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검은머리 기사왕 124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빠듯했다. 군사 움직임을 확인한 기사왕 눈투성이는 그 즉시 왕국을 전시체제로 바꾸기 위해 모든 북방인을 향한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강제적인 집행은 없었다. 눈투성이가 징발과 징병을 고민하기도 전,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북방인들이 왕국을 지키고자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다시는 뺏길 수 없다.’
전쟁 자금을 위한 기부 행렬이 줄을 이었다. 말과 마차를 가지고 온 상인과 집 안에 있는 냄비까지 전부 털어온 주부들로 인해 왕궁으로 향하는 거리는 미어터졌다.
그리고 각 모병을 시작한 수도와 도시 병영에는 지팡이를 짚은 노인부터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아이까지 전부 몰려들어 한 차례 혼선을 겪는 일이 흔해졌다.
‘고향을 지켜야 한다.’
각오하는 이는 있어도 두려워하는 이는 없었다. 내 자녀와 내 후손에게 똑같은 절망을 보게 할 수 없다는 그 의지가 대침공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게 했다.
목표치는 채우고도 남았다. 재상은 전쟁 물자를 구분해 각 전선으로 보급했다. 물론 엄청난 기세로 모인 시민군을 편제하고 즉각 전쟁 무장과 기초 훈련에 돌입했다.
하지만 정예 상비군과 급히 소집된 예비군은 그보다 먼저 수도를 빠져나왔다. 시민군이 편제, 합류되는 것을 기다리기에는 이미 적의 군사적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인선을 배치하고 각 전선을 향해 군대를 보내야 한다. 관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기사왕 눈투성이는 드디어 수도 북방군을 향해 출정 명령을 내렸다.
‘관문 전선.’
오크군이 쳐들어올 장소인 백색 관문에는 당연히 회색 늑대가 투입되었다. 철통과 같은 방어는 물론이고 주요 공격 대상으로 예상되는 협곡 관문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이미 집결을 끝낸 동부군이 협곡 관문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최후의 허스칼 회색 늑대와 용맹한 강철왕 리처드라면 오크군을 상대로 무사히 관문을 막아 줄 것이다.
‘해안 전선.’
그리고 최대 격전지로 예상되는 해안 요새에는 기사왕 눈투성이가 직접 친정하는 것도 모자라 기사단장인 나와 부랑자들을 이끄는 검은 화살이 전부 투입되었다.
세계수를 빼앗긴 엘프 놈들은 말 그대로 광기에 찬 공격을 가해 올 것이다. 불리한 전장과 병사들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기사왕의 친정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조금만 버티세요, 폐하.’
떠나는 왕을 배웅한 재상과 붉은 강철은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반격의 순간이 오는 그때 반드시 군을 이끌고 오겠다고 말이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모든 것은 북방을 위해, 인간을 위해, 그리고 어머니를 위하여. 수도 앞에서 마지막 체온을 나눈 우리는 그렇게 각자에게 정해진 치열한 전장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 * *
“멀미 안 나?”
“생각보다 괜찮네.”
오늘따라 날씨가 좋지 않다. 북방 바다는 육지보다 더욱 민감했기에 검은색 먹구름과 함께 파도를 연신 넘실거리게 했다.
차라리 적을 막는 폭풍우라도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애매하게 흔들리는 선박 위에서 얼굴에 묻은 소금기를 닦았다.
“거기 제대로 묶어! 풀리면 다 뒤진다!”
“평소처럼 하라고 이 얼간이들아!”
흔들리는 갑판 위에선 선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부랑자들과 요새에서 차출한 어부 출신 병사들이었다. 검은 화살이 아쉽다는 얼굴로 말했다.
“멀쩡한 배가 별로 없더라고.”
“이 정도면 충분해.”
현재 수도에서 출발한 북방군은 해안 요새에 무사히 도착했다. 하지만 전쟁 상황이 너무 급했던 만큼 병력 배치와 방어시설을 편성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덕분에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검은 화살과 나는 꽤 오랜 시간 운용한 해적선 한 척을 포함해 엘프 놈들에게서 나포한 군사용 선박 두 척을 바다로 끌고 나왔다.
그동안 자잘한 유지비 때문에 골칫덩이 취급을 받던 왕국 유일 군사용 선박들이 적 항해 지연과 척후 작전을 위해 적진인 서부 바다 한가운데로 투입된 것이다.
항상 땅에서 구르던 내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는가. 두 손을 걷어붙인 나는 선원들과 함께 직접 몸을 움직여 적이 나타날 것이라 예상되는 지점을 향해 항해했다.
철썩, 철썩!
육지와 멀어질수록 날씨는 더욱 나빠졌다. 항해를 못 할 정도는 아니지만, 주변 관측이 가능한 시계가 무척이나 흐리고 역풍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항해를 방해했다.
땡땡땡!
“적군이 보입니다!”
“경! 엘프 놈들입니다!”
하지만 수년간 바다에서 살다시피 한 부랑자들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거대 선단을 발견했다. 경종을 들은 나는 서둘러 뱃머리를 향해 달려갔다.
“- - - - - - - -.”
거대한 돛, 거대한 선체, 바다를 가르는 선수상과 어두운 사방을 밝히는 횃불들. 북방을 침공할 엘프 부대가 끝이 보이지 않는 선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다.
꿀꺽.
엄청난 규모다. 노련한 부랑자조차 얼굴을 굳혔고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킨다.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움직이는 엘프 대선단 앞에 3척이라는 규모는 무척이나 초라했다.
“계속 나아가!”
하지만 나는 단호히 명령했다. 그러자 이를 악문 선원들은 빠르게 두려움을 떨쳐내고 각오를 다졌다. 각자 정해진 자리로 돌아가자 배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푸르륵!
척후 임무는 성공했다. 나는 새장에서 전서구를 꺼내 적이 가깝게 접근했다는 듯 서신을 넣었다. 그리고 해안 요새가 있는 방향을 향해 전서구를 여러 개를 날렸다.
“잘 부탁한다.”
무조건 도착해야 한다. 나는 어머니 북방을 향해 짧게 기도한 뒤 점점 가까워지기 엘프 선단을 노려보았다. 이제 남은 임무는 적의 진군을 지연시키는 것뿐이었다.
“키 넘겨! 전원 선회한다!”
항해가 익숙한 검은 화살이 조타실로 뛰어가 키를 잡았다. 동시에 돛은 완전히 펼쳐졌고 선박은 엘프 대선단 부근까지 접근해 우측으로 우회하기 시작했다.
“깃발 올리겠습니다!”
미끼가 될 꼬리를 흔들어야 한다. 보란 듯이 북방군 깃발을 올린 선박들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엘프 선단과 교차했다. 우리가 노린 것은 바로 선봉대 유인이었다.
콰르르르릉- - -!!
끼이이이익! 펄럭!
빗줄기가 거세진다. 먹구름은 뇌운으로 물들었고 파도와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적 선봉은 뱃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젠장.”
바다를 자유롭게 다니는 엘프들은 항해를 향한 자부심이 엄청나다. 하지만 나포한 배를 드러내는 도발에도 불구하고 적 선봉대는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노련한 사령관이 있는 게 분명했다. 화살 사정거리 바로 앞까지 접근을 명령한 나는 한동안 고민했다. 안전한 복귀와 임무 완수 그 어느 것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검성! 저기 보여?”
그 순간 키를 맡긴 검은 화살이 내 옆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선박 위 실루엣만 보이는 엘프 병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잘 안 보여.”
“지휘선이야. 마침 선봉장도 나와 있네.”
검은 화살은 엘프 혼혈답게 엄청난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좋은 기회라고 말한 그녀는 부하 부랑자가 가져다준 철궁 시위에 유난히 짧은 화살을 걸었다.
“사정거리 밖이야.”
오러 화살조차 닿기 힘든 거리다. 괜한 시도라고 생각한 나는 검은 화살을 만류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 장난스러운 얼굴이 아닌 어딘가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기 하나 할래?”
“내기?”
“그래, 내가 만약에 맞추면 말이야.”
끼기기기긱.
자신이 맞추면 소원 하나를 들어 달라. 그렇게 말한 검은 화살은 시위를 당겼다. 어찌나 강하게 당겼는지 철궁이 비명을 질렀고 이내 푸른색을 띤 오러가 넘실거린다.
“······그래, 내기하자.”
그 순간 엘프 핏줄이 개화한다. 검은 화살은 세계수를 만났던 그때처럼 눈이 푸른색으로 변하며 강한 녹색 기운을 퍼트렸다.
그녀를 옭아맸던 아픈 태생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소중한 동료, 소중한 형제, 소중한 고향. 그리고 비로소 자신을 인정했을 때 검은 화살은 한차례 성장했다.
“무르기 없기다?”
투웅!
웃음을 머금은 그녀가 시위를 놓았다. 그러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뚜렷한 오러와 함께 한 줄기 빛이 대기를 가른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내리치는 뇌운을 뒤로하고 날아오른 법칙과 현실을 역행하며 한 척의 배를 향해 날아갔다.
콰릉!
소리는 없었다. 낌새조차 없었다. 마침 내려친 벼락이 오러를 감추고 하늘에서 내린 비가 시야를 흐린다. 그렇게 바다 위로 날아오른 화살은 무언가에 꽂혔다.
“- - - - - - -!!”
맞혔다. 화살이 명중한 실루엣은 그대로 비틀거리다 쓰러졌고 이내 경악한 움직임과 분주한 횃불이 갑판 위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정말 맞힌 것인가?
펄럭!
“적이 뱃머리를 돌립니다!”
모두가 경악을 감추지 못한 그 순간 묵묵하게 나아가던 선봉대가 뱃머리를 돌려 우리를 엄청난 속도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놈들의 분노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내가 할 말을 잃고 돌아보자, 그곳에는 활을 내려놓은 검은 화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이겼네.”
당당하게 내기에서 이긴 검은 화살은 내게 양손을 뻗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갑판 한가운데서 보란 듯이 입을 맞췄다.
청아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빗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따뜻한 축축함과 함께 그녀가 이마를 맞대며 속삭여 왔다.
“죽지 마, 알았지?”
이건 약속이었다. 체온을 나누며 맹세한 검은 화살은 이내 나를 놓아주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뛰어갔다. 그녀는 다시 조타키를 잡으며 걸쭉한 욕설을 내뱉는다.
“뭐해, 멍청이들아! 귀쟁이 놈들이 따라온다! 바람구멍 나기 전에 뛰어!”
순간 얼어붙었던 부랑자들과 병사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타와 돛은 급격하게 돌아갔고 깜짝 놀란 나머지 아군 선박도 우리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선봉대가 우리를 노린다. 오싹하면서도 찌르르한 기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말 뭐 빠지게 뛰어야 할 때란 거다.
“검성! 목적지를 말해 줘!”
“그대로 선회해서 놈들을 암초 밭으로 유인한다! 우리는 계속 해안으로 향할 거다!”
아무리 오랜 시간 항해를 해 온 엘프 놈들이라고 해도 수많은 암초 밭 위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거기서 선봉대를 한차례 지연시키고 최대한 큰 피해를 주어야 했다.
끼이이이익- -!
아군 동시에 선박은 선회했다. 동시에 수많은 엘프 선봉군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고 하늘에는 이른 불화살이 날아왔다.
고양이를 피하는 쥐처럼 도망쳐라. 닿을 듯 말 듯 아슬한 사정거리를 유지한 아군 선박은 해안 요새 바로 옆 굽이지는 만과 암초 밭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릉!
나는 미친 듯이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수많은 엘프 선박을 노려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번쩍이는 북방 벼락이 거친 운명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