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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26화 (126/181)

126화

검은머리 기사왕 126화

눅눅한 바닷바람에 숨이 턱 막힌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한 줄기 남은 이성마저 집어삼켰다. 좁아지는 시야, 흥건한 땀, 나는 답답함을 참지 못해 투구를 벗었다.

“후욱.”

으아아악!

방패! 방패 들어!

고여 있던 땀과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동시에 막혀 있던 시야와 청각이 훤히 드러났고 아비규환인 주변 상황을 여실히 전달해 주었다. 그래, 나는 성벽 위에 있다.

찌르르!

“일제 사격이다!”

또 한 번 본능이 반응한다. 이것이 시간마다 이뤄지는 일제 사격임을 직감한 나는 고함을 질렀다.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화살 비!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서걱! 후우우웅!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예기를 간직한 광풍이 날아오는 화살을 베어 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벤 것은 극히 일부, 황급히 들어 올린 방패로 수많은 화살이 꽂혔다.

끄아아아악!

젠장! 응수해! 으아아아!

궁술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엘프 궁수들은 성벽 위 북방군을 야금야금 찢어먹었다. 아마 보강한 떡갈나무 방패가 없었다면 진즉에 후퇴했을 것이다.

아아악!

나는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허벅지에 화살이 꿰뚫린 병사 하나를 황급히 뒤로 밀어낸 뒤 다시 전장을 살폈다. 그 순간 재배치를 끝낸 궁수부대가 응사했다.

“발사아아아 - - -!!”

퓨융, 촤자자작!

악에 받친 고함이다. 이를 악문 북방 궁수부대는 피가 질질 흐르는 손가락을 움직여 재빨리 재장전했다. 경련을 호소하는 아픔조차 현재로서는 사치스러운 고통이었다.

적을 하나라도 죽여야 아군이 산다. 시체와 피 웅덩이가 쌓여 가는 성벽 위에서 그 누구 하나 겁에 질린 이가 없었다. 또한, 그들을 따라 이를 악문 나는 분전을 독려했다.

“조금만 더 버텨라! 적이 성벽으로 접근할 때까지 뒤로 물러나지 마라!”

아직 방패로 진을 형성한 적 보병대가 모래사장을 건너오고 있다. 적 궁수부대가 지닌 압도적인 화력 지원도 엘프 보병들이 성벽에 달라붙는 순간 잦아들 것이다.

“또 온······! 컥!”

“아아악!”

하지만 이런 외침이 들릴 리가 없었다. 또 한 번 날아오는 일제 사격에 힘겹게 버티던 방진이 무너져 내렸다. 바닥을 기며 도망치는 부상병이 내 영혼을 아프게 한다.

명예와 영광이라는 이면 속 지우지 못하는 검은 흉터, 이 모든 광경이 전쟁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끔찍한 물감이다. 두 눈을 크게 뜬 나는 후방을 향해 소리쳤다.

“성벽 좌측에 예비대 투입해!”

“조금 전 출발했답니다!”

역시 눈투성이도 이쪽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적재적소 지원과 물자를 보내 주고 있는 지휘탑 쪽을 한번 바라본 뒤 비명이 들리는 방향을 향해 부랴부랴 뛰어갔다.

“젠장 면목 없습니다······.”

“수고했다.”

적이 접근하기 전 교대를 끝내야 한다. 나는 서둘러 검을 집어넣은 뒤 가까스로 살아남은 병사들을 일일이 부축해 주었다. 그러자 저 멀리 기사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경! 예비대가 곧 도착합니다!”

“서둘러 투입해라! 폐하는?”

“기병 돌격을 원하고 계십니다!”

“아직 때가 이르다! 신호를 기다려!”

도대체 누구를 닮았는지 호전적이기 짝이 없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눈투성이를 막으라고 명한 뒤 급히 투입되는 예비 보병대와 함께 성벽으로 올라갔다.

팅! 채앵!

지겨운 화살이 갑옷을 스치고 지나간다. 피와 시체 앞에 잔뜩 긴장한 예비대는 무언가를 각오하기도 전 날아오는 화살을 방패로 막아내야 했다. 저 멀리 고함이 들려온다.

“적이 온다!”

두꺼운 사각 방패로 대열을 짠 엘프 보병대가 어느덧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동시에 마치 아군 접근을 기다렸다는 듯 선박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빨리 뛰어 이 새끼들아!”

“여기서 다 죽고 싶어!”

부장들이 악을 지른다. 그 거친 욕설과 고함에 훈련을 몸으로 기억하는 북방 보병대는 서둘러 요새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두꺼운 떡갈나무 방패로 앞을 막는다.

가지고 온 공성 장비는 사다리가 전부처럼 보인다. 개개인이 무위가 자신이 있는 엘프 놈들다운 발상 앞에 나는 순간 전장 사기를 뺏어올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발리스타!”

엘프 선박을 요격하던 좌측 발리스타 병이 갑작스레 들려온 고함에 깜짝 놀란다. 하지만 이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탄이 얼마 남지 않은 발리스타를 옆으로 돌린다.

표적은 엘프 방진. 선박을 향해 뻥뻥 쏘아대는 발리스타는 다시 한번 시위를 장전했다.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다가오는 엘프 보병대를 향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퉁!

쾅! 콰직!

장인이 한 땀 한 땀 두드리며 만들었을 사각 방패가 너무나 손쉽게 쪼개졌다. 또한, 그 뒤에 있는 방패 주인은 물론이고 다닥다닥 붙어 있던 적군까지 통째로 꿰뚫렸다.

와아아아아아아 - - - - -!!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다. 살점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비록 수많은 부대 중 하나였지만, 통쾌한 광경 앞에 함성이 터져 나온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외쳤다.

“투창! 전 병사 투창하라!”

투창하라! 호령이 호령을 타고 성벽 전 병사를 향해 전달된다. 치열했던 훈련, 하나 된 움직임! 순간 방패가 양옆으로 열리고 짧은 철제 투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랴아아아아!”

“죽어, 이 새끼들아!”

단순한 화살 직사가 아니다. 성벽 위에서 떨어지는 힘이 실린 투창이다. 변칙적인 투창 세례 앞에 성벽으로 천천히 접근해 오던 엘프 방진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삐이이이이이익 - - - -!!

투창, 발리스타. 적 사령관은 조급함을 느꼈다. 이내 요란 피리 소리가 돌격 신호를 알리자, 방진 뒤 숨어 있던 엘프 보병이 요새 성벽을 향해 일제히 돌격해 왔다.

꾸욱.

오크가 싸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면 엘프는 날 때부터 고귀한 존재다. 저 커다란 키와 아름다운 용모를 보아라, 마치 마를 상대하는 천상의 군대를 보는 듯했다.

“거창! 방패 들어! 적을 막는다!”

하지만 성벽을 틀어막은 북방군 중 동요하는 이는 없었다. 그 무엇보다 고귀한 뜻을 품었기에 진창에서도 연꽃이 피는 법이다. 모든 북방군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서걱! 쾅!

쒜에에엑! 콰직!

본격적인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북방군은 성벽 아래를 향해 끊임없이 창과 화살을 날렸고 엘프 놈들은 성벽 위로 올라오고자 날카로운 고리가 달린 사다리를 걸었다.

덜컹! 탁, 탁, 탁!

막아야 한다, 뚫어야 한다. 막아야 산다, 뚫어야 죽일 수 있다. 온갖 감정이 삶과 죽음 사이 휘몰아친다. 자신이 죽었는지 모르는 병사들이 피를 토해 내며 쓰러졌다.

서걱!

그리고 나는 기꺼이 그 조류 속에 몸을 날렸다. 성벽 난간을 향해 몸을 날렸다. 360도로 돌아 검을 휘두르자 철제 사다리와 엘프군 보병이 마치 통나무처럼 잘려 나갔다.

하지만 이것 또한 모래사장에서 한 줌 덜어내는 움직임일 뿐이다. 더! 더!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나는 오늘 지휘관으로서가 아닌 한 명의 선봉장으로 전장 위에 섰다.

“검성이다!”

“좌측 성벽을 노려!”

그래, 이쪽을 보아라. 용맹하게 날뛸수록 기세는 오르고 적군은 당황한다. 난간을 제집처럼 뛰어다닌 나는 연신 사다리를 베어내고 검풍으로 화살을 튕겨 냈다.

두둥! 두둥! 두둥!

사기를 올려라! 절대 지치지 마라.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박동과 맞춰 웅장한 전쟁 북이 울린다. 분명 열세라고 생각되었던 인간은 엘프와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게!”

“내가 형제들을 지키겠다.”

때마침 성벽을 올라온 북방 기사들이 뿜어낸 오러로 강철 사다리를 자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은 온몸을 동원해 넘어오는 적군과 사다리를 밀었다.

하나, 둘, 셋! 덜컹!

끄아아아악!

무기가 부러지면 투구를 내려찍는다. 창이 몸을 꿰뚫어도 양손으로 창대를 부여잡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성벽을 점거하려는 적군과 함께 아래로 뛰어내린다.

처절한 항쟁이다. 용맹을 넘어선 절제된 광기 앞에 엘프들은 기가 질렸다. 사다리가 하나둘 넘어가며 승패를 좌우하는 기세는 완전히 북방군 쪽으로 넘어왔다.

우우우우웅- - !

퓨웅, 쾅! 쿠르르릉!

하지만 그 순간 엘프 진영에서 막강한 힘이 실린 오러 화살이 날아왔다. 마치 별똥별처럼 줄기를 남긴 그 오러 화살은 그대로 성문에 꽂혀 커다란 굉음을 유발했다.

찌르르!

본능이 경고를 보내온다. 이를 악문 나는 시선을 돌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한 엘프 남녀 한 쌍이 서 있었다.

“- - - - - - -!!”

주체하지 못하는 오만한 기운, 기나긴 세월이 선물해준 막강한 오러. 불멸왕 앞에 충성을 맹세한 엘프 영웅이 오랜 칩거를 풀고 수십 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퓨웅! 쒜에에에엑, 쾅!

쿠르릉!

“성문입니다, 경!”

“엘븐 가드가 옵니다!”

모든 힘을 끌어내 발사한 오러 화살로 인해 요새 성문에는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러자 함성을 내지른 수많은 엘븐 가드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요새를 향해 돌격했다.

“엘븐 가드! 영광스러운 길을 걸어라!”

“승리를 폐하에게 바치자!”

왜 공성추가 없었는지 이해가 간다. 엘프 영웅들의 막강한 힘을 등에 업은 적 사령관은 양측 병력이 격돌해 힘을 빼는 사이 결정적인 한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경!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놈들이 곧 몰려옵니다!”

생각해야 한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장 중요한 성문이 뚫린다. 발리스타? 탄두가 아직 보급 중이다. 북방 기사단? 엘븐 가드를 상대로는 역부족이다.

부적합, 부적합, 불가, 또 불가!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려 봤지만, 이성이 보내오는 답변은 철저한 반대였다. 대책이 없다. 수가 없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두근, 두근, 두근.

수많은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숙명이 나를 짓누른다. 이 모든 것이 뒤집힐지도 모르는 거대한 해류 앞에 나는 무방비하다. 대답해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말이다.

“······신호를 보내라.”

“경?”

“북방 기병대를 호출해라! 모든 기사를 모아라! 폐하께 반격할 때가 왔음을 알려라!”

스르르릉!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요새 성벽 아래 착지했다. 고개를 들었다. 무기를 든 수많은 엘븐 가드들 사이로 유성우 같은 오러 화살이 날아왔다.

‘한계.’

눈앞이 하얗게 변한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폭발한 감각이 만들어 낸 후폭풍이다. 추켜둔 검을 아래로 내린 나는 맹렬하게 회전하는 기운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 - - - - - - -.”

돌풍이 멈춘다. 기류가 안정된다. 호수처럼 잔잔한 기운이 내게 깃들었다. 검술의 극은 어디인가, 격과 류, 흐름과 궤적. 이 모든 것 사이에서 나는 두 눈을 떴다.

번쩍!

몸을 뒤튼다. 공간을 뒤트는 오러 화살이 바로 옆을 지나간다. 검술로서 완성한 집중은 그 궤를 쫓아 기회를 만들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시간보다 가벼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치지직.

화살대가 잘렸다. 나아가는 힘을 잃은 화살은 마치 먼지처럼 부스러졌고, 매개체를 잃은 오러 또한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향한다. 남은 것은 오직 무음뿐이었다.

“하아······.”

검 끝에서 전해져 오는 잔잔한 전율. 눈을 살포시 감자 불을 끈 연기처럼 숨이 입을 통해 빠져나간다. 내 손은 자연스럽게 공명을 느끼다 이내 손잡이를 쳤다.

탱! 파르르르.

검 끝 떨림이 멈춘다. 성문을 향해 달려오던 엘븐 가드가 경악한다. 함성과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자리, 나는 허리를 곧게 편 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편승했다.

뿌우우우우우우우 - - - -!

“북방 기병대!”

요새 안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육중한 성문이 열리며 기사왕과 검성을 연호하는 함성이 세상을 집어삼킨다. 선두는 하얀 바람, 그 위에 탄 기사왕이다.

“적을 섬멸하라!”

눈투성이가 이끄는 북방 기병대와 기사단이 일시에 성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달려오는 엘븐 가드를 맞상대하고자 바람과도 같은 기마 돌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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