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검은머리 기사왕 114화
‘이번에도 적장을 베었다지.’
‘왕의 종자라고 하지 않았나. 저 정도 공적이면 곧 기사로 임명될 텐데.’
영웅과 기사가 범람하는 때가 있었다. 그 시대는 찬란한 황금이라 불리며 수많은 인간이 왕 아래 모이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 흐름 중 하나였던 나 또한 마지막이자, 유일한 젊음을 불태우며 기사왕을 위해 종자로서 종군하고 있었다.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수년을 야인으로 살던 내게 이름과 목적을 심어 준 왕과 북방은 또 다른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야기 못 들었나? 아무리 수련해도 오러를 다루지 못한다는군.’
하지만 공적을 세우고 성취를 볼수록 나를 옭아매는 것은 열등감이었다.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왕의 종자, 평생 기사가 되지 못하는 한낱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반쪽짜리 인간이야.’
승리할 때면 환호 속 쑥덕임이 들려왔다. 패배할 때면 비아냥 속 조롱이 들려왔다.
나는 운명을 짓누르는 세상 속에서 점점 한 감정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검을 집어라.’
증오하고 분노할 때만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검 끝은 적에게로, 혹은 나를 모욕한 입을 향했고 들려오던 조롱과 비아냥은 어느새 두려움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속은 까맣게 죽었다. 북방과 왕을 위해 살겠다는 신념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있었고 나는 어느새 아군과 적군 사이에서 ‘검귀’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렇게 덧없던 시간이 지나 원정을 나섰던 기사왕이 돌아왔을 시기가 그때쯤이었다. 관료들과 기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내 종자 직위를 박탈하라 외쳤다.
‘그는 잔혹하며 무자비합니다.’ ‘왕의 명예와 북방 모든 것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병사들이 그에게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하나 같이 맞는 말이었다. 비록 그 뒤에는 의도가 뻔한 악의가 숨겨져 있었지만, 나조차 검게 물들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어머니 북방조차 옆을 떠났다고 느꼈을 때 부러지는 검은 이미 북방인이 아니었다.
‘틀리다.’
하지만 기사왕은 한마디 말로 모든 것을 일축해 버렸다. 백 명이 외치는 말보단 자신이 보았던 소신을 믿고 있었다.
‘내가 아는 부러지는 검은 그렇지 않다.’
왕은 내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이름을 주고 직위를 주고 믿음을 주었을까.
모두가 나를 배척하고 미워했을 때 오직 그만큼은 태산처럼 변함이 없었다.
부끄러웠다. 동시에 자세를 고쳐잡았다. 마지막 구명을 받은 그 순간 나는 사람들 앞이 아닌 세상 아래 변하기로 다짐했다.
‘- - - - - - -.’
방향을 바꿨다. 속도 또한 늦췄다. 검을 내가 아닌 남을 위해 휘둘렀으며 분노가 아닌 평온함 아래 모든 것을 내려놨다.
‘부러지는 검.’
그러자 더 이상 나를 귀라 부르는 이는 없었다. 조롱은 존경으로, 쑥덕이던 비아냥은 환호로. 운명을 결정지을 뻔했던 마지막 한 글자는 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검성, 부러지는 검.’
검으로 끝을 보았다. 가장 먼저 기사왕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고 종자가 되어 두 번째로 갚지 못할 은혜를 빌었다.
‘하하.’
기사왕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왕좌에서 내려와 내 손을 직접 붙잡아 일으켰다. 희미하게 남은 기억의 조각 속 왕은 분명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끝내 답을 찾았구나.’
‘그래, 그 답은 어디에 있더냐?’
쿨럭!
답답함이 몰려온다. 강하게 이끌리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은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뱉어냈다. 그러자 불길한 검은 피가 입 밖을 통해 빠져나온다.
“- - - - - - -.”
이상할 정도로 숨이 편안하다. 붉게 물들었던 시야는 깨끗했고 심각했던 부상 또한 흔적만이 남았을 뿐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두근, 두근, 두근.
가슴 속에 꿈틀거리는 이 작은 생명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완전히 파괴되었던 내 육신은 심장을 중심으로 회복하고 있었다.
푸르륵, 푸륵.
도로로롱.
고개를 돌리자 온몸이 땀으로 젖은 검은 코와 검은 화살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어두컴컴한 주변을 살폈다.
“- - - - - - -.”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어두운 동굴이었다. 아니, 익숙한 지형과 모양새를 보아 선왕의 묘가 분명했다. 검은 화살과 검은 코가 기어코 여기까지 데리고 와주었구나.
슥.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하얀색 동굴 벽을 쓰다듬으며 통로 안쪽을 향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수년 만에 찾아온 선왕의 묘는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터벅, 터벅.
북방 자연이 만든 천연 동굴은 돌과 얼음이 적절하게 섞인 신비한 공간이다.
그리고 깊숙하게 이어지는 통로 끝에는 횃불을 투영한 얼음들이 반짝였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끝없이 이어진 통로를 지나 묘역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정신을 맑게 만드는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후우우우우웅- - - -!
선왕의 묘가 모셔진 동굴 내부 묘역은 그리 크지 않았다. 또한, 조각상도, 장식품도, 그 흔한 석판도 보이지 않았다.
‘내게로 오라.’
하지만 마치 손님을 반기는 것만 같은 따뜻한 분위기는 햇살과도 같은 온기와 기분 좋은 소박함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온 기분이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끝이 났던 분기점 앞에 나는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다.
화륵.
그리고 들고 왔던 기름 등불을 단 위에 올려두자 여태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동굴 벽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꽃을 심고 비로소 사라진다. 가장 위대했던 잿더미, 그리고 기사왕 여기 잠들다.’
칼로 새겨진 투박한 묘비명은 기사왕이 이루고 끝냈던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장관 아래 닿을 듯 닿지 않는 그 날의 기억을 조용히 떠올렸다.
‘후계를 찾아다오, 종자야.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려 할 때 나를 찾아와라.’
기사왕은 눈을 감은 그 순간 무엇을 보았을까. 도대체 어떤 날을 예측하고 종자인 나를 자신이 잠든 묘역으로 부른 것인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도 앞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그리웠던 왕에게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털썩.
남기신 유훈을 받들어 먼 여정을 떠났습니다. 그사이 수많은 만남이 있었고 수많은 이별 또한 있었군요. 하지만 끝내 인연을 만났으니 당신의 후계로 세웁니다.
“눈투성이. 뒤를 이을 아이입니다.”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바닥과 이마가 닿자 그동안 인내했던 감정이 물밀 듯 몰려왔다. 아무도 없는 장소, 오직 내게만 허락된 마지막 시간 속에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무거운 책무 앞에 원망도 했다. 수많은 실패 앞에 포기도 하고 싶었다. 설움과 울음을 내뱉을 의지조차 없을 때, 나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 똑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난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함께한 동료, 함께한 전우, 그리고 함께했던 나의 왕 눈투성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보시기에는 어떠했습니까? 뜨거운 눈물을 추스른 나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먼저 떠나간 왕에게 잘했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 - - - - - - -.”
하지만 신이 현실을 두 개로 나눠 놓았듯 무덤 아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보다 후련해진 마음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만남이 공허한 물음과 대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올린 나는 등불과 함께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한 발자국.
터벅.
걸었다.
[아이야.]
후우우우우우웅- - - - -!!
거센 바람이 현실을 지워 버렸다. 어두웠던 동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의식과 몸은 어느덧 감히 도달하거나 닿을 수 없는 새로운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펄럭!
눈을 뜬 곳은 눈이 쌓인 언덕이다. 세상은 하얀 눈 천지였고 내리는 눈인지 날아다니는 나비인지 모를 것들이 수놓고 있었다.
그리고 흐릿한 시선 끝으로 보인다. 마치 벚꽃처럼 흩날리는 백색 나무와 익숙한 얼굴을 한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우리를 보는구나.]
백색 나무가 일으킨 따뜻한 바람이 볼을 쓰다듬는다. 마치 지금 찾아와 미안하다는 듯 눈가에 고인 눈물은 닦아내었다.
이제야 이곳을 보는구나. 여정을 끝내고 뒤돌아본 삶은 평생토록 보고 싶었던 그리움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물로 막고 있던 감정의 둑이 툭 하고 터져 나왔다.
‘종자, 부러지는 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환각인지 꿈인지 모를 이 행복한 순간이 전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쌓인 눈조차 따뜻했다. 그 사이 이마를 맞댄 나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아이처럼 꺽 꺽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기사왕은 손을 뻗어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무덤 앞에서 나누었던 공허한 물음을 대신해 진심을 말해 주었다.
‘너를 쭉 보고 있었다. 여정도, 투쟁도, 아픔도, 그리고 네 자랑도 말이다.’
‘훌륭하게 해내었더구나.’
헛된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쫓기며 살았던 두려움은 그 한마디 대답을 통해 마치 허물처럼 씻겨 나갔다. 나는 떨어지는 눈망울과 함께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내려놓아라.’
영혼이 고통을 놓는다. 오랜 시간 묵었던 감정이 눈물을 통해 전부 빠져나갔다. 그동안 수행했던 임무를 무사히 끝내고 나는 어깨 위 숙명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기사왕이 검을 뽑았다. 옆으로 세운 날을 휘날리는 나비와 꽃잎을 가르며 내 어깨와 머리 위에 조용히 안착했다.
북방이 고개를 돌렸다. 태산과 고산은 지붕이 되었고 세상사 중심에서 나는 무릎을 꿇었다. 기사왕이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방인으로 태어나 기사가 된 자를.]
‘네 명예는 무엇이었느냐?’
[인내하고 이끌었던 용기를.]
하얀색 언덕이 일렁였다. 푸르른 하늘이 흔들렸다. 생과 사를 넘어선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현실이 알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왕과 어머니 북방은 돌아가려는 나를 붙잡으며 서임을 잊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깨와 머리를 번갈아 내려앉은 검이 빛과 함께 흩어졌다.
‘기사 부러지는 검.’
[내 너를 서임하마.]
파르르륵 - - -.
그 속삭임을 끝으로 흔들렸던 하늘은 빛의 번짐처럼 사라졌고 왕과 어머니의 언덕은 하얀 나비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동시에 지독한 수마가 몰려와 짧았던 만남의 마지막을 알려온다.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내 의식은 그렇게 아래로, 또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눈이 감기는 그 순간에도 내 눈동자는 흰나비들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것이 또 한 번 찾아온 봄날, 짧은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 줄 테니 말이다.
야만의 시대.
명예를 아는 자를 기사라 불렀다.