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검은머리 기사왕 123화
‘그래서 무엇이 남았지?’
드디어 왕관을 쓴 황제 티그막은 머리가 아팠다. 길고 추잡했던 내전 끝에 왕좌 위에 앉았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황폐해진 영토와 자신을 불신하는 신하들뿐이었다.
그래, 운이 좋았다. 형제 중 가장 유능했던 2황자는 북방 왕국을 이기지 못해 꼬꾸라졌고 형제 중 가장 강했던 3황자는 하필 불멸왕을 만나 힘을 쓰지 못했다.
물론 제때 움직여 이득을 취하는 것 또한 전사의 덕목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자신은 위대한 선왕 오그르의 아들이며 현재 오크 제국을 이끄는 유일한 황제였다.
지고한 무력을 증명해야 한다. 약해진 형제를 취해 황제가 된 기회주의자가 아닌 모든 것을 무력으로 짓밟고 불태워 다시 한번 제국을 영광으로 이끌 증명을 말이다.
‘나는 오크 황제다.’
황제 티그막은 왕관의 무게를 느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고 자각한 그 순간 숨어 있는 전쟁 군주였던 선왕의 피가 맹렬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평가는 이제 의미 없다. 철이 들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오크 황제는 온전한 자신이었고 현실 또한 부동하다. 티그막은 피로 젖은 왕좌에서 일어나 외쳤다.
“경들의 눈에서 의심을 읽었다. 그것은 분명 나를 향한 불신이겠지. 현 제국은 가장 위대하지도, 가장 강하지도 않으니.”
엘프와 전쟁에서 대패했다. 그리고 선심 쓰듯 내민 휴전을 받아들인 것도 모자라 패배 후 빼앗겼던 영토와 수많은 포로를 거의 헐값을 치르고 가져올 수 있었다.
치욕이다. 위대한 오크 종족이 한낱 귀쟁이 놈들에게 양보를 받아야 한다니. 드높았던 자존심이 꺾여 버렸을 때 오크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절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뜩이나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있던 오크 제국에 한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북방과 동부를 점거한 인간 놈들이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무방비한 후방을 공격하려 했다는 기가 막힌 소문을 말이다.
절망은 분노가 되었다. 서쪽 엘프가 증오를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면 호전적인 오크들은 그것으로 자신을 무장했다.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세울 방법은 전쟁과 승리! 오직 파괴만이 유일하다. 황제 티그막은 그 기류를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위험한 결단을 내렸다.
“들으라! 들으라 오크들이여! 다시 한번 위대한 정신을 세울 때가 왔노라.”
이성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 군주와 신하라면 황폐해진 영토를 돌보고 내정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이미 항거할 수 없는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녹색 피부를 가진 모든 전사를 소집하라. 영웅들을 설득하고 선두를 약속하겠다. 나 티그막이 위대하지 못할지언정! 제국이 하찮아지는 것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뛰어들지 않으면 한낱 순간으로 남으리. 조류 속으로 몸을 던져 바다라는 역사가 되리라. 결심한 황제 앞에 신하들은 불신과 의심을 지우고 흥분으로 물들었다.
쿵! 쿵! 쿵! 쿵!
“전쟁은 언제나 성전이다!”
엘프와 전쟁을 위해 소집했던 수많은 오크 전사는 다시 재편되었다. 선왕을 그리워하던 오크 영웅들은 선두로 뛰쳐나왔고 정예 군단 또한 강철 무기로 무장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녹색 물결이었다.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오크는 동쪽을 향해 전진했다. 그것은 황제 오그르가 벌였던 대침공 때와 비교되지 않는 엄청난 숫자였다.
* * *
서부에서 북방으로 터전을 옮긴 세계수는 의외로 잘 적응했다. 고향보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수도 아래까지 완전히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왕궁 지반을 흔든다거나 미관을 해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나름 신이라 불리는 나무인데 그 정도 조심성마저 없었으면 이미 파내고도 남았다.
‘부웅!’
물과 공기는 깨끗해졌다. 식물은 항상 푸릇했으며 열매와 곡식은 윤기가 더했다. 사제 마르실의 말대로 단순히 뿌리만 내렸을 뿐인데 권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시간이 지나 모든 가지가 만개한다면 북방 왕국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나는 백색 왕궁을 휘감는 백색 세계수를 바라보며 북방의 미래를 기도했다.
“경! 폐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회의인가?”
“비상소집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든 호재 뒤에는 항상 악재가 따라오는 법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나는 의복과 검을 갖추며 왕이 기다리는 그레이트 홀로 향했다.
국무회의가 아닌 소집이다. 그렇다는 건 눈투성이가 이미 상황을 확인하고 결단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수선해진 왕궁 분위기를 느끼며 거대한 문을 열었다.
덜컹!
“오셨습니까, 경.”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그레이트 홀에는 재상과 검은 화살 그리고 모든 관료가 모여 있었다. 나는 왕좌 위에 앉은 눈투성이를 향해 군례를 올린 뒤 홀 한가운데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자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마르실과 함께 나이가 지긋한 엘프 사제가 억류되어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또 다른 엘프가 바다를 건너온 것이 분명했다.
“한 치 거짓이 없습니까?”
“세계수 아래 맹세합니다. 제가 전한 소식은 한 치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내가 온 것을 확인한 눈투성이는 재차 물었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엘프 사제는 기사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읍소했다. 그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불멸왕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놈의 탐욕은 끝이 없고 동족들 또한 이성을 잃었습니다. 세계수를 되찾으려 할 겁니다.”
“규모를 말씀하세요.”
“모든 엘프가 무기를 들었습니다. 칩거하던 영웅들은 대거 합류했고 바다를 가득 메운 선박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투성이가 할 말을 잃었다. 그나마 냉철하던 재상 또한 표정이 딱딱하게 굳힌다. 웅성거리는 관료와 차갑게 식은 공기, 미약한 두려움이 어깨 위로 감돌기 시작했다.
세계수를 빼앗긴 엘프가 드디어 침공을 시작했다. 그 규모는 감히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으며 엘프 영웅들이 대거 합류한 소식 또한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은 다름 아닌 불구대천 원수이자 가장 두려운 적인 불멸왕과 엘프 여왕이었다. 그 순간 응축되어 있던 두려움이 새어 나왔다.
웅성웅성.
엘프와 오크가 동시에 움직였다. 그것은 과거 기사왕이 죽었을 때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표정이 하얗게 질린 관료들은 감히 왕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웅성거린다.
협상해야 하는가, 세계수를 돌려주어야 하는가. 우리 인간들이 과연 이 대침공을 무사히 막아낼 수 있을까? 불멸왕이 노린 간계 앞에 홀은 금세 혼란으로 물들었다.
“- - - - - - -.”
그리고 눈투성이 또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야 할 차례다. 나는 다급히 일어나려는 재상을 다시 앉힌 뒤 검과 함께 앞으로 나서려 했다.
콰앙!
척, 척, 척, 척!
하지만 그 순간 웅성거림을 사라지게 하는 거대한 기운이 거대한 문을 열었다. 마치 야수가 등장한 듯 넘실거리는 기운! 관문을 지키던 회색 늑대가 수도로 돌아왔다.
“기사왕 폐하 - - - !!”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허스칼이 내뿜는 투기가 두려움을 잡아먹는다. 회색 늑대는 당당하게 그레이트 홀을 가로질러 겁을 먹은 관료들을 모조리 정신 차리게 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눈투성이가 잠시 망설였던 이유는 앞으로 수도 없이 이뤄질 수많은 희생 때문이었다. 가슴을 아프게 했던 상실이 강인했던 기사왕을 잠시 주저하게 한 것이다.
“무엇이 그리 두려우십니까!”
하지만 눈투성이가 잊고 있었던 게 있다.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난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나와 재상은 천천히 걸어 회색 늑대 곁에 섰다.
“부디 뜻대로 하소서!”
고고한 창공 아래 바닥을 내려다보지 마라. 부디 훨훨 날아 우리가 못다 이룬 꿈을 이뤄 달라. 시대의 몰락과 탄생을 보았던 옛 영웅들은 기꺼이 투쟁을 맹세했다.
[부디 뜻대로 하소서!]
모든 관료와 기사가 우리를 따라 군례를 올린다. 그러자 한 줄기 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오며 모든 의지를 화답했다. 눈가를 파르르 떤 눈투성이가 왕좌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깃발을 높이 드세요. 뿔피리를 불어 병사들을 소집하세요. 영주와 동부를 향해 서신을 보내세요.”
오러는 무명을 통해 알려 주었다. 북방을 통일하고 인간을 보호하며, 불의와 맞서고 정의를 세우는 지고한 기사왕. 그 장엄한 목소리가 모든 의지를 결집하게 했다.
“전쟁을 준비하세요. 모든 인간이 부름에 응할 때, 제가 선두에 서겠어요.”
* * *
“리처드 폐하.”
한때 리처드 왕자를 보좌하며 동부 왕국을 다시 세웠던 용감한 로날드는 어느새 퇴역을 앞둔 노년 기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직접 왕을 모시고자 검과 함께 왕궁으로 달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로날드는 리처드를 향해 말했다.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나이라는 것을 먹은 리처드는 이제 한 아이의 아빠이자 동부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늠름하게 자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로날드는 걸음을 함께하며 물었다.
“상념이 깊어 보이시는군요.”
“옛 생각이 나더군. 불과 몇 년 전인데 꼭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마치 꿈을 꾼 것 같다고 할까? 실감이 안 나는군.”
리처드는 아련한 얼굴로 왕궁을 살폈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 겪었던 수모와 왕이 되어 돌아온 영광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자 리처드는 희미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가끔은 힘들었던 그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형제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요.”
“나도 그렇다네, 로날드.”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지금도 살아 있을 것 같은 생생한 기억과 먼저 어머니 곁으로 떠난 형제들을 말이다. 리처드는 그때를 떠올리며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준비는?”
“전부 끝났습니다.”
길었던 복도가 끝이 났다. 그러자 굳게 닫힌 왕궁 정문과 함께 두근두근 뛰는 심장 박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리처드는 길게 심호흡을 한 뒤 앞으로 나아갔다.
“폐하께서 오셨다!”
“근위대! 서둘러 개문하라!”
끼이이이이이익!
쿵!
문밖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가 왕궁 문을 연다. 그러자 즉위식을 치렀던 선조들의 재단 앞으로 환한 태양이 구름을 뚫었다. 리처드는 숨을 내뱉으며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뿌우우우우우우 - - - -!
왕의 행차를 알리는 강철 뿔피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자 수도로 집결한 군대는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들어 왕궁 앞 리처드 왕을 향해 정중한 군례를 올렸다.
강철 무기로 무장했다. 정병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움직임에는 한 치 어긋남이 없었다. 동부를 지키는 방패, 적을 찌르는 창. 이 자리에 모인 인간은 전부 동부군이었다.
“북방의 부름을 받았다.”
스르릉!
선조들이 했던 실수는 두 번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한 깃발 아래 모여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리처드는 그대로 검을 뽑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동부는 응할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 - - - - -!!
세상이 떠나갈 것 같은 환호와 함께 동부군은 수도를 빠져나와 협곡으로 향했다. 기사왕과 리처드가 주고받은 서신에는 글이 아닌 오직 직인만이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