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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16화 (116/181)

116화

검은머리 기사왕 116화

삐이이이이이 - - - -!

“돌격! 돌격하라, 형제자매들아!”

“무도한 적에게 죽음을!”

청아한 풀피리 소리가 대수림에 울려 퍼진다. 그러자 수많은 엘프 군대가 녹림이 짙은 풀숲을 일제히 빠져나온다.

목표는 대수림 앞에 진을 치고 있는 3황자의 오크 군단. 병사들을 이끈 엘븐 가드들은 막강한 오러를 뿜어내며 외쳤다.

“대수림을 수호하라!”

“와아아아아 - - - -!!”

금발 머리, 아름다운 용모, 금색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갑옷, 명예와 숭고함이 공존하는 엘프 군대는 마치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자 온 천상 군대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얀 모습 안에 감춰진 알 수 없는 속내는 이미 악취 나는 마약과 더러운 향락으로 찌들어 버린 지 오래였다.

엘프를 제외한 모든 종족은 멸살하라! 이보다 더 극단적인 종족주의가 있었던가. 증오보다 악독한 배덕과 배척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 오크들을 향해 쏟아졌다.

“방패 올려! 방패 머리 위로!”

“맛 좋은 귀쟁이 놈들이다!”

하지만 그런 엘프를 상대하는 오크들이라고 결코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거의 기습에 가까운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오크들은 능숙하게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아내었다.

싸우기 위해 태어나 오직 싸우다 죽는 녹색 전사들! 드디어 내전이 끝난 오크 제국은 마치 공장에서 부품을 찍어내듯 수많은 전사를 서쪽으로 동원하고 있었다.

하나가 부족하면 열, 열이 부족하면 백을 동원한다. 육중한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오크 서전트와 병사들은 한 치 물러남 없이 엘프 군대와 격돌하기 시작했다.

퓽! 퓨슝! 파바박!

채앵! 챙! 서걱!

화살을 쏘고 방패로 막는다. 창을 내지르면 도끼를 들고 돌격한다. 머리를 찍고 목을 베고 몸통을 꿰뚫는 육탄전은 양측을 향한 근본적인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전장 상황은 쉽사리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질은 엘프가 우세하다.

수는 오크가 우세하다.

그 묘한 대치 속에 저울추는 계속해서 중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엘프와 오크 간 전쟁이 벌써 반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유였다. 양측 군대가 우열을 가리기에는 서로 총동원한 전력이 너무나 비슷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2km 전선을 확보할 때마다 수천 명씩 죽어가는 병사.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때마다 군단 재편을 각오해야 하는 희생. 대수림 앞에서 죽어 간 병사만 벌써 수만이었다.

커억, 컥!

콰직! 서걱!

그리고 엘프 군대가 돌격을 시작한 오늘도 바닥에는 시체가 쌓여 가고 있었다.

황급히 전투마와 함께 달려온 오크 사령관은 질렸다는 얼굴로 참모에게 물었다.

“적 규모는?”

“어제와 같습니다.”

저 귀쟁이 놈들은 오크가 대수림으로 들어오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조금이라도 영역이 침범당한다 싶으면 저리 망아지처럼 날뛰고는 했다.

이것으로 벌써 11번째 공격이었던가? 부임한 지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오크 사령관은 기억나지도 않는 숫자를 가늠해 봤다. 그러자 참모가 그를 향해 물었다.

“지원을 요청할까요?”

“아니, 됐다! 우리만으로 충분해.”

공적을 위해 가장 위험한 최전방으로 지원했다. 괜한 지원 요청으로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수는 없었다. 얼굴이 탐욕으로 물든 오크 사령관은 재빨리 검을 뽑았다.

“기마대를 집결 시켜라!”

나무가 빽빽한 대수림 안쪽이면 모를까 이곳은 평원과 이어지는 경계면이다. 그나마 엘프보다 우세한 병종인 기병을 적진으로 돌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철 갑주로 무장시킨 중기마병. 어느덧 병영을 빠져나온 기마대는 깃발을 들어 올린 기수들을 따라 전장 오른쪽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한참 뒤섞여 싸우느라 좌측이 노출된 엘프들이다. 얼굴이 전의로 물든 사령관은 정예 서전트의 호위를 받으며 기마대를 우회시켰고 이내 완벽히 대열을 이루었다.

“전진! 선두 속도에 천천히 맞춰!”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멍청한 귀쟁이 놈들, 기병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물론이고 유일한 대응책인 창병들까지 다른 곳에 시선이 팔려 있다.

이대로 중기마대가 측면으로 달려든다면 대열은 단순 붕괴가 아닌 전멸까지 갈 수 있으리라. 얼굴이 환희로 물든 사령관은 선두 대열을 서서히 가속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 - - - -!!

때가 되었다. 가속이 붙은 중기마대는 맹렬한 속도로 평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오러를 전개하는 사령관과 서전트를 따라 육중한 기병용 거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돌격! 적을 괴멸하라!”

“Whoa! Guaaaa!”

300m, 200m, 그리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100m. 흥분한 말, 흥분한 병사, 빛을 받아 반짝이는 창날이 정면으로 향한다. 기마대는 적 측면과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파스스스스스, 츠즈즈즉!

히히히히힝!

“!!!!”

하지만 그 순간 알 수 없는 검은색 연기와 함께 날카로운 돌풍이 몰아쳤다. 잘 달리던 전투마들은 깜짝 놀라 미끄러지며 본능적으로 돌풍을 피해내려고 했다.

서걱! 촤자자자작!

푸욱, 푹!

돌풍과 연기 사이로 검은색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뿌리와 풀로 이루어진 불멸왕 사념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가지를 뻗어 중기마대를 꿰뚫었다.

끄아아아악! 쿵!

털썩! 히히히힝!

돌격 대열을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마치 안개가 확산하듯 몸을 부풀린 사념체는 대열이 무너지는 기마대를 짐승처럼 물어뜯고 양쪽으로 찢어발기며 죽이고 또 죽였다.

끼이이이익! 끼익!

후우우우웅!

세계수를 통제하는 불멸왕 본체가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런 이점만으로도 사념체는 고산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했다. 한 서전트가 두려움에 질려 외친다.

후웅! 틱!

“오, 오러가 통하지 않는다!”

오크에게 있어 오러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베고 부수게 해 주는 무신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오러가 통하지 않을 때 숭배와 믿음은 너무나 쉽게 깨졌다.

“퇴, 퇴각하라! 전군 퇴각하라!”

엘프 놈들이 끔찍한 악신을 불러왔다. 그렇게까지 밖에 생각할 줄 몰랐던 사령관은 서둘러 기수를 돌렸고 이내 당황하는 기마대를 향해 퇴각 신호를 보냈다.

두려움은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오크 보병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물론 엘프 군대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돌격 신호를 보냈다.

뿌우우우우우우!

전장에서 발생하는 대부분 사상자는 후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법이다. 당연하게도 지휘권이 무너진 오크 군대는 속수무책 죽임을 당하며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끼이이이익!

화르르륵!

패주한 오크 군대가 대부분 죽거나 도망쳤다. 온몸을 피로 적신 엘븐 가드는 주렁주렁 매달린 오크 머리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했다.

“불멸왕이 함께 하신다!”

무기를 든 엘프들이 피 웅덩이와 내장 위에서 거센 함성을 내지른다. 동시에 시체들은 쓰레기를 소각하듯 불태워졌으며 포로들은 산채로 태워져 신의 제물이 된다.

엘프를 제외한 모든 종족을 죽이고 멸종시키겠다는 거룩한 성전. 마치 광신도를 보는 것 같은 이질적인 풍경에 대수림과 세계수마저 자신이 본 것을 잊으려 했다.

반년째 팽팽하게 이어지던 엘프 오크 간 전쟁 상황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대륙과 종족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전쟁의 불운한 전조였다.

* * *

상륙을 막기 위해 지어진 북방 해안 요새는 엘프 선박이 등장하지 않은 지 벌써 수년이 지났다. 덕분에 최소한의 경계만 이뤄지고 있을 뿐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군대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해안 요새를 지키는 검은 화살의 부랑자 부대는 오늘도 아름다운 북방 바다를 즐기며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대장은 잘 지내고 있을까?”

“뭐, 어련히 지내고 있으려고.”

“아니, 검성이랑 말이야.”

엘프 혼혈로 이루어진 부랑자들은 검은 화살을 따르는 열렬한 추종자임과 동시에 평생을 함께 살아온 가족이었다.

그만큼 검성을 향한 그녀의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벌써 반년이나 지난 이번 여정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아기를 데려올지도 몰라.”

“헉!”

혹시 모르지 않는가, 힘든 수련 속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싹틀지 말이다. 열심히 쑥덕거린 부랑자들은 새로 생길지 모르는 조카 동생을 벌써 상상하기 시작했다.

“앗, 부관님들 오셨습니까!”

“별문제 없지?”

“매번 똑같습니다.”

대부분 구성원이 오러를 다루는 부랑자들은 하나 같이 부관이나 사령관 직위를 달았다.

하지만 북방군은 엘프와는 달리 혼혈을 향한 별다른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부랑자들은 북방 왕국에 빠르게 녹아들 수 있었고 여러 분야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과 뛰어난 실력을 입증받았다.

“들어가 봐, 우리가 마저 살필 테니까.”

“흐흐 감사합니다!”

그리고 성벽을 순찰하던 부랑자 또한 북방군 병사와 스스럼없이 지내며 중요 거점인 해안 요새를 안전하게 지키고 있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재빨리 병영으로 돌아가는 병사.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부랑자 둘은 고요한 바다를 살피며 조용히 웃었다.

“······정착이라는 거 생각보다 괜찮네.”

“그렇지?”

처음 대장을 따라왔을 때만 해도 이 짧은 변덕이 얼마나 갈지 내기를 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새로운 북방 왕국에 매료된 사람들은 자신들이었다.

부랑자들 몇몇은 벌써 북방인과 결혼까지 했다. 거기다 군을 제대하고 나와 자신이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한 이들도 있었다.

친절한 사람들, 아름다운 자연, 자신을 사랑으로 감싸 주는 북방 어머니.

어느새 북방인이 된 그들은 이제 부랑자 딱지를 뗄 때가 왔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 근무가 끝나면 수도로 한번 가 볼 생각이다. 서로를 보며 씩 웃은 그 둘은 찰랑이는 밤바다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쏴아아아아아.

“음?”

하지만 그 순간 달빛 아래 밤바다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조그마한 돛단배였으며 그 위에는 아무도 탑승하지 않은 상태였다.

파도와 바람을 타고 해안까지 쓸려 내려온 것일까? 의문을 느낀 부랑자 둘은 배가 떠내려 온 해안가를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흙?”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해안가로 떠내려 온 배 위에는 조그마한 상자와 함께 갈색 흙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분명 아주 어린 시절 어디선가 맡아 본 기억이 있었다. 부랑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배로 다가갔다.

후우우우우우웅- - - -!

찌릿!

“윽······!”

그 순간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동시에 반쪽짜리 엘프 피가 격렬하게 반응하며 이 배덕과 배교 앞에서 물러나라고 외친다.

뿜어지는 검은 연기, 녹아내리는 갈색 흑, 작은 돛단배 위로 검은색 형제로 이루어진 불멸왕 사념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익······!”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부랑자는 활시위를 걸고 촉 끝에 오러를 발산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다를 건너온 사념체를 향해 오러 화살을 발사했다.

퓽! 후웅!

하지만 당연하게도 오러 화살은 허무하게 통과했고 사념체가 뿜어낸 불길한 기운은 바다 위 해무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세계수는 비명을 질렀다. 사념체가 생겨날수록 깨져나가는 파편은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앞당기는 잔혹한 짓이었다.

반대로 사념체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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