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검은머리 기사왕 115화
검은 화살은 태어날 때부터 긴 세월을 약속받았다. 그것은 특별히 사랑을 받아서도 타고난 공적을 세워서도 아닌 얼굴도 모르는 엘프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당연히 이 핏줄을 축복받았다고 여겼다. 자신이 성취한 경지와 오랜 수명은 반쪽짜리 인간보다는 반쪽짜리 엘프 쪽이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러지는 검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한 남자와 함께하게 된 순간 180도 달라졌다. 검은 숲을 빠져나와 마주한 북방과 북방인은 자신이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인간 핏줄이 아니었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그들은 불꽃이었다. 태동과 죽음이 수시로 함께하는 삶을 살며 감정에 솔직하고 현실은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았다.
물론 그것은 만연한 염세주의가 아닌 매사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온 결과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노력하며 살아온 북방인은 새하얀 순 백밀 아래 웃으며 떠났다.
‘인간 찬가.’
긴 시간 매료되었다. 영원불멸이 주지 못했던 생동감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시작이 있다면 끝 또한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한 하프 엘프는 한 남성 또한 사랑했다. 자신이 본 불꽃 중 가장 멋있게 타올랐던 불꽃. 그는 하늘 위에 뜬 별이자 수많은 신념을 이끄는 등대였다.
‘검성, 부러지는 검.’
푸르륵!
한참 좋은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볼을 촉촉하게 적시는 말랑한 물체로 인해 검은 화살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검은 코······?”
분명 같이 잠들었던 검은 코가 순박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밤이 지나 어느덧 아침이 온 것이다.
아직 피곤이 덜 가신 검은 화살은 양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러자 한 줄기 의식이 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 화살은 꺅 비명을 지르며 경악했다.
“부러지는 검!”
의지를 불태운 검은 화살은 거친 눈보라와 험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고산 아래 숨겨진 선왕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부러지는 검이 부탁한 대로 묘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과 통로를 열어 가장 편한 자리에 그를 눕혔다.
하지만 그대로 둔다면 과다 출혈로 인한 죽음은 기정사실이었다. 각오를 다진 검은 화살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바로 사념체가 파괴된 자리에 남아 있던 뿌리 결정을 잘근잘근 씹어 정신을 잃은 부러지는 검의 입으로 넣어 준 것이다.
그러자 뿌리 결정은 익숙한 기운을 풍기며 심장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고 이내 거짓말처럼 출혈과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치지직, 칙!
몸에서 알 수 없는 변화가 느껴졌다. 그것이 또 다른 태동임을 직감한 검은 화살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봤다.
아니, 지켜보려 했었다.
“근, 근데 잠들었어······.”
야속하게도 오랜 시간 눈보라를 헤쳐 온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몰려오는 수마를 참지 못한 그녀와 검은 코는 결국 그 자리에서 잠들고 말았다.
“으갸아아!”
뾰족한 귀를 당기며 잠이 든 자신을 자책하는 검은 화살. 부러지는 검이 누워있던 자리는 이미 벗겨진 붕대뿐이었다.
도대체 다친 몸을 이끌고 어디로 향한 걸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검은 화살은 서둘러 그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다.
푸륵!
꾸욱!
하지만 그 순간 주변을 맴돌던 사슴 검은 코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물었다.
후각과 청각이 뛰어난 녀석답게 제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낸 것이다.
“저기로 갔다고?”
푸르륵!
다행히 밖으로 나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검은 화살은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검은 코가 안내하는 통로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등불로 주변을 밝히자 단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기다란 통로와 자연이 만들어낸 동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 - - - - - -.”
마치 왕의 성역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검은 화살은 유유자적 걸음을 옮기는 검은 코를 뒤따라갔다.
타박, 타박.
다각, 다각.
한 걸음, 또 한 걸음. 얼음과 돌이 만들어 낸 묘역을 걸어 검성의 흔적을 쫓는다. 그러자 어느덧 통로가 끝나는 지점과 함께 선왕이 모셔진 묘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우웅.
순간 맹렬한 바람이 불어왔다. 깜짝 놀란 검은 화살은 유일한 등불이 꺼지기 직전 통로 반대편 방향으로 황급히 돌렸다.
화르륵!
반짝.
그러자 무심코 지나쳤던 얼음벽이 등불 빛을 받아 거울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얼음인 줄 알았던 동굴 벽이 마치 거울처럼 날카롭게 잘린 것이다.
“이건······?”
의문을 느낀 검은 화살은 그 균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적 발생이 아닌 인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절대 겉에서 새긴 것이 아니다. 마치 유리병 속 내부를 조각하듯 절묘한 무언가가 얼음벽 안쪽에 균열을 만들었다.
오러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축적의 발산이라면 이것은 베지 못하는 것을 베는 또 다른 경지이자 신이 새긴 절기였다.
후웅.
화르륵!
그 순간 세상이 파르르 공명한다. 동시에 불어온 바람과 함께 등불이 한 인물을 밝혔다. 어둠과 미세한 빛이 일렁이는 묘역 앞에는 검성이 우둑하니 서 있었다.
“- - - - - - - -.”
정말 검 한 자루로 바람을 불게 할 수 있구나. 넋은 놓은 검은 화살은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한 검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후웅, 훙!
서걱! 훙!
가볍고 무겁다. 무디고 날카롭다. 빠르고 느리며 쉽기도 또는 어렵기도 하다.
세상사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검술의 향연은 이방인이 겪어 온 삶을 그대로 그려냈다.
지이이이이잉 - - -!
고통을 극복했을 때 그는 더욱 강해졌다. 한계가 있음에도 나아갔을 때 그는 숭고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재능이 없을지언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츠즈즈즈즉!
그 우직함, 노력, 인내. 모두가 비웃고 모두가 경시했던 길을 혼자 걸었을 때 비로소 명예로워지는 법이다. 그것을 홀로 깨달은 검성은 두 눈을 조용히 감았다.
그가 선왕과 어머니에게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철학, 가치관, 감정, 붓이 지나간 종이처럼 공간에 검이 남는다. 그렇게 검성은 마지막으로 검을 휘둘렀다.
후웅, 서걱!
검이 순식간에 벽을 베었다. 하지만 단순한 그 휘두름은 파동처럼 뻗어나가 동굴 벽에 붙어있던 모든 얼음과 고드름을 깨트렸다.
쩌저저저저정!
“아······!”
묘역은 한순간 얼음 결정과 눈송이들이 만들어낸 순백으로 가득 차 버린다.
마치 날아오르는 나비와도 같은 아름다운 절경 앞에 검은 화살은 탄성을 터트렸다.
드디어 끝이 완성되었다. 편안한 얼굴로 검을 집어넣은 검성은 눈을 떴다. 그리고 흰나비와 함께 사라진 기사왕과 어머니 북방을 향해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 * *
다각, 다각, 다각.
고산은 언제 눈보라가 불었냐는 듯 청아한 하늘과 함께 따뜻한 햇볕을 비췄다. 그리고 때맞춰 선왕의 묘를 빠져나온 우리는 고산 마을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사슴을 몰 줄 모른다는 거짓말이 다 들통 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장 뒤에 앉아 있는 검은 화살. 그녀는 무엇이 그리 기분 좋은지 작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쨌든 일이 잘 해결돼서 다행이야.”
“네 덕이다.”
“헤헤, 부끄럽게 또.”
마침 검은 화살이 내게 세계수 뿌리를 먹인 것도, 선왕의 묘에서 서임을 받은 것도, 모두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의 기연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연들이 톱니바퀴처럼 얽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 이 또한 어머니 북방이 점해 준 운명이 아닌가 싶었다.
분명 앞으로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광활하게 펼쳐진 고산과 북방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기수를 몰았다.
“이제 괜찮은 거지?”
“응.”
몸이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거나 하는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계수 뿌리가 워낙 작았던 탓도 있고 인간이라는 뚜렷한 한계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혈투 중 입은 상처와 오러 내상이 전부 치료됐다는 것이다.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었던 불치병을 끝내 엘릭서 없이 스스로 회복한 것이다.
두근두근.
나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그러자 과거보다 세찬 박동과 함께 또 다른 기운 하나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정말 작은 기운이다. 그러나 이 알 수 없는 기운 덕분에 자연 회복량도 늘어났고 오러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었다.
정말 사념체 결정이 뿌리라도 내린 것일까. 나는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던 세계수를 기억하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분주하게 주변을 살피던 검은 화살이 내 등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풀숲 냄새 진원지를 드디어 찾은 모양이다.
킁킁.
“너한테서 어제부터 익숙한 냄새가 난다니까? 분명 숲 냄새 중 하나야.”
“근처가 다 숲이잖아.”
“아니, 다른 냄새야.”
겨우 사념체 파편을 하나 삼켰다고 그런 극적인 변화가 생길 리가 없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고산 마을을 향해 바삐 기수를 몰았다.
다행히도 눈사태에 휘말렸던 조사관 병사들과 주민들은 전부 무사했다.
내가 일찍이 사념체를 쫓아간 덕에 추가적인 피해는 생기지 않은 것이다.
섣불리 길을 나섰다는 생각에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던가. 나는 모두 무사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고산 마을로 향했다.
따악! 딱! 딱!
거기 머리 조심해!
우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파괴되었던 고산 마을은 일찍이 재건에 들어갔다.
습격 주체인 사념체가 완전히 소멸했으니 더 이상 피난을 갈 이유가 사라졌다.
노스플롬 귀환을 잠시 미룬 채 기꺼이 두 팔을 걷어붙인 조사관과 병사들.
아직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재건 공사로 인해 분주해 보였다.
다각, 다각, 다각!
“경! 돌아오셨군요!”
“기사님이 돌아오셨다!”
벌써 반쯤 지어진 정문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조사관이 병사들과 함께 달려왔다.
나와 검은 화살은 그대로 안장에서 내려 오른쪽 팔에 부목을 대고 있는 조사관과 병사들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 물었다.
“다쳤나?”
“하하, 살짝 부러졌습니다. 그래도 더 안 다친 게 어디입니까? 모두 경 덕입니다.”
듣기로는 쓸러 내려가는 주민들을 구하느라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고 들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수습은 물론이고 주민들 피해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내가 더 고맙다.”
유능한 영주 아래, 헌신하는 관료가 있고 착실한 병사들이 있다. 나는 용맹한 노스플롬 토박이들을 칭찬하며 가지고 왔던 은화를 조사관에게 전부 넘겨주었다.
“받, 받을 수 없습니다, 경.”
“내가 영주 대신 주는 거다. 이번 임무로 죽은 병사들 가족을 위로하고 고생한 다른 병사들 또한 치하해라. 그리고 자네 몫도 챙기는 거 잊지 말고, 알았나?”
북방 관료들은 기본적으로 박봉이다. 추후 대대적인 개선이 있겠지만, 그때까지는 이런 큰 상금은 꿈도 못 꾼다.
나는 웃음이 만연한 조사관과 병사들을 다독여주며 짐과 검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직접 소매를 걷어붙인 다음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을 향해 걸어갔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경!”
“편히 앉아 계십시오!”
1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나는 만류하는 조사관과 병사들을 뿌리치며 직접 통나무를 옮기고 자재를 쌓아 올렸다.
“잘난 척하더니.”
“끙······.”
그리고 그날 오후 허리와 어깨를 삐어 온종일 침대 위에 누워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