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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25화 (125/181)

125화

검은머리 기사왕 125화

“이, 이게 무슨······.”

갑판을 돌아다니던 총사령관 제독이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그 뒤를 이어받은 부제독은 자신 또한 화살에 맞아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냐하면, 눈앞에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 건조한 전투용 엘프 선박 여러 척이 암초 밭과 파도 위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노련한 조타수가 있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선봉대 전체가 휘말릴 뻔했다. 참담함을 애써 감춘 부제독은 갑판을 바삐 뛰어오는 엘븐 가드를 향해 물었다.

“적은?”

“지상으로 도망쳤습니다!”

“젠장! 어떻게 그걸 놓치나!”

“제독, 적이 너무······.”

안다, 놈들은 급조해서 꾸린 추격대로 잡기에는 적은 너무나 강했다. 그 유명한 변절자 검은 화살과 서북방 바다를 주름잡던 부랑자 부대가 직접 바다로 나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반쪽짜리 혼혈 놈들보다 더욱더 무서웠던 것은 바로 한 중년 인간이었다. 겨우 한 자루로 선박 한 채를 침몰시킨 경이로운 검술! 놈이 누군지는 뻔했다.

“검성······!”

그는 악몽이었다. 수많은 화살, 수많은 창, 수많은 오러로 무장한 아군 병사들은 폭풍처럼 쓸려나갔다. 오죽하면 그 오만한 엘븐 가드들조차 백병전을 포기했겠는가.

그리고 끈질겼던 추격의 대가는 참혹한 참패였다. 엘프 선봉대는 무려 10척이 넘는 선박과 수백 명이 넘는 사상자가 생긴 채 해안 상륙을 지연하고 만 것이다.

아마 엘프 여왕이 이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이미 죽어 버린 제독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참수해 버릴 것이다. 부제독은 결국 갑판 한쪽에 모인 귀족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왜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이오!”

지겨운 엘프 귀족 놈들! 감히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선박을 움직였다. 하지만 상황이 파탄 난 지금 반성하는 기색은커녕 자기들끼리 모여 떠들기 바빴다.

“사령관이 저격당했는데 그럼 가만히 보고만 있는가? 추격은 당연하오.”

“공적에 눈이 멀어서겠지!”

역사상 최대 규모로 꾸려진 엘프 원정군은 왕국 상비군과 귀족들 사병이 섞인 혼성 부대다. 말 그대로 귀족들이 불멸왕을 향해 굴복해 선박과 병력을 내놓은 것이다.

“······말이 너무 과하군, 부제독.”

허나, 원정군에 참전한 엘프 귀족들은 위대한 불멸왕 폐하와 엘프 여왕 앞에서만 굽실거릴 뿐 자신과 같은 군인 출신 지휘관들에게는 오직 무시와 멸시만을 해 왔다.

“폐하께서 이런 상황을 썩 달가워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않나?”

놈들이 가진 사병과 선박만 없었어도 이런 굴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골적인 협박에 온몸을 부르르 떤 부제독은 결국 갑판 위 병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좌초된 배는 후속 부대에 맡겨! 선봉대는 곧바로 상륙해 요새를 공격한다!”

꼬리를 내렸다. 그 모습에 콧방귀를 뀐 귀족들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각자가 가지고 온 선박으로 돌아가 가문 문양이 새겨진 깃발과 돛을 보란 듯이 펄럭인다.

“젠장······!”

오만하고 어리석다. 전쟁을 겪어본 적도 없는 자들이 우월함에 취해 전장을 우습게보고 있었다. 적의 사기를 꺾어야 하는 선봉군은 처음부터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 * *

“단장님이 돌아오셨다!”

엘프 선박을 암초 밭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능숙하게 선박과 전장을 이탈할 우리는 적이 쫓아올 수 없는 가파른 해안 절벽을 통해 요새로 복귀했다.

“바리케이드 치워! 그대로 개문한다!”

“어딜 겨누는 거야! 시위 풀어!”

요새 경계는 삼엄했다. 병력 배치는 진즉에 끝이 나 있었고 수도에서 가져온 대형 발리스타는 살벌하게 해안을 노리고 있었다.

또한, 선박이 접근할 수 있는 진입로와 모래사장에는 두꺼운 나무 말뚝과 상륙을 막을 장애물이 잔뜩 설치되어 있었다.

철저하다. 흠이 보이지 않는 군기다. 그동안 북방을 위해 맹훈련한 왕국 상비군은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다.”

한 기사가 건네는 마른 천으로 찐득한 땀과 염분을 닦은 나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복귀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왕 눈투성이가 수많은 근위대와 함께 달려왔다.

“스승님!”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폐하. 아마 적들도 곧 모습을 보일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준비는 철저합니다.”

내게 가르침을 받은 눈투성이다. 이 두 눈으로 직접 보았듯 수성 준비는 철저히 되어있었다. 기사가 가져다준 개인 갑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눈투성이와 함께 걸었다.

“적군 선봉대를 발견했습니다. 아마 본대가 도착하기 전 해안을 확보하려 할 겁니다.”

“규모는요?”

“저희 기준으로 군단급입니다.”

선봉대만 해도 방어군보다 3배는 더 많다. 본대는 아마 더 많을 테니, 저 넓은 모래사장을 엘프로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겁먹은 기색은커녕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머릿속에는 이미 적을 쳐부술 생각으로 가득했다.

“틈이 있을까요?”

“확실하지 않지만······.”

“저는 스승님 안목을 믿어요.”

99번 이겨도 1번 못하면 패배하는 것이 전쟁이다. 아무리 막강한 군대라고 한들 비집고 들어갈 틈은 언제나 존재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적 지휘 체계가 불안합니다.”

“사령관 역량이 떨어지나요?”

“그보다 파벌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전쟁을 오랜 시간 전전하다 보면 저절로 배우게 되는 것이 있다. 내게 달려드는 이 병사가 어떤 사령관의 지휘를 받고 또 어떤 인물을 따르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그 직감이 말하길, 적 사령관은 군단 전체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부하들이 놈을 따르지 않는 게 분명했다.

“······숨통을 끊을 기회가 생기겠군요.”

섣부른 행동은 사냥감을 도망치게 한다. 확실할 때, 확실한 순간, 맹수처럼 뛰쳐나가 적의 목을 물어뜯어야 한다. 눈투성이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땡 땡 땡 땡 땡 - - - -!!

그리고 그 순간 최전방 감시탑에서부터 전해진 경종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바다를 감시하던 초병이 해안 좌측에서 다가오는 엘프 대선단을 발견한 것이다.

“적군이다! 서둘러 뛰어!”

“23번대! 23번대는 이쪽이다!”

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각 구역을 담당하는 부장들의 호통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마치 기계처럼 몸을 움직여 각자 정해진 구역을 향해 서둘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폐하,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경!”

이제 움직일 차례다. 나는 중군 전체를 통솔하게 될 눈투성이를 향해 짧은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서둘러 검은 코 위에 올라타 바닥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다각! 다각! 다각!

빠르게 내성을 빠져나온 나는 요새 한가운데를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그러자 북방군 깃발이 펄럭이는 해안가 앞으로 수많은 엘프 선박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꿀꺽.

예상대로 엄청난 규모다. 저 뒤에 더 많은 선박이 다가오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북방군 병사들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자리를 지켜라!”

“떨지 마라! 폐하가 함께하신다.”

이를 눈치챈 경험 많은 부장들이 서둘러 사기를 독려하려 했지만, 어깨 위에 자리 잡은 무거운 짐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래, 인간에게 있어 엘프란 그런 존재다. 수십 년 만에 다시 격돌하는 원수들은 여전히 증오함과 동시에 두려운 적이었다.

“깃발을 다오!”

“경?”

나는 뒤따라오는 호위 기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거대한 왕국 깃발을 건네받은 뒤 요새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내 의중을 눈치챈 검은 코가 보란 듯이 발굽 소리를 키운다. 마침 바람이 돕고자 나섰는지 맹렬한 돌풍이 불었다. 잔잔하던 왕국 깃발은 날개를 펴듯 펄럭였다.

돌풍이 먹구름을 몰아냈다. 마침 어둑하던 해안가로 빛이 당도했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적이 아닌 왕국 깃발로 향했다. 흥분한 검은 코가 거칠게 투레질했다.

푸르륵!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형제들아. 우리는 먼 길을 돌아 피해갈 수도,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대척점 앞에 섰구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한 목소리는 초록색 기운과 공명해 병사들 귓속을 파고들었다. 성벽 위로 올라선 나와 검은 코는 병사들 사이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짊어진 짐이 너무나 무겁다.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가 견디기에는 너무나 가혹하다. 이 고통은 도대체 언제 끝이 나는가? 나조차 다가올 운명이 두려울 따름이다.”

병사들이 간절한 시선을 보내온다.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조류만큼이나 복잡한 것은 운명을 거스르는 인간이고 함께한 형제들이었으니 나는 한 가지는 확신할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나와 너희가 여기서 이겨 적을 무찌른다면 무엇이 남는지를. 명예? 이 자리에 선 너희들은 이미 명예롭다. 영광? 세상에는 그보다 숭고한 게 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두 눈을 크게 뜬 북방군은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먹구름을 뚫은 눈부신 광휘는 그리운 냄새, 한 줄기를 코끝으로 맡게 해 주었다.

땀 흘려 수확한 보리 냄새, 집에서 굽는 향긋한 빵 냄새, 부모님의 웃음과 자유롭게 뛰노는 아이들.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쫓아낸 것은 다름이 아닌 내 고향 북방이었다.

“우리는 물려줄 터전이 있다. 봄을 찾는 후손들을 위해 부끄럽지 않은 겨울이 되자.”

스르릉!

검을 뽑았다. 그러자 심장 속 세계수 파편이 의지와 공명하며 청록색 가호와 축복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가치란 무엇인가? 역경을 딛고 만들어 낸 인간의 북방 찬가였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뿌우우우우우 - - - - - -!!

엘프들이 상륙을 시작한다. 동시에 공격을 알리는 사슴뿔 피리가 울려 퍼졌다. 억눌려있던 거대한 함성이 요새와 하늘을 진동시켰고 북방군은 절제된 광기로 물들었다.

“발리스타 부대!”

“궁수부대!”

얼어 붙어 있던 시간이 깨졌다. 정신을 차린 부장들은 미친 듯이 고함을 내지르며 원거리 부대를 독려했다. 그러자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인 궁수들은 시위를 걸었다.

“발사!”

퉁! 퉁! 퉁!

퓽! 촤자자자자자작!

붉은 깃발이 하강한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부장들은 발사 신호를 보냈다. 발리스타 부대가 방아쇠를 당기고 장력을 한껏 당기고 있던 궁수부대는 시위를 놓았다.

쒜에에에에엑!

쾅! 파바바박!

하늘에서 화살로 만든 비가 쏟아진다. 해안을 향해 접근하던 상륙선은 그대로 구멍이 뚫려 침몰했고 수많은 엘프 병사 또한 온몸이 고슴도치로 변해 쓰러진다.

“재장전!”

“재장전 끝! 시위 당겨!”

하지만 끝이 아니다. 최대 사정거리를 기다리고 있던 북방군은 능숙하게 재장전을 끝냈다. 그리고 목이 쉬어 버린 부장의 명령과 함께 또 한 번 활시위를 놓았다.

아아아악 - -!

말뚝으로 인해 상륙선에 구멍이 뚫린다. 가까스로 상륙한 엘프 놈들은 장애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다 그대로 화살을 맞아 죽었다.

붉은색으로 물드는 해안가.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된 모래사장. 화력을 집중한 북방군으로 인해 1선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날아오는 화살을 쳐낸 나는 마치 개미처럼 몰려오기 시작하는 엘프 놈들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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