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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28화 (128/181)

128화

검은머리 기사왕 128화

졸지에 원정군 사령관이 된 제독은 그리 무능한 자가 아니었다. 적 사령관이 하필 검성과 기사왕이어서 그렇지 흐트러진 군단을 재정비할 능력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균열은 언제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지난 밀회를 통해 뜻을 모은 엘프 귀족들과 룩샤나 부부는 제독 몰래 은밀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펄럭!

끼이이익.

달조차 없는 어두운 밤, 해안가 항구를 몰래 빠져나온 엘프 선박 3척이 모래사장이 아닌 해안 절벽 앞에 상륙했다.

요새 오른쪽을 끼고 펼쳐진 해안 절벽은 자연이 만들어 낸 천연 성벽이다. 그 끝이 얼마나 높고 가파른지 북방군조차 성벽을 세우지 않은 완벽한 무인 지대였다.

“······정말 올라갈 수 있겠소.”

“걱정도 많네, 우리 못 믿어?”

하지만 만약 절벽을 올라갈 수만 있다면 이보다 좋은 침입 루트는 없었다. 요새 전체를 내려다보는 것은 물론이고 침입까지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잠자코 신호나 기다려.”

오러를 수련한 룩샤나 부부와 엘븐 가드들 앞에 절벽은 거슬리는 장애물일 뿐이다. 룩샤나와 악티는 자신만만하게 성공을 약속하며 무거운 갑옷을 내려놓았다.

끼이익, 쿵!

척, 척, 척, 척.

모든 준비가 끝났다. 선박 아래 숨어 있던 가문 소속 엘븐 가드들이 갑판 위로 걸어 나오는 것을 끝으로 엘프 귀족은 고급스러운 빛이 나는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일단 이거 받으시오.”

“······검?”

상자 안에는 검 두 자루가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손잡이가 푸른 잎사귀가 되어있는 외날 검이었는데 명검이라고 불러도 충분할 정도로 날카로워 보였다.

후웅!

“가볍군.”

“세계수 풀잎을 사용해 만든 명검이오.”

가벼운 것을 넘어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살짝 휘둘렀을 뿐인데 마치 오러와도 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은 룩샤나 부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그래······. 선물.”

의도가 뻔하다.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자신들을 이렇게 엮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룩샤나 부부는 자연스레 세계수 검을 챙겨 절벽으로 향했다.

파스스스스.

철썩, 철썩!

마침 바람이 잔잔하다. 해안 절벽은 파도치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고요를 이용해 절벽을 오른 부부를 시작으로 복장을 가볍게 한 엘븐 가드가 뒤따랐다.

탁, 탁!

움직임이 깃털보다 가볍다. 속도는 바람과도 같다. 자신들이 오러 사용자이자 엘프임을 증명하듯 부부와 엘븐 가드들은 가파른 절벽을 빠른 속도로 기어 올라갔다.

후우.

진즉에 이곳으로 올라올 걸 왜 힘들게 성벽을 공략했을까. 가문 내 엘븐 가드들은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무방비한 요새 앞에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모든 게 허탈해졌다.

“뭐해, 다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허탈함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래, 자신들을 농락하고 가지고 놀았던 검성이 저 요새 안에 있다. 기필코 사지를 찢어 뱃머리에 걸어 두리라.

탁, 탁, 탁, 탁!

마침 달조차 없는 밤이다. 망설일 것 없이 나아간 룩샤나 부부와 엘븐 가드들은 순식간에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등에 찬 활을 뽑았다.

끼이이익, 퓽!

순식간에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횃불 사이로 서 있는 초병 그림자를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전부 쏴 죽인다. 가뜩이나 조용하던 요새 후방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변했다.

“계획대로 움직인다.”

장난기는 사라졌다. 룩샤나의 눈동자는 머리카락 색과 닮은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악티 또한 살벌한 기세를 내뿜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두 무리로 흩어졌다.

타닥, 탁!

목표는 당연히 가장 중요한 성문과 북방군 사령관들이 기거하는 성탑. 그중 기사왕과 검성의 암살을 노린 룩샤나 부부는 무방비한 요새 후방을 자유롭게 활주했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침입은 너무나 쉬웠다. 초병은 방해가 되지 않는다. 마치 그림자처럼 어둠에 스며든 룩샤나 부부와 엘븐 가드들은 차가운 분노가 섞인 눈으로 성탑을 바라보았다.

까드득.

전장에서 마주했던 그 눈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창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북방 수리처럼 자신들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검성의 눈빛을 말이다.

그것은 놈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치욕이고 역린이었다. 감히 성전을 막아선 기사왕과 검성을 향해 진정한 엘프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 줄 것이다.

기기기긱! 퓽!

성탑 바로 안뜰까지 도착했다. 동시에 망설임 없이 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감시탑과 입구 앞 마지막 초병이 화살을 맞았다.

“악티.”

“맡겨 둬.”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할 사람들은 없다. 순식간에 성탑을 포위한 그들은 기사왕과 검성이 잠들어있을 내부를 들어가려 했다.

끼이이이익, 덜컹.

하지만 그 순간 룩샤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오러가 맺힌 검으로 부수려 했던 성탑 문이 너무나 쉽게 열렸기 때문이다.

“뭐······?”

처음부터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깜짝 놀란 룩샤나는 황급히 근처에 떨어진 횃불을 들었다. 그리고 진입하기 전 자신들이 쏘아 죽였던 감시탑 위 초병을 비춰 보았다.

“- - - - - - -!!”

진흙과 나무로 정교하게 만든 더미다. 처음부터 침입한 우리를 속이고자 더미에 갑옷을 입혀 경계를 세워 두었다. 경악한 룩샤나가 황급히 고함을 내지르려 했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 - - - - !!

화르륵!

하지만 그 순간 하늘 높이 날아오른 요란한 효시와 함께 사방이 환해졌다. 매복하고 있던 북방군은 일시에 쏟아져 나와 룩샤나 부부와 엘븐 가드들을 포위했다.

참으로 뻔하고 전형적인 상황이었다. 야습과 침입을 눈치챈 적 사령관이 역으로 함정을 판 것이다. 눈앞이 하얗게 물든 룩샤나는 다가오는 인물을 보며 이를 갈았다.

“검성······!!!”

모든 북방군 보병과 궁수들을 데리고 왔다. 정확히 오늘 밤, 야습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은 병사를 동원한 것이다. 동요를 감춘 룩샤나는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내부자를 심어 두었군.”

저런 도박성 짖은 확신이 그냥 나올 리 없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검성은 무심한 손짓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아니, 뻔했을 뿐이다.”

뻔하다? 설마 단순한 예측으로 이런 함정을 파두었다고? 룩샤나와 엘븐 가드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수치를 넘어선 부끄러움이 허탈함조차 들지 않게 했다.

와아아아아아 - - - -!!

사방에서 불화살이 날아왔다. 보병은 질긴 섬유질로 만든 그물을 사방에서 던지며 움직임을 방해했다. 전사가 아닌 병사가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 * *

부우우우우우웅 - - - -!!

우리가 내부로 들어온 적들을 처리하는 사이 미리 병력을 배치해 두었던 기사왕 눈투성이가 대대적인 야습을 가했다.

북방 기병대와 기사들에게 있어 엘프 영웅과 엘븐 가드 반절이 이탈한 적 진영만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군 병력이 멋대로 움직인 것도 모자라 이런 대대적인 야습이라니, 졸지에 기마 돌격을 맞게 된 엘프 진영은 화마로 뒤덮였다.

아마 이번 전투로 적 선봉대는 궤멸적인 피해를 볼 것이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기병 뿔피리 소리 아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떻게 안 거야?”

“음?”

“쟤들이 올 거 말이야.”

설마 검은 화살이 물어볼 줄은 몰랐다. 한동안 턱을 긁적인 나는 한참 전투가 진행 중인 전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야. 뻔했어.”

간단했다. 내가 보기 좋은 먹잇감은 남이 볼 때도 보기 좋은 법이다. 무방비하게 놓여 맛있는 냄새를 살살 풍기는데 그 어떤 바보가 물지 않고 지나치겠는가.

하지만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이라면 다른 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지나가기 좋은 길일수록, 무방비한 빈틈일수록 그 뒤에 보이지 않는 낚싯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면에서 미끼를 문 저들은 미련했다. 지나친 자신감이 도리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나는 작게 혀를 차며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한 전장 상황 살폈다.

“검성! 이 무슨 추태냐! 앞으로 나서! 명성답게 당당하게 맞서 싸우란 말이다!”

두꺼운 방진과 창으로 사방을 포위하고 대열 중간마다 북방 기사들을 배치해 두었다. 그리고 특별히 명중률이 뛰어난 궁수들만 모아 등 뒤를 끊임없이 괴롭혀 주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앞으로 나서지 않고 지휘관 자리에 앉아 전투를 방관하고 있었다. 여태 보여 주었던 선봉장이 아닌 마치 판 위에 검은 돌을 옮기는 오른손처럼 말이다.

“적이 지쳐 간다! 계속 던져!”

“그물 더 가지고 와!”

촉에는 치명적인 독을 발랐다. 그물에는 끈적하고 냄새나는 오물을 발라 두었다. 아무리 오러를 뿜고 발악해 보아도 서서히 소모되는 체력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투둑, 툭.

하늘에선 차가운 비가 내린다. 바닥은 금세 진창으로 변했고 그 위에 시체와 핏물이 섞여, 모든 것을 추하게 만든다. 고고한 영웅도 엘븐 가드도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흐으, 흐······.”

엘븐 가드가 대부분 죽었다. 성벽을 노린 나머지 잔당도 정리가 되었는지 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기병대를 이끈 눈투성이도 요새로 복귀하고 있을 것이다.

슥.

“중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공격이 멈췄다. 가운데 진창에는 피와 오물로 더럽혀진 룩샤나와 악티가 힘겹게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아 중앙으로 걸어갔다.

“죽어·········!!!”

“잠, 잠깐! 악티, 안 돼!”

순간 감춰 두고 있던 오러가 폭발했다. 내가 나서기만을 기다리던 악티가 모든 오러를 뽑아내며 빠르게 달려든 것이다.

그나마 이성이 남았는지 룩샤나는 서둘러 남편을 말렸다. 하지만 악티는 이미 자리를 벗어나 사정권에 들어와 있었다.

“수많은 세월을 베어 놓고.”

서걱!

“여전히 검 앞에 오만하구나.”

부딪칠 것도 없다. 머리를 움직여 간단히 피했다. 그리고 가볍게 검을 휘둘러 악티의 어깨를 잘랐다. 날은 빠르고 오러는 강할 뿐, 검 끝은 여전히 날카롭지 않았다.

“끄아아아 - - !!”

피가 튀어 오른다. 오른쪽 어깨가 통째로 잘려 나간 악티는 단말마와 같은 비명과 함께 허물어져 내렸다. 그러자 룩샤나가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죽어!!”

챙!! 깡!

파스스스스!

튕겨 낸다. 막아낸다. 영웅이라 불리는 엘프답게 검술은 막강한 오러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발악조차 잔잔한 호수를 움직이게 하기에는 너무나 무뎠다.

“왜, 왜 부러지지 않지?”

연신 검을 휘두르던 룩샤나는 목소리를 떨었다. 분명 오러가 없는 상태에서 여러 차례 부딪쳤건만 내가 들고 있던 검은 멀쩡했다. 아니, 도리어 더욱더 날카로웠다.

“어째서!”

그녀의 두 눈이 두려움으로 물든다. 자세는 서서히 무너졌다. 그리고 한계를 다한 오러가 빛을 잃는다. 오만함이라는 것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룩샤나는 죽음을 직감했다.

“아······.”

서걱!

두둥실!

그대로 목을 베었다. 눈동자에 빛이 점차 흐릿해진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토록 쉽다는 걸 이제 알았을까. 목이 잘려 나간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북방의 하늘이었다.

달이 모습을 감춘 지금, 하늘에는 수많은 운명을 동반한 별들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빛나는 것은 단연코 내 검이 마지막으로 남긴 궤적의 유성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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