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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27화 (127/181)

127화

검은머리 기사왕 127화

끼이이익, 쿵!

두두두두두두두 - - - -!!

열린 성문 사이로 깃발을 앞세운 북방 기병대가 쏟아져 나온다. 그 하얀색 파도는 마치 범람하는 강물처럼 주변을 장악하더니 이내 엘븐 가드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깔려 죽기 싫으면 뛰어야 한다. 허겁지겁 성문을 빠져나온 나는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기병대를 바라봤다. 그러자 애타게 찾던 녀석이 무리를 빠져나와 달려왔다.

푸르륵!

“검은 코!”

수많은 전장을 함께한 녀석은 내가 어디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전장을 질주해 이쪽을 향해 바삐 달려온다.

탁! 다각, 다각, 다각!

고삐를 낚아챘다. 바닥을 박찼다. 그러자 몸이 한 바퀴 회전하더니 익숙한 안장 감촉이 허벅지를 감싼다. 순식간에 사슴 위에 올라탄 나는 그대로 전장을 질주했다.

두두두두두두두 - - - -!!

합류고 작전이고 따질 시간이 없다. 기병대는 이미 돌격을 시작했고 엘븐 가드는 장창을 이용한 방진을 꾸렸다. 나는 그대로 고삐를 내리쳐 나아가는 속력을 올렸다.

두두두두두두 - - - -!!

급조된 진형은 쐐기진이다. 그 옆으로 급히 따라붙자, 선두는 당연히 상급 기사를 포함한 눈투성이였다. 누구를 닮아 저리 호전적인지! 나는 그 옆으로 재빨리 따라붙었다.

“스승님!”

“집중해라!”

격돌하기 직전이다. 나는 깜짝 놀라는 눈투성이 앞을 그대로 가로막은 뒤 검을 추켜들었다. 기사왕을 못 믿는 게 아니다. 엘븐 가드는 적 선두를 향해 반드시······.

츠즈즈즉!

쒜에에에엑! 채채채챙!

지휘관을 향해 오러가 섞인 투창을 날린다. 눈투성이를 대신해 그 공격을 전부 봉쇄한 나는 고삐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수많은 흰 뿔 사슴이 거대한 뿔을 들이밀었다.

콰아아앙 - - -!

콰직! 끄아아악!

북방 기병대가 적 진영과 격돌했다. 하지만 엘븐 가드는 오러를 다루는 정예병답게 날카로운 월도와 기다란 창으로 기병을 꿰뚫으며 필사적으로 진형을 유지했다.

“선회하라! 후미는 전장에서 벗어나!”

선두는 돌격에 성공했다. 하지만 비교적 실력이 부족한 후미가 발이 묶였다. 재빨리 선회를 명령한 나는 후방 진로를 방해하는 엘븐 가드를 향해 그대로 뛰어들었다.

“경!”

“선두를 부탁한다!”

서걱! 콰직!

컥!

각 진영 최정예끼리 맞부딪친 전장이다. 눈을 감고 뜨는 그 찰나 살벌한 오러 조각이 빗발쳤고 아차 하는 사이 목이 잘려 이승을 떠도는 불귀의 객으로 남고 말 것이다.

검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검은 코는 사력을 다해 내 움직임을 보조해 주었다. 그러자 가슴 속 파편이 맹렬히 회전하며 주변을 궤적과 검풍으로 힘껏 적시게 했다.

“이쪽으로 퇴각해!”

엘븐 가드가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한순간 막혀 있던 길이 뚫렸다. 후미 기병들은 그대로 내가 이끄는 진로를 따라 본대와 합류했고 주변은 오직 시체와 피 웅덩이뿐이다.

“후우!”

인정하기 싫지만, 확실히 역량 차이가 여기서 났다. 수십 년을 수련한 엘븐 가드는 너무나 강했고 거슬리는 적이었다. 놈들과 일정 거리를 대치한 나는 뒤를 돌아봤다.

두두두두두두두 - - - - -!!

쿠웅! 콰직!

아아악!

선회하라, 선두를 맡기마. 눈투성이는 이 두 가지 문장을 통해 내가 원하는 바를 이행할 줄 알았다. 상대하기 힘든 엘븐 가드 대신 다른 엘프 보병을 노린 것이다.

장애물이 없는 평지로 일제히 돌격해 파도처럼 적을 집어삼키는 북방 기병대. 선박 위 적 궁수부대가 응수해 보지만, 빠른 기동력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젠장······! 간악한 놈들이!”

다각! 다각! 다각!

낭패를 느낀 엘븐 가드가 서둘러 기병을 쫓아가려 한다. 하지만 기세가 등등해진 검은 코는 마치 양을 모는 개처럼 엘븐 가드들 주변을 가볍게 돌기 시작했다.

푸르륵!

내 주인이 아직 검을 들고 있다. 이 반경을 넘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 거칠게 투레질한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을 노려본 나 또한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꿀꺽.

숫자는 자신들이 훨씬 많다. 일시에 달려든다면 충분히 뚫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증명한 검성이라는 두 글자는 누구 하나 선뜻 나서게 하지 못했다.

‘죽을 수도 있다.’

고귀하고 존엄한 의식을 통해 탄생한 엘븐 가드가 마치 정육점 고기처럼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처음 나서는 이는 필경 저 시체들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용맹이 문제가 아니다. 저 인간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전장 위 지고한 선 기사, 판도를 바꾸는 영웅. 구시대 유산이 이 땅 위에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뿌우우우우우 - - - -!!

또 한 번 뿔피리가 울린다. 선박에서 지원군이 투입되는 것을 확인한 눈투성이가 때마침 퇴각 신호를 내린 것이다. 그렇게 북방 기병대는 요새 안으로 유유히 복귀했다.

“- - - - - - - -.”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강한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오러를 전부 소진한 엘프 영웅 한 쌍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비웃음으로 가벼이 응수했다.

“가자.”

푸르륵!

신이 난 검은 코가 한차례 투레질을 하더니 고개를 높게 올린다. 전장 아래 모든 시선이 모인 이때, 흰 뿔 사슴과 늙은 기사는 마치 산책하듯 가볍게 요새로 돌아갔다.

* * *

첫날 과감하게 진행했던 공격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공성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요새를 넘지 못해 큰 피해를 보거나 기세가 꺾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적, 질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왜 저 요새 하나를 넘지 못하는 것인가? 전쟁이 이틀째로 접어들 무렵 하늘을 찔렀던 엘프들의 자존심은 유리잔처럼 박살이 났다.

‘쿨럭쿨럭!’

그리고 설상가상 북방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엘프군 사이에서 돌림병까지 돌았다. 자비로웠던 세계수가 등을 돌리자 가호를 내려주었던 힘마저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눅눅한 날씨, 추운 바람, 짠 파도, 그리고 서부와는 다른 거친 풍토. 이 모든 것은 시시각각 엘프군 전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제독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해안을 점거하고 본대 합류를 기다린다.’

마땅한 수가 없는 공성 시도는 의미 없는 피해만을 불러올 것이다. 지금은 잠시 수세로 전환한 뒤 돌림병이 더 확산하기 전 사태를 해결하고 본대를 기다려야 했다.

“밖으로 나와 보시오, 제독! 언제까지 천막에 틀어박혀 그러고 있을 것이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엘프들이 그런 겁쟁이 같은 짓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 자들은 당연히 콧대만 높은 엘프 귀족들이었다.

“······물러나십시오!”

“이것이 진정 제독의 뜻인가!”

기껏 가문 내 실력 있는 엘븐 가드와 병사들을 지원해 주었더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이대로 함께 처박혔다가는 공적은커녕 본전조차 찾지 못하게 생겼다.

“젠장!”

아무리 귀족들 입김이 강하다고 해도 제독은 제독이다.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는 상황 앞에 귀족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르르 몰린 그들은 다급히 성토했다.

“우리라도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저 이기적인 작자가 움직이지를 않잖소!”

본대가 도착하면 불 보듯 뻔했다. 불멸왕과 여왕은 분명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는 핑계로 자신들을 한직으로 몰고 애지중지 키워온 사병을 뺏어가려 할 것이다.

부와 권력을 포기하면 무엇이 남겠는가?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그 꼴은 절대 못 본다. 이미 본 목적을 망각한 귀족들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원정 깃발을 노려봤다.

펄럭!

“여기들 모여 계셨군.”

“하하, 다들 익숙한 얼굴이시네.”

하지만 그 순간 귀족들이 모여 있던 천막 안으로 엘프 남녀 한 쌍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호위병이 제지하지 못한 그들은 다름이 아닌 본토에서 파견된 엘프 영웅들이었다.

1차 대전쟁에서 맹활약하고 영웅 지위를 획득했지만, 오러를 수련하고자 칩거했던 영웅 부부 ‘룩샤나’와 ‘악티’. 그들이 제독이 아닌 엘프 귀족들을 찾아온 것이다.

“······무슨 용무인가? 우리가 이렇게 반갑게 인사할 사이는 아닐 텐데.”

“에이, 딱딱하게 굴지들 말라고.”

그동안 제독이 내리는 명령을 군말 없이 따르는 그들이었다. 귀족들은 당연히 밀회를 찾아온 룩샤나, 악티 부부를 경계했다.

“당신들과 같은 이유지. 제독이 계속 내빼는 꼴을 보자니 답답해서 말이야.”

하지만 앞으로 나선 붉은 머리 룩샤나는 바로 본론부터 꺼내 경계를 일축했다. 선봉대에 자원한 부부 또한 움직이지 않은 제독에게 큰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전쟁.”

부, 권력, 명예, 모두 지겹다. 오랜 시간 칩거하며 실력을 쌓아 온 부부는 오로지 더 높은 성취와 강한 자의 목을 원했다. 히죽 웃은 룩샤나는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나머지는 당신들이 가져도 좋아. 원한다면 불멸왕 폐하께 직접 공적을 전해 주지.”

꿀꺽.

알현이 가능한 엘프 영웅이 우리의 공적을 직접 치하해 준다. 달콤한 제안 앞에 귀족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넘어왔다. 룩샤나는 쐐기를 찍고자 입술을 혀로 핥았다.

“대신 우리는 하나만 가져갈 거야.”

사실 부부는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왜냐하면, 첫날 마주했던 한 인간 남성에게 오러 화살이 막힌 것은 물론이고 주도권마저 처참하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검성의 목은 우리가 친다.”

한낱 인간 따위가 검의 별이라 불리다니.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 진짜 무위와 오러가 무엇인지 보여 줄 생각이다. 부부는 그 말을 끝으로 망설이는 귀족들을 노려보았다.

“협력할 거지?”

* * *

“경, 배급입니다.”

“고맙다.”

성벽을 부지런히 돌아다닌 취사 담당 병사가 내게 맛 좋아 보이는 수프 한 그릇을 떠다 주었다. 공격이 없는 오늘은 점심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배급해주는 모양이다.

우물우물.

모양새가 좀 이상해도 내용물 자체는 훌륭한 수프다. 나는 따뜻한 음식을 우물우물 씹으며 성벽 밖 적군을 연신 경계했다. 그러자 취사 담당 병사가 내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경.”

“음?”

“항상 솔선수범하시는 것도 그렇고,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는 것도 그렇고······. 직접 하기엔 쉽지 않은 일 아닙니까.”

“기사라면 응당 그래야지.”

그래, 북방 기사는 항상 그래왔지. 무엇이 그리 기쁜지 병사는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성벽 아래로 내려가기 전 품속을 뒤적이더니 이내 북방 산딸기를 내게 쥐여 주었다.

“꿍쳐 둔 겁니다. 피곤하실 때 드십시오.”

“맛있게 먹겠다.”

전장에선 항상 별식이 당기는 법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병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 뒤 입안으로 산딸기를 털어 넣었다. 물론 밖으로 씨앗을 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하지만 씨앗을 뱉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성벽 밖으로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나는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것을 감지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살폈다.

“- - - - - - -.”

이상하다. 분명 병사를 지휘하는 엘븐 가든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든 상태였다. 또한, 유난히 가문 깃발이 흔들리는 진영 쪽만 분주한 움직이기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변화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한동안 적군 진영을 노려본 나는 입안에 굴리고 있던 씨앗을 퉤 뱉었다.

퉤!

“부관!”

“부르셨습니다!”

“검은 화살을 불러라!”

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노리고 있다. 잔잔한 기류 속 작은 파동을 감지한 나는 그대로 발걸음 돌려 성벽 아래로 뛰어갔다. 결착의 순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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