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검은머리 기사왕 118화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투레질 한 번에 자욱한 김이 솟아오른다. 올라탄 안장은 위아래로 미친 듯이 흔들렸고 주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땀으로 흥건한 고삐를 다시 움켜잡았다.
날씨가 안정된 이른 새벽 무렵 고산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유일한 지름길인 절벽 산길을 가로질러 노스플롬 영지를 향해 밤낮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아마 지구력이 뛰어난 검은 코가 없었다면 하루는 더 걸렸을 거리다. 나는 숨이 거칠어진 녀석을 쓰다듬어 주며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노스플롬 영지를 마주 봤다.
“······폐하는 괜찮으시겠지?”
“걱정하지 마.”
기사왕 눈투성이는 더 이상 보호가 필요한 아이가 아니다. 내 밑에서 모든 것을 보고 배워 왔던 만큼 그 어떤 지휘관과 장군보다 현명하게 군을 이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섣부른 걱정보다 한 발이라도 더 일찍 도착할 생각부터 해야 한다. 나는 숨을 고른 검은 코를 다시 한번 재촉하며 노스플롬 영지를 향해 서둘러 기수를 돌렸다.
두두두두두두 - - - - -!!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며 흰 뿔 사슴 기병대가 쏟아져 나왔다. 마치 다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듯 왕국 깃발을 펄럭이는 그들은 다들 익숙한 얼굴이었다.
“조사관!”
“경, 오랜만입니다!”
반년 전 마을 재건에 힘써 주었던 조사관과 병사들이 이번에는 우리를 배웅하고자 몸소 나와 주었다. 그는 그대로 길로 들어서는 우리와 합류하며 서신 내용을 대신 전했다.
“영주님이 배웅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씀 전하셨습니다! 대신 여기 이번 지원군이 이동할 작전 지도입니다!”
“고맙다!”
역시 노스플롬 영주다. 직접 발로 뛰어 찾을 필요 없이 군이 이동할 경로만 알 수 있다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지도를 건네받았다.
“갈아탈 사슴은 두 필이면 됩니까?”
푸르르륵!
“하하, 한 필이면 되겠군요!”
그리고 그 외에도 조사관은 나와 검은 화살이 갈아탈 팔팔한 사슴 두 필을 데려와 주었다. 물론 강하게 거부하는 검은 코 때문에 옮겨 타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물 한 바가지를 단숨에 먹어 치운 검은 코는 기분 좋게 앞발을 들어 올렸고 다시 한번 열띤 박차를 가하며 노스플롬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지도를 받았으니 곧바로 군과 합류한다. 허리를 곧게 펴 땀을 식힌 나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는 조사관과 노스플롬 기병대를 향해 마지막 손을 흔들어 주었다.
“꼭 승리하세요, 경!”
* * *
기사왕 눈투성이의 군 지휘는 빈틈이 없었다. 강박증처럼 군을 운용하던 스승 검성을 그대로 보고 배워 최적의 효율을 넘어선 완벽함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죽하면 함께 대동한 엘리트 참모들마저 조언할 것을 찾지 못해 할 말을 잃었을까. 검성이 떠난 현시점에서 왕국 제일 지휘관은 다름이 아닌 기사왕 눈투성이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 내린 지휘관이라고 해도 현실이라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지원군 규모를 최대로 늘린 탓에 본대가 행군하는 속도는 너무나 지체되고 말았다.
‘서둘러야 한다!’
요새 외곽이 함락당한 이상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눈투성이는 결국 기동력이 빠른 북방 기사단 전원과 흰 뿔 사슴 기병대 정예를 다시 재편해 별동대를 꾸렸다.
두두두두두 - - - - !!
지체할 필요 없었다. 눈투성이는 재편이 끝나자마자 밤낮없이 별동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린 끝에 해안 요새 간 거리를 무려 반나절 만에 주파해 냈다.
“요새다!”
저 멀리 서서히 지기 시작한 황혼 앞으로 불타는 해안 요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릿한 바다향을 맡은 눈투성이는 오러를 안구 쪽으로 집중해 요새를 살폈다.
“아······!”
다행이다. 비록 성곽 곳곳에는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요새 성탑에 꽂힌 왕국 깃발은 멀쩡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검은 화살 휘하 부랑자들과 요새 병사들이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망령을 상대로 내성만큼은 끝까지 지켜낸 것이다.
꾸욱.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끝까지 요새를 지켜준 요새 수비군들. 눈투성이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뒤따라오는 북방 기사단과 흰 뿔 사슴 기병대를 향해 외쳤다.
“곧바로 진입한다! 적을 격퇴하고 요새를 구하자!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두두두두두두두!
비록 몸과 정신은 힘들었지만, 왕이 함께한다는 사실에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함께 복창한 별동대는 선두로 달려가는 기사왕을 따라 일제히 검과 창을 뽑았다.
뿌우우우우 - - - -!!
나팔수가 전쟁 나팔을 분다. 그러자 지원이 왔음을 눈치챈 성탑에서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또 다른 깃발이 올라왔다. 초록색 깃발을 기꺼이 호응하겠다는 의미였다.
두두두두두두두!
굳게 닫혀있던 요새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짧은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다. 기사왕과 별동대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열리기 시작한 요새 성문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 - - - - - -!!”
수년간 보강하고 또 보강했던 해안 요새는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시설이 대부분 파괴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북방군 병사가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채 쓰러져 있었다.
눈투성이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로 냉철이라는 차가운 이성을 액화하며 능숙하게 군대를 지휘했다. 별동대는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며 요새를 장악해 갔다.
듣기로는 한 ‘개체’라 했다. 지금은 보이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 나타나 습격을 가해 올지 모른다. 눈투성이는 호위병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남은 내성을 향해 달렸다.
“기사왕 폐하!”
그러자 반쯤 파괴된 성문 밖으로 검은 화살 휘하 부랑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치러온 혈투를 보여 주듯 그는 온몸이 말라붙은 피와 재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적은 어디 있습니까!”
인사를 나눌 틈이 없다. 빠르게 다가온 눈투성이는 적의 위치를 물었다. 그러자 부랑자는 해안 요새와 멀지 않은 작은 숲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급히 말하려 했다.
“2시간 전 저 숲에서······!”
후우우우우우우웅- - - -!!
“젠장, 놈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불길한 돌풍이 불어왔다. 부랑자는 얼굴을 굳히며 요새를 습격한 적이 다가옴을 경고한다. 불안한 듯 투레질하는 사슴, 눈투성이는 고개를 돌렸다.
끼이이이익!
숲에서 검은색 안개가 넘실거린다. 동시에 거센 돌풍을 타고 성벽을 넘었으며 별동대가 모인 알뜰을 향해 날아왔다. 그러자 부랑자가 눈투성이를 향해 급히 외쳤다.
“병사들을 한곳으로 모아 불을 피우셔야 합니다, 폐하! 불이 유일한 약점입니다!”
어쩐지 성곽과 성탑 부근에 검은 연기가 많이 올라온다고 했다. 중요한 정보를 전해 들은 눈투성이는 대동한 호위병과 함께 안뜰 한가운데를 바삐 가로질렀다.
후우우우우우웅!
끼익! 끼이이익!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진다. 황혼이 황급하게 모습을 감춘다. 마치 일식과도 같은 기괴한 현상 앞에 병사들이 겁에 질려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전군 집결하라! 전군 깃발로 집결하라! 기사왕이 그대들 곁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때마침 등장한 눈투성이는 왕의 검을 하늘 높이 추켜들어 막강한 오러를 발산했다. 흰 눈처럼 새하얗고 순수한 오러, 그것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었다.
“기사왕 폐하를 따르라!”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빠르게 제정신을 찾은 별동대는 미쳐 날뛰는 사슴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무기와 기수를 돌려 기사왕 부근에서 대열을 이뤘다. 드디어 돌풍이 절정으로 향한다.
끼이이이이이이익!
순식간에 외곽과 성벽을 타고 넘어온 검은 망령은 사방으로 불길한 기운을 퍼트렸다. 그리고 만드라고라와 버금가는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북방군을 위협했다.
“발사하라! 폐하를 호위해!”
“으아아아아!!”
용기를 내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요새 병사들은 몸집을 잔뜩 부풀린 검은색 망령을 향해 연신 불화살을 발사했다.
그 덕에 재정비할 기회를 얻은 별동대는 서둘러 임시 횃불을 만들거나 가지고 온 등잔용 기름을 무기에 발라 불을 일으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입니다, 기사왕 폐하!”
요새를 책임지는 부랑자는 놈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를 믿은 눈투성이는 한 치 망설임 없이 왼손에는 횃불을 오른손에는 검을 든 채 놈에게 돌격했다.
“돌격하라!”
오늘만큼은 죽음이 두렵지 않으리! 기사왕의 돌격을 목도한 별동대는 그대로 무기와 횃불을 추켜들었다. 그리고 몸집을 부풀리는 검은 망령을 향해 맹렬히 돌격했다.
와아아아아아아 - - - -!!
푸욱! 화르륵! 챙!
서걱! 푹!
사슴으로 이루어진 물결이 망령을 급습했다. 동시에 기사왕과 수많은 별동대는 검은색 망령을 횃불로 지지고 불타오르는 창과 검으로 연신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익!
부랑자 말이 맞았다. 놈은 어쩐 일인지 많이 약해져 있었다. 북방군은 효과는 미미할지언정 숫자와 기동력으로 밀어붙이며 망령 놈을 연신 한구석으로 몰아넣었다.
푸르륵! 푸륵!
다각! 다각! 다각!
“할, 할 수 있다!”
해안 요새 생존자들은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악마와도 같았던 망령이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역시 기사왕 폐하다.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열심히 활시위를 당겼다.
“몰아붙여! 도망칠 틈을 주지 마!”
“기름! 여기 기름 더 가져와!”
할 수 있다는 판단은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북방군은 유기적으로 움직여 도망칠 퇴로를 단단히 틀어막고 검은 망령의 유일한 약점인 불꽃을 더 크고 맹렬히 일으켰다.
콰르르르르응!
“- - - - - - - - -!!”
하지만 몰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운 그 순간 또 한 번 불어온 매서운 돌풍과 함께 천둥과 벼락이 지상을 강타했다.
사슴은 깜짝 놀라 앞발을 들어 올린다.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일부 인원은 무언가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눈투성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외쳤다.
“모두 뒤로······!”
촤자자자자자작!
푸욱, 콰직! 끄아아아아아악!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불멸왕은 고산 때와 마찬가지로 사념체를 직접 조종하고자 의식을 강림했다. 그러자 오러가 실린 나뭇가지들이 북방군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모조리 죽여 주마······!]
가뜩이나 도망친 세계수 탓에 사념체와 연결이 희미해지던 참이다. 불멸왕은 차라리 사념체와 연결된 의식이 끊기기 전 기사왕과 북방군을 죽여 버릴 공멸을 선택했다.
치지지지지지직, 쾅!
파편이 붉은색 태양처럼 과열된다. 이제는 괴물 그 자체가 돼 버린 사념체는 마지막 발악을 위해 북방군을 학살했다. 물론 최후로 노리는 목표는 바로 기사왕이었다.
쿠르르르르릉!
으아아아아악!
엄청난 기세였다. 마치 세상은 종말이라도 다가온 듯 흔들리기 시작했고 사념체는 악(惡) 그 자체가 되어 지상 위에 강림했다. 병사들은 두려움에 질린 비명을 내질렀다.
“끝까지 폐하를 호위하라!”
“도망치십시오! 기사왕 폐하!”
불은 이제 소용없다. 오러와 검은 닿는 족족 파괴된다. 기사들은 결국 몸을 날려 가며 날아오는 공격을 막았고 왕이 후방으로 후퇴할 수 있도록 기꺼이 목숨을 포기했다.
푹! 푸슉!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동귀어진을 선택한 사념체는 너무나 막강했다. 이대로 가면 자신은 살지언정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북방군이 속수무책 당하고 말 것이다.
“·········!!”
병사들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이 살아남으라고? 스승은 나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결국, 이를 악문 눈투성이는 기수를 돌려 기사와 병사들을 향해 다시 달려갔다.
다각, 다각, 다각!
츠즈즈즈즈즉!
“기사왕이 여기 있다!”
[기사왕 - - -!!!]
눈투성이는 그동안 쌓아 온 오러를 모두 쥐어짜 검날로 발산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신경을 날아오는 적의 공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온다, 바로 오른쪽 위다!
챙! 파사삭!
가까스로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한 번의 공격으로 오러는 반파 당했으며 엄청난 고통이 몰려온다. 내상을 입은 눈투성이는 쿨럭 피를 뱉어내며 검을 들어 올렸다.
챙! 채앵! 쾅!
막는다! 막는다! 또 막는다! 의지와 신념을 불태운 눈투성이는 기적처럼 날아오는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돌풍이 불어오는 폭풍우 한가운데서 불멸왕을 노려보았다.
“끄으으윽!”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기어코 오러가 파괴당한 눈투성이는 들어 올린 왕의 검과 함께 사념체를 향해 돌격했다. 하얀 바람이 울부짖는다. 기사왕 또한 고함을 내질렀다.
“폐하- - - -!!”
“안돼!”
촤자자자자작!
그 순간 오러가 실린 수천 개 가시가 눈투성이를 향해 쏟아졌다. 그러자 기사들은 비명을 내질렀고 돌격하던 눈투성이 또한 마주한 위기 앞에 두 눈을 크게 떴다.
“- - - - - - - -!!”
이건 막지 못한다. 황급히 앞발을 들어 올리는 하얀 바람 뒤로 눈투성이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아·········.”
하지만 이상하게도 죽음은 아프지 않았다. 고통은커녕 그리운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분명 먹구름이 끼어 있을 텐데 환하게 빛나는 눈앞. 그곳에는 그리운 기억이 있었다.
“눈투성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수천 개 가시는 전부 잘려있었다. 악마와도 같던 사념체는 두려움에 떨었고 오직 고고한 검 한 자루만이 오러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검을 고쳐 쥐어라.”
눈투성이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쥐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허리를 곧게 펴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왕의 얼굴을 들었다.
세상이 뿌옇게 변했다. 재빨리 눈물을 닦은 눈투성이는 야무지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등지고 있는 스승 부러지는 검을 향해 달려가 함께 검을 들었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