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검은머리 기사왕 117화
사박, 사박, 사박.
초라한 복장으로 모습을 위장한 한 엘프 신관이 풀숲을 부지런히 가로질렀다.
그리고 주변을 삼엄하게 경계하는 병사들 눈을 피해 성역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왔습니다, 신관님.”
“꼬리는 쳐냈습니까?”
“저뿐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신관을 기다리고 있던 이는 다름이 아닌 엘프 여왕과 세계수를 성심껏 모셨던 또 다른 고위 신관 ‘고귀한 자’ 피핀이었다.
친우인 고위 신관 아델핀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후로 여왕의 눈을 피해 세계수 성역 근처에 쭉 숨어 있었다.
“물건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신실한 하위 신관은 여러 결사대의 도움을 받아 구해 온 물건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깨끗하고 튼튼한 유리관과 함께 무언가를 같이 담을 수 있는 성역 호숫물이 푸른빛과 함께 찰랑이고 있었다.
왕국의 딱 하나 남은 생명체 요람이다. 물건이 진품인 것을 확인한 피핀은 가방을 손수 챙기며 신관에게 말했다.
“불멸왕이 잠시 휴식에 들어갔습니다.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니 죽음을 각오하세요.”
“······알겠습니다.”
사념체를 조종하느라 지친 불멸왕은 잠시 거처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세계수 성역에 아무도 없는 지금이 부서진 파편을 회수해 올 유일한 기회였다.
꿀꺽.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하위 신관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피핀. 그 둘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통로를 지나쳐 지하로 내려갔다.
타박, 타박, 타박.
“- - - - - - - - -.”
지금, 이 순간에도 상처 입은 세계수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피핀은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하위 신관이 묻는다.
“사제님, 정말로 또 다른 신이 탄생한 겁니까? 저는 마음이 흔들립니다.”
“불신하지 마세요! 이 세상 어디에도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신은 없습니다.”
불멸왕을 또 다른 신이라 찬양하는 자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놈이 사용하는 능력은 전설로만 내려오는 마법이 아닌 지고한 세계수의 권능이라는 것을 말이다.
불멸왕은 그저 힘으로 세계수를 겁박하고 갈취하고 있을 뿐 본연의 능력은 오직 파괴뿐이다. 그런 무도한 자는 신이 아닌 대륙을 위협하는 악마 그 자체다.
“그러니 저희가 구해 드려야 합니다.”
대륙과 함께 태어난 세계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결코 엘프를 군림하거나 지배하지 않았고, 그 능력을 오로지 풍요를 위해서만 사용했다.
풍요는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 모두가 향락과 파괴라는 술에 취한 사이 오랜 시간 정신을 수련해 온 신관들만큼은 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위 신관이 굳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고귀한 자 피핀을 따라 세계수 뿌리 안쪽 신성한 성역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아······!”
드디어 성역에 도착했다. 항상 은은하게 풍겨오던 신성함은 어디 가고 불길한 기운만이 주변에 감돌고 있었다.
얼굴이 어둡게 변한 피핀은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죄의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님을 알기에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호수로 다가갔다.
탁!
“제 손을 잡으세요, 사제님.”
항상 신성한 물로 가득했던 호수는 말라붙어 있었다. 신관의 손을 잡고 겨우겨우 아래로 내려온 피핀은 생명체 요람을 꺼내 세계수 본체가 있는 심장 앞으로 다가갔다.
끼이이이이·········.
심장은 뿌리 속 조그마한 구체였다. 과거에는 분명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존재였는데 지금은 더러운 녹이 끼어 있었다.
세계수 파편을 이용해 벌써 3번째 사념체를 만들어 낸 불멸왕. 언제나 영원할 것 같던 세계수의 수명은 반절을 넘어 이제 겨우 3분의 1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게 바로 무리한 강압과 통제가 만들어 낸 참담한 결과다. 결국, 눈물을 보인 피핀은 덜덜 떨고 있는 세계수 파편을 수습한 뒤 심장 위에 양손을 올려 두었다.
이것을 뽑으면 태초 때부터 자리를 잡았던 거대한 거목과 뿌리가 시들고 말 것이다. 피핀은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릴 행동 앞에 순간 많은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타락한 건 신인가, 우리인가?’
향락과 쾌락이 전부가 된 혼란스러운 시기 앞에 오직 신실함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뿌리와 근본을 잊어가는 한심한 엘프들뿐이었다.
툭, 지지지직!
피핀은 망설임 없이 심장을 뽑았다. 그리고 가여운 세계수를 요람 안에 넣고 서둘러 신관이 기다리는 호수 위로 올라갔다.
쿠구구구궁 - - -!
그 순간 심장을 잃은 세계수 본체가 흔들렸다. 동력이 사라진 기계처럼 뿌리와 본체는 거대한 몸집을 유지할 힘을 잃은 것이다.
삐이이이익! 삐이익!
침입자다! 성역을 지켜라!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성역 밖에서 이변을 눈치챈 경비병들이 호각과 함께 바삐 통로를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핀은 요람을 하위 신관을 향해 넘겼다.
“신, 신관님?”
“제가 막겠습니다. 형제님은 서둘러 항구로 도망치세요. 미리 부탁해 둔 조력자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스릉!
피핀은 재빨리 검을 뽑았다. 고위 신관으로 처음 임명될 때 세계수가 친히 뿌리와 잎으로 만들어 준 소중한 검. 그곳에는 푸르고 올곧은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서두르세요!”
이를 악문 하위 신관이 다른 통로로 도망친다. 동시에 중무장한 엘븐 가드들이 성역으로 쏟아져 들어와 오러가 맺힌 날카로운 창과 화살을 피핀을 향해 겨눴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양손에는 아직 세계수가 전해 준 온기와 떨림이 남아 있었다. 고귀한 자, 신실한 자, 피핀은 감고 있던 두 눈을 뜨며 검을 휘둘렀다.
* * *
“······오러가 통하지 않는다고요?”
“그렇습니다, 폐하.”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일 존재가 해안 요새를 습격했다. 요새는 해가 뜨기도 전 외곽이 완전히 함락당했고, 그 소식은 다음 날이 돼서야 수도에 도착했다.
날붙이와 오러가 통하지 않는 무형의 존재라니,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눈투성이는 재상 기억하는 새를 향해 물었다.
“과거에 혹시 이런 사례가 있었나요.”
“옛 전설에나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폐하. 이 보고가 만약 진실이라면······.”
고대 역사마저 통달한 그녀조차 예고 없이 등장한 날벼락처럼 등장한 놈의 정체를 쉽사리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요새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망령이라 불리는 그 존재는 엘프가 쉽사리 넘보지 못했던 해안 요새를 겨우 반나절 만에 반파했다. 운용이 쉬운 소규모 지원군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백색 관문을 지키고 있는 회색 늑대를 부르거나 이제 막 경험을 쌓는 신임 지휘관을 보낼 수도 없는 상황. 눈투성이는 어두운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스승님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직접 해안 요새로 향했거나 자신이 취할 적절한 조언을 해 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비어 있는 스승님의 자리가 너무나 컸다.
“경들은 들으세요!”
하지만 눈투성이는 아쉬움만을 느꼈을 뿐 홀로 선 의지를 흔들지는 않았다. 위엄 있는 목소리와 주변을 장악하는 분위기에 모든 대신과 관료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친정하겠습니다. 경들은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고 왕국 밖 상황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세요.”
“뜻대로 하소서 폐하!”
이제는 적수가 몇 없는 압도적인 무위, 기본부터 착실하게 쌓아 온 뛰어난 전략 전술, 그리고 필요할 때는 반드시 몸을 일으켜 적을 척살하는 굳센 수호 의지.
이것이 기사왕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왕권이자 힘이다. 흔들렸던 왕궁 분위기는 금세 안정을 되찾았고 고개를 숙인 관료들은 북방군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해안 요새로 향할 지원군 편성은 채 다음 날이 오기 전 끝이 났다. 재건된 기사단을 대동한 기사왕 눈투성이는 새벽 일찍 수도를 빠져나와 해안 요새를 향해 달렸다.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과 왕이 친히 출정했다는 소문은 북방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동안 평화를 만끽하던 인간들은 바뀌는 대륙 정세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다.
* * *
기꺼이 체류해 준 조사관과 병사들 덕분에 마을 재건은 채 봄이 오기 전 끝이 났다.
하지만 이제 노스플롬으로 돌아가는 그들과 다르게 나와 검은 화살은 마을에 남았다.
고산에서 얻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새로운 기운과 선왕의 묘에서 이룩한 또 한 층의 경지는 내게 새로운 격이라는 것을 선사해 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섣불리 수도로 돌아가는 것보다 얻을 것을 정제하는 데 집중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손에 쥐었다고 한들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재건이 끝난 고산 마을은 마지막 수련을 위한 장소로는 최적이었다. 어머니 북방과 가장 가깝기도 했고 고산 마을 주민들 또한 순박하고 친절했기 때문이다.
나와 검은 화살은 생에 첫 휴가를 즐긴다는 마음으로 반년간 고산 마을에 머물며 심신을 단련하고 삶을 잠시 뒤 돌아봤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돌아갈 때가 왔다.
‘전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경!’
주기적으로 마을을 찾아오는 노스플롬 징수관이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동안 평화가 유지되던 해안 요새가 정체불명 적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기사왕 눈투성이는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며 수도 관료들과 각 도시 영주들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예비군을 소집하고 주변 치안을 안정시켰다.
반나절 만에 요새 외곽을 함락시킨 정체불명의 망령,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챈 나와 검은 화살은 수련이자 휴가였던 이번 여정이 끝이 났음을 직감했다.
눈투성이가 이미 출정했으니 서둘러 합류해야 한다. 노스플롬으로 돌아갈 짐을 꾸린 나와 검은 화살은 이동하기 가장 좋은 내일 고산 마을을 떠날 예정이었다.
“드디어 가시는구먼, 검성.”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신세는 무슨! 우리가 더 고마웠지.”
그리고 떠나기 전날 밤 나는 한동안 신세를 진 마을 주민들과 촌장을 찾아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언제 다시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들 덕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자네는 참 가진 것이 많더군.”
그리고 웃음과 함께 덕담을 나눈 촌장은 방을 나서기 직전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고산 마을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조각칼로 깎은 아름다운 통짜 검집이었다.
“하지만 검집이 부서지지 않았나? 이게 우리가 선물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네.”
“······ 끝에 깃털이 달려 있군요.”
“고산 창공을 나는 북방 눈수리 것이지. 지상으로 잘 내려오지 않기에 천운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귀한 물건이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북방 눈수리의 깃털은 윤기를 품고 있었다. 가져다 팔기만 해도 수많은 금화를 얻을 수 있는 귀물인데 내게 줘 버려도 되는 것일까.
“은인에게는 아깝지 않아.”
“······감사합니다, 촌장님.”
검을 뽑아 집을 옮겨 보았다. 그러자 검집은 마치 주문 제작한 듯 쏙 들어갔다. 나는 마치 고산 자체를 품은 것 같은 든든함에 촌장과 마을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촌장이 마지막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제 수리처럼 훨훨 날아가게, 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