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검은머리 기사왕 120화
“아, 아아······.”
세계수 보호라는 무거운 숙명을 지게 된 엘프 하위 신관 ‘마르실’은 쓰라려 오는 상처를 추스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성한 구석이 없는 조그마한 선박과 함께 피난을 도와주었던 수많은 조력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살아있는 이는 드물었다. 아무리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이라 할지라도 추격자인 엘븐 가드를 상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분전했고 8척이 넘는 선박을 희생하면서까지 마르실과 세계수를 바다로 탈출시켜 주었다.
그녀는 윙윙 빛이 나는 세계수 요람을 꽉 끌어안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도 생생한 어젯밤을 떠올렸다.
‘절대 놓치지 마라!’
‘불멸왕께서 노하셨다!’
세계수 아래 신실한 사제라고 자부했던 마르실은 성역을 빠져나가는 순간 모든 엘프가 증오하는 대역죄인이 되어 있었다.
불멸왕이 노하셨다는 이유로 친구 같던 이웃은 밀고자가 되었고 친절한 신도였던 병사들은 살벌한 추격자가 된 것이다.
정말로 악몽 같은 밤이었다. 기적적으로 항구로 도망쳐 선박 위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 집요한 추격은 멈추지 않았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살과 자신을 노리는 수많은 칼날. 그리고 화마와 비명 사이에 들려오는 마지막 경고는 투쟁을 각오했던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도망친다고 한들 안전한 곳이 있겠느냐, 이 반역자야! 꼭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유일한 고위 신관 두 분은 죽임을 당했고 그 외 수많은 신관 또한 병으로 죽거나 신앙을 버렸다.
세계수를 믿는 소수의 엘프 교인이 핍박당하고 숨어드는 지금, 무능한 자신은 물론이고 이 요람조차 도망칠 곳이 없었다.
피핀 사제님 저희는 도대체 어디로 향해야 합니까? 마르실은 힘겹게 버티고 있는 돛을 바라보며 그렇게 바다를 표류했다.
위윙. 우우우잉!
“······?”
하지만 그 순간 품에 안고 있는 세계수 요람이 마치 말벌 둥치처럼 요동쳤다.
마르실은 깜짝 놀라 천을 걷었고 그 속에 잠이 든 세계수 심장을 살폈다.
버둥버둥.
세계수가 버둥거리고 있다. 무언가 답답해 보이는 모습에 마르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감싸고 있는 천을 풀었다.
그러자 눈부신 환한 빛과 함께 모든 생명체를 아우르는 녹색 기운이 마르실을 감싸 안았다. 걱정하지 마라, 아이야. 이미 모든 운명은 이 바다와 같이 흐르고 있다.
“빛, 빛이······.”
세계수가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곳은 오만한 엘프도 탐욕스러운 오크도 아닌 저 머나먼 인간의 땅 북방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걸까? 눈동자를 파르르 떤 마르실은 문득 피핀 사제가 내렸던 옛 가르침을 떠올렸다.
‘세계수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엘프에게는 이 서부 땅만이 세계였다. 그렇기에 뿌리를 내려 자리 잡은 이 거대한 나무를 ‘자신들의’ 세계수라 불렀다.
하지만 엘프들은 일방적인 사랑 앞에 오만했고 존재를 신격이라 부르며 지나치게 숭배했다. 피핀을 포함한 고위 신관들은 그런 생각이 일찍이 달랐음을 알고 있었다.
세계수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존재를 원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를 원하는 곳에 기꺼이 존재하려 함이다.
나무가 자라는 것에 이유가 있던가. 슬픔을 느낀 마르실은 부끄러운 뾰족 귀를 숨겼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는 세계수를 꼭 끌어안은 채 바람이 이끄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 * *
세계수가 떠난 거대한 수림은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다. 변화는 당연히 그 주변 자연환경까지 영향을 끼치니 푸르게 빛났던 식생은 불길한 갈색으로 빠르게 시들어 갔다.
비료를 주지 않아도 비옥하던 땅은 병들었다. 깨끗한 식수는 오염되었으며 동물들은 모습을 감췄다. 물론 인근 주민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마치 가을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1년마다 찾아오는 수확의 계절이 아닌 다시는 오지 않을 봄을 예고하는 서부의 가을이었다.
당연히 엘프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아무리 그동안 경시하고 외면했다고 한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던 세계수의 변화는 맨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든 변화였다.
한창 오크와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서부 이곳저곳에서는 불만 어린 목소리들이 나왔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던 귀족들 또한 자중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만약 세계수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 왕국은 어떻게 되겠는가. 진실을 알고 있는 소수는 숨을 죽인 채 불멸왕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터벅, 터벅, 터벅.
엘프 여왕은 조심스럽게 왕궁을 지나쳤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그레이트 홀을 걸어 왕좌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불멸왕이 앉아 있었다.
“······불멸왕 폐하.”
“세계수는?”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북방과 오크 전선에 투입된 사념체는 충분한 위력을 발휘해 주었다. 아무리 본체가 많이 쇠약해졌다고 한들 세계수가 지닌 권능은 역시 위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진행되어 가던 계획이 한참 절정으로 향하려는 직전, 쥐새끼처럼 숨어 지내던 신관과 배신자들로 인해 가장 중요한 세계수 본체를 탈취당하고 말았다.
당연히 세계수를 통해 만들어진 사념체는 갈수록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불멸왕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다. 바로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동귀어진을 말이다.
‘모조리 죽어라!’
덕분에 가장 큰 걸림돌이자 난적이었던 오크 전선은 완전한 우세로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겁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던 3황자 또한 산채로 사로잡을 수 있었다.
쿨럭!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역시 북방이었다. 알 수 없는 기연을 얻은 검성으로 인해 요새 함락 실패는 물론 또 한 번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도대체 어떤 힘이기에 폭주하는 사념체를 막고 최후의 수단인 폭발마저 막아내는가. 거칠게 기침한 불멸왕은 이제 증오를 넘어 극심한 강박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놈들에게서 기사왕의 모습이 보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감히 현실마저 넘어선 기사왕의 힘이 말이다. 불멸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여왕을 향해 말했다.
“협상장으로 돼지들을 불러라.”
“······설마 인간 놈들을 염려하십니까?”
엘프 여왕의 물음은 무례했다. 하지만 불멸왕은 화를 내는 대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북쪽으로 향한 세계수, 기연을 얻은 검성,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세계수를 다시 뺏어 와야 한다. 기사왕이 완전히 성장하기 전 북방을 멸망시켜야 한다. 그래, 수년 전 처음 인간들을 멸망시켰을 때처럼 대전쟁을 일으킬 차례였다.
“반발하는 귀족은 죽여라. 그들이 지닌 재산과 병력을 취하고 군비를 확장하라. 이제 남은 것은 영광스러운 성전뿐이다.”
서부와 엘프는 병들어 가고 있다.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오직 막강한 신과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릴 전쟁뿐이었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은 강을 건넜다. 불멸왕이 변화했음을 느낀 엘프 여왕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뜻대로 하소서.”
날아오르던 신이 끝내 대륙으로 떨어졌다. 다만 도착한 그곳이 지옥일지 아니면 낙원일지는 오직 떨어진 신만이 결정한다.
* * *
“모두 정상이에요, 검성.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실 때까지 사실 수 있으실 거예요.”
이른 새벽 해안 요새를 찾아온 재상은 가장 먼저 내 몸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잠시 뒤 밝은 미소와 함께 오러로 인해 입은 내상이 완전히 치료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정말로 축하드립니다, 경!”
확실한 검진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손뼉을 쳤다.
물론 가장 걱정했을 눈투성이는 훌쩍이던 눈물을 닦으며 가장 먼저 나와 포옹했다.
“스승님.”
꾹.
그동안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나는 체통을 지키라는 잔소리 대신 등을 다독이며 눈투성이를 위로했다. 그러자 녀석은 금세 눈물을 그친 뒤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더 안 울어요.”
“하하, 그래?”
“이제 애가 아닌걸요.”
반년 사이 더욱 성숙해졌다. 나는 감정을 잘 추스를 줄 알게 된 제자의 진심을 읽으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함께 오른손을 들어 올려 귀환과 재회를 축하했다.
“기쁜 날이에요! 오늘 하루만큼은 잠시 일을 미루고 함께 음식과 술을 나눠요. 직급과 계급 상관없이 모두 참석해 주세요.”
그동안 파괴되었던 해안 요새를 정리하고 사상자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일만 해야 했던 지휘관과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검성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작은 연회까지 열리니 그동안 쌓인 노고가 전부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관료와 기사들은 기뻐했고 소식을 전해 들은 부랑자와 요새 병사들 또한 먼저 떠나간 전우를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였던 참모진들은 오후 일과와 연회를 위해 흩어졌다.
알현실에 나를 포함한 일행들만이 자리에 남자 재상이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꺼냈다.
“우리는 일 이야기나 할까요?”
“미루기로 했는데요······?”
“호호, 폐하는 농담도 잘하시네요.”
전후 처리는 마무리 단계를 밟고 있다. 하지만 불멸왕 사념체가 작정하고 파괴한 해안 요새 재건은 여전히 난항을 겪었다.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완공한 해안 요새인데 단시간 재건이 가능하겠는가. 짧게 잡아도 1년은 더 걸릴 것이다.
“리처드 왕이 요새 재건에 필요한 강철과 은화를 보내줬어요. 목재는 현재 노스플롬에서 수송되고 있고요.”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재 북방 상황이 열악했던 예전보다 훨씬 괜찮다는 것이다. 그동안 쌓아 온 인프라와 든든한 동맹인 동부 왕국이 있었으니 말이다.
“매번 동부에 신세를 지내요. 저희 측도 선물로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리처드는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막대한 물자와 함께 친필 서한을 보내왔다. 나는 북방 기사단이 그립다는 내용을 웃음과 함께 읽으며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아이를 위한 선물이 좋겠군.”
왕비가 된 헬레나는 어느덧 아이를 가져 귀여운 왕자를 출산했다. 만약 선물을 보낸다면 아이를 위한 약재가 좋지 않을까. 그 제안에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제가 특별히 선별한 귀한 약재로 보낼 테니······.”
뿌우우우우우우 - - - -!!
덜컹!
“부러지는 검!”
재상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바깥 요새에서는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검은 화살이 알현실로 달려왔다.
또 적이라도 온 것일까? 불멸왕이 또 사념체를 보냈을 수도 있다. 황급히 검집을 쥔 나는 창문으로 뛰어내려고 했다.
“적이 아니야!”
하지만 검은 화살은 그런 나를 황급히 붙잡으며 바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침몰하기 직전인 엘프 선박이 접근하고 있었다.
“- - - - - - -?”
검은 화살 상태가 이상하다.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별처럼 반짝였고,
항상 감추고 싶어 하던 엘프 귀 또한 한 마리 나비처럼 팔락이고 있었다.
반쪽짜리 엘프 핏줄이 무언가를 느낀 것인가?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은 나 또한 선박에서 뿜어져 오는 강한 기운을 느꼈다.
마치 대수림 자체를 옮겨 오는 것 같은 생동감과 익숙한 기운. 그것은 선왕의 묘에서 보았던 어머니 북방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내가 삼킨 파편이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