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검은머리 기사왕 121화
다각, 다각, 다각.
“새끼를 깐 돼지들 같군.”
“······원래 그런 족속들입니다.”
일각수를 탄 불멸왕은 평원에 모인 오크들을 보며 그렇게 평했다. 그리고 동행하게 도니 엘프 여왕 또한 오크라는 종족을 근본부터 헐뜯으며 깎아내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오만한 둘조차 감히 돌격 명령을 내리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평원에 모인 오크 무리는 아무리 높은 곳에서 올려다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황자는 바보가 아니다. 놈은 회담장으로 나서기에 앞서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살아있는 오크를 전부 데려왔으니 그 군단은 평원을 초록색으로 물들이고도 남았다.
“쯧.”
세계수 권능 없이는 압도할 수 없다. 그 현실에 기분이 나빠진 불멸왕은 불쾌한 침묵을 지키며 아름다운 일각수를 몰았다.
그러자 오크 진영 쪽에서도 강한 기운을 풍기는 제국 근위대와 함께 화려한 금색 갑옷으로 무장한 1황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썩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군.”
“이쪽도 마찬가지다. 내 동생은 살아 있나?”
3황자는 사념체가 폭발하던 그 전장에서 사로잡혔다. 하지만 아직 쓸모가 있었기에 목숨만은 붙여 두었다. 불멸왕이 손짓하자 밧줄로 묶인 3황자가 끌려 나왔다.
“형님! 형님 살려 주십시오!”
제국 황자가 가져야 할 위엄과 체통은 어디 가고 구차함만이 남아 있다. 동생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1황자는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트리며 분통을 삼켰다.
처음부터 끝까지 민폐만 끼치는 버러지 같은 놈! 마음 같아서는 죽게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귀쟁이 놈들 손에 제국 황자의 목이 잘리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죽여도 자신이 죽인다. 드디어 황제가 되는 길을 앞둔 1황자는 한동안 고심한 끝에 불멸왕과 엘프 여왕을 향해 물었다.
“원하는 게 뭐지?”
엘프 놈들이 원한 회담이다. 유리한 전세 속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1황자는 그 속내를 읽고자 눈을 부라렸다.
“전쟁을 끝내지.”
하지만 그 오만한 불멸왕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놀란 기색을 감춘 1황자는 한동안 놈들을 노려보다 이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무슨 꿍꿍이냐.”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황자여. 황제 오그르가 그랬듯 조금 더 먼 미래를 보아라. 그럼 진짜 적이 보일 것이다.”
불멸왕은 기사왕 손에 죽은 황제 오그르를 들먹이며 손짓했다. 그러자 엘프 여왕은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무언가가 쓰인 서신을 꺼내 1황자를 향해 던져 주었다.
“이전 회담에서 기사왕이 약속했던 간악스러운 제안이다. 제국의 힘이 약해졌을 때 군대를 이끌고 뒤를 치겠다더군.”
“······거짓말 마라.”
“하하, 언제부터 그리 인간을 믿었나?”
당연히 조작된 내용이다. 하지만 대상이 아닌 상황을 믿듯 그럴싸한 증거 앞에 1황자는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엘프 여왕은 마치 뱀과 같은 혀로 거짓을 더했다.
“오크 제국만이 아니다. 우리 세계수 또한 놈들에게 공격받았다. 귀가 있고 눈이 있다면 모르지는 않았겠지, 황자.”
세작을 심어둔 1황자도 서부 상황은 알고 있다. 하지만 설마 그 짓이 북방 왕국이 벌인 일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의심보다는 분노가 바로 목 끝까지 올라왔다.
“끄으으윽······!”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다.”
그 말을 끝으로 일각수를 탄 불멸왕과 엘프 여왕은 자기들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듯 전군을 이끌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형, 형님! 내가 잘못했소!”
3황자는 홀로 남았다. 그리고 표정이 좋지 않은 1황자 발밑에서 자비를 구걸하며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 구걸했다.
스릉.
“동생들아, 너희들은 용맹하고 똑똑했지. 항상 나를 비웃지 않았느냐? 무능한 황자라고, 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이야.”
“아, 아아······.”
하지만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1황자는 날카로운 도끼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제국을 구성하는 모든 오크가 지켜보고 있는 평원 위에서 망설임 없이 목을 잘랐다.
서걱!
“컥!”
“하지만 끝내 살아남은 자가 누구더냐?”
잘려 나간 목이 떨어진다. 동시에 떨어진 목은 평원 바닥을 굴렀고 피는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길고 길었던 오크 제국의 내전, 최후 승자는 다름 아닌 1황자였다.
티그막! 티그막! 티그막! 티그막! 티그막!
와아아아아아아아 - - - - -!!
황제 티그막은 오크 위에 군림했다.
* * *
해안가에 선박이 도착했다. 한번 호되게 당해 본 기억이 있는 요새 수비군은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엘프 선박을 포위했다.
하지만 상륙한 선박 밖으로 내려온 자들은 저번처럼 적이 아닌 한 엘프 신관과 온몸이 피와 상처로 범벅이 된 선원 둘이었다.
살벌한 분위기를 읽기라도 한 걸까, 잔뜩 겁에 질린 채 여성 엘프는 자신에게 겨눠진 화살과 창을 보며 파르르 떨었다.
“모두 옆으로 물러나!”
“폐하께서 오셨다!”
그리고 그때쯤 우리가 도착했다. 기사왕이 직접 온다는 소리에 병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좌우로 정렬해 군례를 올렸다.
역시 북방군이다. 엘프들로 인해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금세 정리가 되어 무거운 공기만이 주변에 자욱이 깔렸다.
눈투성이의 표정은 마치 얼음을 보는 듯했다. 한차례 가라앉은 선박과 엘프들을 둘러본 기사왕은 입을 열어 물었다.
“당신들은 뭐죠?”
너희가 도대체 누구길래 감히 북방 땅에 뻔뻔한 낯짝을 들이미는가.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북방군을 이끄는 눈투성이로서는 결코 호의적일 수가 없었다.
꿀꺽.
타고난 기사왕의 분위기가 있다. 그것에 압도된 여성 엘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애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저는 마르실이라고 합니다, 폐하. 그분을 모시는 비천한 사제 중 하나입니다.”
“그분?”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가치 있을 때가 있다. 자신을 마르실이라고 표현한 엘프 여성은 소중하게 품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은 뒤 갈색 천을 옆으로 치웠다.
우웅, 웅!
그러자 친숙한 초록색 기운과 함께 한 동그란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태동을 하듯 유리관 안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무언가는 누군가를 격하게 찾고 있었다.
“- - - - - - - -!!”
사념체 따위가 아니다. 화들짝 놀란 북방군은 어느새 겨누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지성체를 초월한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구체는 분명 살아 있는 존재였다.
“세, 세계수잖아.”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챈 이는 당연히 검은 화살을 포함한 부랑자들이었다. 그녀는 어느덧 파랗게 변한 눈동자 사이로 보석 같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왜 울지? 아무리 고향을 부정하려 해도 그녀를 포함한 부랑자들은 타고난 엘프의 피를 주체하지 못했다. 마르실은 양손을 맞대며 간절히 빌었다.
“제발 그분을 해치지 마세요! 핍박을 피해 스스로 떠나시기를 원하셨어요. 파멸은 세계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이해관계가 없으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재상은 갑작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자 미간을 찡그렸고 이해보다는 의문이 앞선 눈투성이는 마르실을 향해 물었다.
“왜 하필 북방 땅이죠? 세계수는 당신들, 아니 엘프들의 신이잖아요.”
우웅, 웅!
마르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유리관 속 구체가 다시 한번 진동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가 심장에 품은 사념체의 파편 또한 맹렬한 기세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세계수는 슬피 울고 있었다. 대륙과 함께 탄생한 위대한 존재는 지치고 지쳐 자신을 만든 창조의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백색 나무, 흩날리는 눈 꽃잎, 나비가 부는 드높은 언덕. 기이한 기운 사이로 스쳐 가는 환각 속에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또르르르.
파르르 떨린 유리관 속 세계수는 바닥에 놓인 가방 속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치 공처럼 바닥을 힘겹게 굴러 우리 앞으로 또르르르르 굴러 왔다.
똑.
멈췄다. 세계수가 도착한 곳은 엘프도, 기사왕도 아닌 바로 내 발밑이었다. 마치 여러 번 본 적이 있다는 듯 구슬프게 우는 세계수는 나를 반가워하고 있었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그것은 하얀 나무였던 어머니 북방과 너무나 흡사한 녹색 냄새였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버둥거리는 세계수를 들어 올렸다.
부웅!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나는 두 손에 구체를 든 순간 직감했다. 어머니 북방의 자녀는 우리 인간만이 아니었다.
* * *
마르실을 포함한 엘프들은 일단 상처를 치료한 뒤 지하 감옥에 가둬 두었다. 아무리 세계수와 함께 항복을 청했다고 한들 워낙 북방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한자리에 모여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오늘 밤 예정되어 있던 연회는 취소되었으며 해안 요새는 전쟁 상황과 버금가는 경계 태세가 내려졌다.
재상 지휘하에 침몰된 선박을 꺼내 불태웠다. 그 자리에 있었던 병사들 입을 단속했고 세계수가 북방으로 흘러들어왔다는 정보와 흔적을 사전에 원천 차단했다.
그리고 새벽 내내 이뤄졌던 모든 작업이 끝이 나고 해가 뜬 다음 날 우리는 다시 한번 한자리에 모였다. 피곤할 법도 한데 다들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투성이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수도에는 일단 망명이라고 알리세요.”
우리 북방 인간에게 있어 신인 어머니 북방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우리 곁에 있다고 믿지만, 감히 그 형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수는 다르다. 세계수는 서부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몸체와 권능을 지니고 있으며 엘프들 사이에서는 감히 살아 있는 신이라 불리는 숭배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미지의 존재가 사실은 이용당하고 있었다니, 불멸왕이 다루는 권능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재상은 혹시 모를 상황을 이야기했다.
“만약 함정이라면요?”
“절대 아니야!”
“왕국 모두를 이해시킬 근거가 있어야 해요, 검은 화살. 단순히 아니라는······.”
“우리 혼혈들은 느낄 수 있어. 내가 반쪽짜리 엘프라서가 아닌 너희 친우로서 말하는 거야. 세계수는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아.”
거짓말이 아니다. 알 수 없는 기연을 얻은 나 또한 순간 환각을 볼 정도인데, 엘프 피가 개화된 검은 화살과 부랑자들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 말이 옳아.”
“검성 설마 당신도?”
“그래, 사념을 느꼈다.”
내가 삼킨 것은 세계수 파편이었다. 도대체 무슨 원리로 병을 치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부러지는 검이 세계수 사념을 느끼고 동화할 수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나와 검은 화살의 발언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 아파진 재상, 기억하는 새는 과로로 생긴 눈그늘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투성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쁜 소식만은 아니에요. 우리가 세계수를 확보한 이상 불멸왕은 더 이상 권능을 사용하지 못할 테니까요.”
“······전쟁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아뇨! 놈은 언제나 전쟁을 원해요. 세계수를 넘겨준다 해도 북방을 파멸시키겠죠. 저희 선왕과 선조들이 당했던 대침공처럼 모든 인간을 죽이려 들 거에요.”
옳다, 기사왕 눈투성이는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전쟁은 필연, 그 어떤 협상과 외교로도 막을 수 없다. 불멸왕은 우리 인간과 공존을 원하고 있지 않았다.
“저는 지금 운명을 느껴요, 스승님.”
피할 수 없다면 굳건하게 버티리라. 세찬 폭풍우 앞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거목처럼. 두 눈을 빛낸 눈투성이는 알현실 문을 지키는 기사들을 향해 단호히 명령했다.
“세계수와 마르실을 데려오세요.”
“알겠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