우우우우웅 - - - -!

척, 척, 척, 척, 척.

유난히 무거운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힘차게 내려치는 전쟁 북이 심장 박동을 때린다. 흔들리는 바닥, 육중한 행진 소리, 갈색이었던 평원은 녹색 물결로 물들었다.

“······.”

북방군이 촛불이라면 오크 군단은 태양이었다. 그만큼 엄청난 숫자의 오크 군단과 막강한 영웅들이 북방과 동부 왕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고 있었다.

꾸욱.

하지만 창을 움켜쥔 북방군은 담담한 얼굴로 군단을 마주했다. 또 한 번 암흑의 시대가 왔다. 태양이 사라진 북방에 타오를 수 있는 건 오직 우리라는 작은 촛불뿐이다.

그렇게 자긍심이라는 창과 고개를 높게 든 북방군은 마치 녹색 조류처럼 움직이는 오크 군단을 담담한 얼굴로 바라봤다.

쿵, 쿵, 쿵, 쿵!

예상대로 군단은 두 개로 나뉘어 한쪽은 협곡 또 다른 한쪽은 백색 관문을 향해 진군했다. 두 곳을 동시에 공략할 생각인가. 회색늑대는 부관을 향해 명령했다.

“전서구를 보내라.”

“알겠습니다, 경!”

오만한 판단임과 동시에 효과적인 방법이다. 오크 놈들이 이렇게 양쪽을 공격한다면 동부와 북방은 완전히 단절되어 지원군을 보낼 수가 없게 돼 버리기 때문이다.

마냥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황제 핏줄이라 이건가. 회색늑대는 작게 혀를 찬 뒤 적 선봉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마침 한 무리 기수가 관문으로 다가왔다.

두두두두두두 - - -!

대화를 제안하는 백기가 흩날린다. 검은색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한 오크 장군과 기수들은 백색 관문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오러를 실은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적의 사령관은 누구인가!”

“이쪽이다.”

“황제 폐하께서 그대가 누구인지 묻고 싶어 하신다! 관문을 지키는 경은 누구인가!”

“북방의 허스칼 회색늑대다.”

북방 허스칼 회색늑대. 그 이름을 전해 들은 오크 장군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이름이 주는 무게는 수많은 대군을 뒤로한 장군조차 당혹하게 만들었다.

“만나서 영광이오, 회색늑대.”

“할 말만 해라.”

오크 장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품을 뒤지더니 이내 황금빛 서신을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오크 황제가 직접 찍은 서신이 있었다.

“폐하께서 말씀을 전하라 하셨소!”

“······말하라.”

“용맹은 드높고 의기는 눈부시다. 북방이 치러온 투쟁은 대륙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진정으로 형제를 아낀다면 이만하고 성문을 열어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전쟁 없는 평화다! 만약 항복하고 관문을 연다면 내 마땅히 자비를 베풀어 모두 고향으로 보내주겠다! 이것은 황제가 약속한 직인이오!”

오만하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대군을 이끄는 순간 오만은 자신감이 되고 협박은 설득이 된다. 오크 장군은 그 말을 끝으로 황금 서신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치욕스럽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소, 회색늑대! 만약 항복한다면 황제께서 경을 중히 중용할 것이오!”

“······그것이 유일한 살길인가?”

“그렇소!”

싸늘한 시선으로 오크들을 내려다보던 회색늑대가 언성을 낮췄다. 그러자 열심히 그를 회유하던 오크 장군은 순간 표정을 밝히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하지만 회색늑대는 항복이 아닌 검을 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살짝 베어 흐르는 피로 관문을 적셨다. 붉게 물든 피가 백색 관문 위에 떨어질 때 늑대는 답했다.

“여기서 죽겠다.”

노예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겠다. 역사의 흐름을 틀어막은 북방군은 회색 늑대와 기사왕을 위해 함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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