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기사왕-119화 (119/181)

119화

검은머리 기사왕 119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모든 ‘결’과 모든 ‘점’과 그것을 가를 수 있는 결정적인 ‘수’가 말이다. 나는 마치 쉽게 그린 그림처럼 이 풍경 전부를 뇌리에 담았다.

스으으으으.

작게 벌린 입 사이로 숨을 들이켠다. 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공기가 뜨거웠던 심장을 차갑게 식힌다. 그대로 검을 뽑아 날아오는 오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오러.’

죽음이라는 깨달음 앞에서도 오러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아닌 운명이었다. 타고난 것이 아닌 개척한 것.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별의 아이다.’

상승과 불굴, 의지가 만들어 낸 또 다른 격. 오러라는 유형이 아닌 나라는 무한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부러지는 검이 모든 것을 벨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툭.

북방 검술이 아니다. 독자적으로 변형한 검술이 발끝과 머리끝을 타고 검이라는 연장선을 움직인다. 나는 날아오는 수천 개 오러를 하나도 남김없이 베어 버렸다.

서걱!

쨍그랑!

오러가 깨졌다. 소멸한 오러는 마치 유리처럼 사방으로 흩날렸고 법칙과 현실을 관장하는 세상이 경악한다. 춘몽을 꾸었던 나비가 비로소 현실이라는 번데기를 벗었다.

[부러지는 검 - - - -!!]

사념체와 연결된 불멸왕이 분노한다. 그곳에는 경악과 함께 인간을 향한 두려움이 숨겨져 있었다. 자세를 바꾼 나는 그 원초적인 살의와 기세를 정면으로 막아섰다.

“스승님!”

“병사들을 퇴각시켜!”

하마터면 전부 죽을 뻔했다. 나는 빠르게 다가오는 눈투성이를 향해 명령한 뒤 여전히 예기를 간직한 검을 겨누었다.

사념체는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고 있었다. 고산 때와는 달리 사념체 본체는 약하고 의식은 강한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도대체 무슨 변고가 생겼길래 불멸왕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나는 금방이라도 자폭할 듯 달아오른 사념체를 바라보았다.

[전부 죽어라 - - - - !!]

내가 빈틈을 만든 사이 병사들이 퇴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만 있을 리 없는 사념체는 급히 수많은 가시와 오러를 재생하며 사방을 공격을 가했다.

챙! 서걱!

“눈투성이!”

“네!”

폭주한 오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눈투성이뿐이다. 우리는 마치 한 쌍이었던 날개처럼 바닥 위에 자세를 잡았다.

이제는 밥을 먹는 것보다 익숙한 공동 검무다. 반년 만에 다시 만났지만, 스승과 제자는 여전히 한 몸처럼 등을 맞대었다.

심장 박동이 전해진다. 체온이 의지를 만든다. 아무리 강한 폭풍우가 몰아쳐도 빛을 발하는 등대는 휘말리지 않는 법이다.

‘태산보다 굳세어라.’

후우우웅, 쿵!

막강한 기세를 품은 오러 줄기가 마치 채찍처럼 날아온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휘두른 두 개의 검은 그 공격을 가뿐하게 막아내 병사들을 향한 피해를 상쇄시켜 버린다.

쿠르르르릉!

사념체가 또 한 번 흔들렸다.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오러 줄기가 대기를 갈랐고 공격의 강도, 속도, 위력은 모두 최상을 달린다. 하지만 나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삭풍보다 재빠르고.’

쾅!

합을 맞추던 나와 눈투성이가 재빨리 떨어진다. 그 공간에는 오러가 내리꽂혔고 사방으로 흙과 먼지가 피어오른다.

성공적으로 피해 냈다. 허공에서 눈을 마주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념체 양옆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후우우우우우!

공격 대상이 둘로 쪼개졌다. 거대한 사념체를 움직여야 하는 불멸왕은 순간 검은 안개를 퍼트리며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선택은 당연히 눈투성이였다. 하지만 놈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절대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순식간에 공간과 시간을 주파했다.

‘초겨울보다 은밀하며.’

퉁!

공격 대상이 된 눈투성이가 바닥을 구른다. 동시에 그 위로 수많은 오러 줄기가 뻗어가 단단한 지반을 폭발시켜 버린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한 나는 사념체가 막을 수 없는 완벽한 사각을 선점했다. 눈앞에 붉게 달아오른 세계수 파편이 보였다.

‘불꽃처럼 맹렬해야 한다.’

그 순간 검이 도구로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연장된 의식이고 동작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타오름일 뿐이다.

벤다, 또 한 번 베어낼 뿐이다. 베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한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검을 휘둘렀다.

쿠쿠쿵!

서걱!

사념체는 베지 않았다. 사념체 너머로 보이는 의식을 베었다. 그러자 사념체와 연결된 불멸왕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폭주를 향한 끝을 달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악 - - - -!!]

사념체는 피해가 가지 않았다. 흔들린 것은 불멸왕이 가진 의식뿐이다. 사방으로 뻗는 발악을 가뿐하게 피해낸 나는 오러를 전부 소모한 눈투성이를 향해 달려갔다.

탁!

채앵!

손을 잡았다. 동시에 오러가 닿지 않은 방향으로 날려 준 뒤 재빨리 뒤로 돌아 눈투성이를 노린 마지막 발악을 쳐냈다.

이로써 사념체가 지닌 힘은 전부 소진되었다. 먹구름은 서서히 사라졌고 모든 것을 쓸어내던 광풍 또한 거짓말처럼 멈췄다.

꿀꺽.

누군가 마른 침을 삼킨다. 검은 안개가 전부 사라진 사념체는 마치 뼈밖에 남지 않은 망령처럼 인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사념체는 세계수를 투영한 것이 아니다. 저것이 감히 신을 연기하고 있는 불멸왕의 진정한 속내이자 본모습이다.

불멸왕은 소멸하기 직전인 사념체 손을 들어 올려 나와 기사왕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인간을 가리켰다. 텅 빈 목구멍에서 노이즈가 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것, 이, 끝,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반드시, 파, 파멸할 것이다.]

두 차례 사념체를 무사히 막아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듯 불멸왕은 북방 전체를 향해 파멸을 예고했다.

터벅, 터벅, 터벅.

하지만 나는 그런 저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렁이는 사념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결 사이로 보이는 세계수 파편을 향해 마지막 검을 겨누고 휘둘렀다.

“언제든지 오라.”

서걱!

마지막 기운이 감돌고 있는 사념체 중앙을 도려냈다. 그러자 바닥에는 내가 섭취했던 세계수 파편이 떨어졌고 우리를 저주하던 불멸왕 의식은 허망하게 흩어졌다.

공포도, 두려움도, 불길함도 전부 사라진다. 나는 휘두른 검을 눈수리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운명을 극복하며 살아온 모든 북방 인간 앞에 당당히 선언했다.

철컥.

“나는 준비되어 있다.”

삐이이이익 - - -!

높은 창공에서 잘 내려오지 않는다는 눈수리가 무슨 이유인지 지상으로 내려왔다.

힘차게 울부짖은 녀석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날아갔다.

* * *

오러와 날붙이가 통하지 않는 사념체는 너무나 막강했다. 아무리 불이 있다고 해도 ‘소멸’ 자체를 하지 않는 망령은 전장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싸우기 위해 태어난 오크라고 해도 별수 있겠는가. 그나마 비등비등하던 전력은 사념체로 인해 기울어져 버렸고 대수림 전선은 속수무책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망령이 약해진다.’

하지만 끝까지 밀리기만 하한 법은 없었다.

아군을 학살하던 사념체가 어느 날부터 움직임이 서서히 굼떠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이 유일한 기회였다. 놈이 완전히 힘을 되찾기 전 철저하게 파괴하고 전선을 돌려놓아야 한다. 3황자는 자신이 지휘하는 최고 정예를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다.

“전군 돌격하라!”

그동안 패전을 거듭하던 와중에 무려 3황자가 직접 참전했다. 용기를 얻은 오크 군단은 전력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기세가 약해진 사념체가 등장했고 미리 함정을 파 두었던 오크들은 놈에게 화력을 모든 집중했다.

“놈이 약해진다! 더 몰아붙여!”

“불화살을 발사하라!”

기름이 끓고 불이 타올랐다. 수많은 불화살이 사념체를 향해 쏟아지자 놈은 검은 안개와 함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됐다!”

그리고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3황자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사념체가 무서워 후방에 틀어박혀 있던 주제에 모든 공을 자신이 이룬 마냥 기뻐했다.

“경하드립니다!”

“모두 탁월한 지휘력 덕분입니다.”

하지만 부관들은 억지로 웃음을 지은 채 아부를 떨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오만하고 생각이 짧아도 이 수많은 오크 군단을 이끌도록 임명된 사령관은 바로 3황자였다.

한껏 기세등등해진 놈이 외쳤다.

“친위대를 투입해라! 귀쟁이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 전선을 완전히 수복하겠다!”

여기서 사념체를 물리치기만 한다면 잃어버린 전선을 수복하고 1황자가 또 다른 오크 군단을 불러올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정예병을 아껴 오던 3황자는 여기서 아예 끝을 보기로 했는지 친위군까지 전부 이끌며 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뿌우우우우우 - - -!!

친위군 이동을 확인한 작전 참모 하나가 황급히 깃발을 들었다. 그러자 신호를 받은 나팔수들이 황급히 뿔 나팔을 불어 본대를 포함한 전군 일제 돌격 신호를 보냈다.

Woahhhhh - - - - -!!

한때 제국 전성기를 이끌었던 오크 정예 군단이 돌격을 시작한다. 목표는 불바다 위에 묶여 있는 사념체가 아닌 그 뒤에서 화살을 쏘아대는 짜증 나는 엘프 놈들이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던 오크 전사들은 고함을 내질렀고 서전트는 육중한 오러를 뿜어내며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 광경은 가히 녹색 파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 - - - - - - -?”

뚝.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가 변했다.

치지지직.

해안 요새에서 있었던 변화는 어김없이 이곳에서도 발휘되었다. 점점 약해진다고 생각했던 사념체가 드디어 연결된 불멸왕 의식과 함께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쿠르르르르릉 - - -!

일어나서는 안 될 지진이 일어났다. 대지는 뒤틀렸고 마른하늘에는 먹구름과 함께 뇌운이 일렁인다. 불멸왕과 거리가 가까운 만큼 마지막 폭주 또한 엄청난 위력을 품었다.

[크아아 - - - - !!]

북방에서 당한 수모를 여기서 풀기라도 하듯 사념체와 연결한 불멸왕은 먹구름이 낀 하늘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한 놈씩 줄일 것도 없다. 어차피 세계수가 사라진 이상 제힘을 발휘하지 못할 사념체. 불멸왕은 녹색 오크들을 경멸스럽게 바라보며 마지막 파편을 미련 없이 깨트렸다.

“후, 후퇴하라! 전군 후퇴하라!”

“으아아아악!”

사념체가 소멸한다. 거대한 흙먼지가 일어나며 땅이 거세게 흔들린다. 어두워진 하늘과 내리꽂히는 천둥 번개. 오크들이 뒤로 도망치려는 그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 - - - - - -!!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폭발이다. 오크 군단은 대처할 겨를도 없이 휘말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던 엘프 군단 또한 반절이 넘게 산화하고 말았다.

이것이 과연 한낱 생명체가 일으킨 힘이 맞단 말인가. 운이 좋게 살아남은 3황자는 떨리는 눈으로 폭발을 바라봤다. 폭발이 일어난 구덩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굴복하라, 필멸자야.]

그리고 휘몰아치는 사념들 사이에서 항거하지 못할 불길한 의식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망설임 없이 생명체 수만 명을 몰살시킨 반신 불멸왕의 목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